2024 창작희곡 공모 선정작

2024 창작희곡 공모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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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희곡’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짐승이 되기로 선택한 자들의 연대,
세월을 건너 다시 전해진 한 세대의 고통…
국립극단 희곡선 『2024 창작희곡 공모 선정작』 출간

국립극단이 개최한 ‘2024 창작희곡 공모’를 통해 선정된 세 편의 수상작을 엮은 희곡집이 출간되었다. 국립극단의 창작희곡 공모는 1957년부터 한국연극의 중요한 레퍼토리들을 발굴해 온 역사 깊은 공모 프로그램으로, 2024년 새롭게 개편되어 “삶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언어로서의 희곡”을 다시 호출했다. 해당 공모에는 약 300편이 응모되었고, 3차에 걸친 심사를 통해 대상 1편과 우수상 2편이 선정되었다.
역사를 관통하는 기억, 바깥의 존재를 품는 상상력, 침묵 속 고통의 서사까지, 이 세 편의 희곡은 서로 다른 결을 지니면서도 모두 ‘동시대를 말하는 목소리’로 연결된다.

대상작 「역행기(逆行記)」(김주희)는 “작품의 길이, 상상적 공간의 스케일, 주제의 다층성 등을 고려할 때 ‘대작’이라 부를 만한 희곡”(심사 총평)으로 평가되었다. 수 세대에 걸친 여성들의 기억과 상처, 연대를 신화적 구조와 환상적 장치로 풀어낸 작품이다. 지하 세계를 향해 하강하고 다시 상승하는 구조를 통해 ‘기억의 복원’과 ‘공통된 몸의 시간’을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김주희 작가는 이 희곡에 대해 “서로의 기억과 몸이 섞이는 시간 속으로의 여행”(작가의 말)이라고 밝히며, 삶의 ‘바닥 아래’로 내려가는 일은 결국 다음 세대를 위한 뿌리의 이양이기도 하다는 점을 조심스레 제시한다. 환상, 생태적 상상력, 신화적 서사가 결합된 독창적 희곡이다.

우수상 「야견들」(배해률)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그 시대의 어둠 속에서 성소수자, 사회적 소외자, 짐승처럼 살아야 했던 존재들을 통해 ‘경계 바깥의 삶’을 탐구한다. “짐승이 되기로 선택한 자들의 연대”(작가의 말)라는 이 작품은, 유머와 연민, 시적 리듬이 공존하는 서사로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낯선 시대와 낯선 삶에 대한 깊은 관찰을 풀어낸 이 작품은, 삶의 본질을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가볍지 않게 다루는 균형이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우수상 「그라고 다 가불고 낭게」(윤지영)는 여순 사건(여수·순천 10.19 사건)을 소재로,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이 12세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며 그날의 참혹한 진실을 들려주는 희곡이다. 전라도 방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가족과 공동체, 이념과 생존 사이에서 끝내 울음을 삼켰던 세대의 침묵을 그려낸다. 역사적 침묵과 개인의 상처를 응시하는 깊은 정서가 돋보인다. 한 세대의 고통이 세월을 건너 다시 전해지는 방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역사적 치유의 필요성을 호소한다. 삶의 끝자락에서 찾아오는 기억의 파동이 어떻게 자기치유의 과정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풀어낸 이 희곡은, 시대적 고통을 사적으로 끌어안는 서사적 진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희곡집의 세 작품은 모두 말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 시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을 응시하고 있다. 무대 위의 인물들은 삶을 구체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면에 있는 보편성과 비명(悲鳴)을 끌어안는다. 이 세 편의 희곡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언어와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역사와 감정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라는 동일한 질문을 관통한다.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 희곡선은 앞으로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상상력과 실천을 기록하고, 한국연극이 나아갈 수 있는 다채로운 가능성의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는 우리 시대의 고민을 담고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할 독창적인 창작희곡을 발굴합니다.
이번 희곡선은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작품들을 모아 더 많은 독자와 관객에게 소개하고, 한국연극의 다양성을 확장하는 밑거름이 되고자 합니다.
저자

김주희,배해률,윤지영

저자:김주희
극작가.2015년에극작활동을시작했다.대표작<어느날문을열고><식탁><모래바람><마지막미노타우로스><낙원><마르지않는,분명한,묘연한>이있다.2024한국문화예술위원회공연예술창작산실대본공모,2022서울문화재단유망예술지원비넥스트,2018한국문화예술위원회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차세대예술가에선정된바있다.

저자:배해률
극작가.희곡<7번국도><비엔나소시지야채볶음><여기,한때,가가><서울도심의개천에서도작은발톱수달이이따금목격되곤합니다><사월의사원><시차><목련풍선>등을썼다.희곡<사월의사원>으로제11회벽산문화상을,<서울도심의개천에서도작은발톱수달이이따금목격되곤합니다>로제59회동아연극상작품상을수상했으며,2025년제3회이영만연극상작가상을수상했다.

저자:윤지영
극작가.2005년부산일보신춘문예에희곡<장흥댁>이당선되면서데뷔하였다.<上船><90-7번지><인간김수연에관한정밀한보고><우연한살인자><하거도><생존3부작><잃어버린얼굴>등다수의작품을발표했으며,동대문학상,동아대문학상,2인극페스티벌희곡상,목포문학상등다수의작품상을수상하고창작희곡페스티벌당선,창작산실올해의신작등을통해작품을발표했다.

목차

대상역행기(逆行記)-김주희
우수상야견들배해률
우수상그라고다가불고낭게윤지영
심사총평

출판사 서평

저자의말

‘바닥에서가장많은시간을보내온이가,바닥아래의존재들을느낄수있다면.’이희곡은그가능성에서출발하였습니다.급변하는시대,끊임없이훼손되어가는땅에무수한이야기가쌓여있음을느낍니다.우리는지금어느땅위에서있을까요.함께서있던이들의얼굴을떠올릴수있을까요.복원해낼수있을까요.이이야기는뒤편에서있었던이들의바닥과마주하고그들의팔을물려받기위한작은노력입니다.서로의기억과몸이섞이는시간속으로의여행이자,섞이기를요청하며조심스레내민손입니다.
-김주희

1938년5월의세계를살아본적은없지만,올망졸망모여사는여관집식구들과도망길에짐을내던진김시우와총을든최은심과산으로숨어든들개들의마음으로는살아본적이있습니다.이기와적대가달아놓은족쇄때문에멀리나아가지못하는이마음들을널리널리풀어주고싶었습니다.족쇄에금을내는이야기를쓰려고했는데,금이나자박살이나는것은금방이었습니다.
낯선이를위한싸움에동참하려는마음과내손에도피를묻히고야마는의지들로<야견들>을지었습니다.짐승을멸칭으로사용하는이들을무찌르고기꺼이짐승이되기로하는이들의여정이누군가의묵은체기를잠시나마가셔줄수있기를바랍니다.
-배해률

길쭉하고호리호리하던나의할아버지,마을에서가장잘생겼던사내는매일소주한짝을비워야만잠이들곤했다.평생술에잠겨살다,오십을조금넘겨그렇게하늘로가셨다.마루에앉아멀뚱히지는해를바라보다어설프게걷던손녀를향해옅은미소를짓던그분이,어린시절형님을잃었다는것을알게된것은그분이돌아가시고도한참후였다.돌에맞고죽창에찔리는형님을대숲에숨어봤어야했던열두살의소년-소년이오십이되기까지할수있는것이라곤오직버티는것뿐이었을테지.그러다자식을낳고,그자식의어린자식을보며저도모르게옅게웃다그것이미안해다시표정을없앴을테지.한평생무표정했던마음들이읽혀나는늘할아버지가그리웠다.
‘그라고다가불고낭게’는여순사건에관한이야기다.평범하게아침을맞았던사람들이맞아죽고,찢겨죽고,총에맞아죽었다.둑에쌓이고,다리에널브러지고,강줄기를피로물들였다.10월의한주동안만명이넘는사람들이같은방식으로죽었고,살아남은자들은가족이죽었다고목놓아울지못했다.입을닫고,가슴에는지퍼를채웠다.그리고운이좋아버텼다면이제여든여덟이나여든아홉이되어다가오는죽음을마주보고있다.
작년,순천의쪽방에서나흘을보냈다.순천역과순천고,재래시장과다리를걸으며그끝에제대로된‘여순기념관’이있으리라내심기대했다.어느낡은사무실,2층그곳의문이자물쇠로잠겨있어문만한참보다돌아나왔다.울음도하소연도어느것도내뱉지못하고삼키고만있는것이77년전이나매한가지인것같아,집으로돌아오는내내가슴이답답했다.
보지말아야할것과알지말아도될것들이어마어마한스크린에쏟아지고있는이광속의시대에,구석에접힌채쓸쓸히시간이지나기만을버티고있는‘여순의이야기’를,그렇게늘숨죽이며불안한삶을사셨을나의할아버지와할머니들의이야기를이제는해야할때가온것이아닌가,기어코해야만하지않을까,라는열망으로글을쓰고마쳤다.
-윤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