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하게 멀고 넓어서 끝이 없는

아득하게 멀고 넓어서 끝이 없는

$12.00
Description
걷는사람 시인선 129
양기창 시집 『아득하게 멀고 넓어서 끝이 없는』 출간

고통은 가두어도 사라지지 않고,
언어는 그 안에서 더욱 또렷하게 솟아난다

“세상은 초승달 같아서
보이는 만큼이 전부가 아니었는데”
양기창 시인의 시집 『아득하게 멀고 넓어서 끝이 없는』이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된 기간에 집필된 옥중 시편들을 중심으로, 시인이 걸어온 삶과 사유의 궤적을 집약한다. 청년 시절 광주에서 문학을 시작해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었던 그는, 감옥의 좁은 쪽창을 통해 오히려 더 넓은 세계를 향한 시선을 열어젖혔다. “감옥에 갔더니 책이 잘 읽혀라우. 시를 쓰려고 안 해도 저 혼자 막 나와부러요.”(「발문 」)라는 고백처럼, 이번 시집은 구호와 이념을 넘어선 내밀한 언어의 결실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시집은 옥중에서 견딘 일상의 기록, 자화상 연작을 통한 고독한 성찰, 그리고 고향과 자연 풍경 속에서 되살아난 공동체적 감각으로 이어진다. “도저히 측정되지 않는/설날 아침의 n 헤르츠”(「다시 이명」)라는 구절에서처럼, 시인은 신체와 감각을 통해 시대와 사회가 남긴 상흔을 기록한다. “물앵두꽃 터지듯이는 아니겠지만”(「춘분 지나」)은 고통과 희망이 교차하는 순간을 압축하고, 「자화상6」, 「자화상9」에서는 감옥의 고독을 응시하면서 체제 바깥의 삶을 새로이 상상하려는 태도가 드러난다.

무엇보다 이번 시집은 ‘노동’과 ‘영성’을 동시에 품는다. 「나의 살던 고향은」, 「물푸레나무」 같은 작품은 어린 시절 광주의 풍경과 가족의 기억, 자연의 생명성을 통해 ‘대지적 생명’과 ‘공동체적 영혼’을 되살려 낸다. 노동자의 시선으로 시작된 언어가 인간 전체의 감정과 사유로 확장되는 지점이 이 시집의 특징이다. 김형수 시인은 발문에서 “양기창의 언어들은 근대적 사유의 산물인 ‘데생’이 아니라 ‘마음’을 포착한다”라고 평하며, 이번 시집을 “노동자 시인의 우정 어린 저항”으로 정의한다.

『아득하게 멀고 넓어서 끝이 없는』은 시대적 맥락을 선명히 드러내면서도 단순한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감옥과 노동의 풍경은 시인의 손을 거쳐 보편적 인간의 시간으로 변모한다. 독자는 그 속에서 억압과 절망을 뚫고 솟아오르는 언어의 불씨를 만나게 된다. 날카로운 고발 대신 담백한 진술과 절제된 묘사로 시적 힘을 일구어 내며, 오히려 그 담백함이 작품의 진정성을 더욱 깊게 각인시킨다.

양기창의 시는 직접적인 구호를 넘어선다. 감옥과 노동 현장, 고향과 자연을 통해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마음의 언어’를 구축하며, 고통을 재현하기보다 고요하게 견딘다. 때로는 기도처럼, 때로는 고백처럼 다가오는 이 시집은 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언어의 힘을 보여 주는 동시에, 노동과 삶, 인간과 자연을 잇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저자

양기창

저자:양기창
2014년?작가?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금속노조부위원장,민족작가연합공동대표,광주전남작가회의자유실천위원장을역임했다.시집『불사조사랑』은전남문화재단창작기금을수혜하였으며,시집『쏠테면쏘아봐라』는백신애문학상창작기금을수혜했다.민주노총국가보안법사건으로1심에서징역5년을선고받아1년2개월간수형생활을했으나,2025년5월15일항소심에서무죄판결을받고안양교도소에서석방되었다.현재전국현장조직추진위원회의장으로활동하고있으며,한국작가회의회원이다.

목차

1부옥중수고

그곳에가고싶다
나목
한국인의밥상
별이이끄는대로
다시이명
나의살던고향은
노란명찰
목련너마저
봄동김치
번지없는주막
춘분지나
2025청명
감옥가르마
봄비
안양암에서맞는새벽
콩가루채소된장국
감사합니다
오월비
모락산아래에서
항쟁의불씨

2부자화상

자화상1
자화상2
자화상3
자화상4
자화상5
자화상6
자화상7
자화상8
자화상9
자화상10
자화상11
자화상12
자화상13
자화상14
자화상15
자화상16

3부출사

오월,규봉암에오르며
두봉산에서
반야봉
아득하게멀고넓어서끝이없는
아구사리동산
만복대연가1
만복대연가2
대성동에복수초꽃피었다
출사,봄의대화
가덕도연대봉
물푸레나무
사월에깃들다
금산
압해도만월
출사,호랑나비를쫓아가다

발문
생,아득하게멀고넓어서끝이없는
-김형수(시인)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햇빛의각도에따라보였다
안보였다하는쇠창살너머목련나무
가지끝마다환하다
갇힌내손톱과발톱에옮겨박혀반짝이며
무엇을구원하려밝히는가
강철새잎보다찬란한꽃망울
봄이면탐스러운함박꽃으로피어나겠지
그함박꽃여름지나도지지않는그곳
지리산에가고싶다
---「그곳에가고싶다」중에서

약한바람결에도파들거리는
저나무는분명사시나무였겠다
삭풍에우듬지새집의존재드러나고
새끼새들있는지없는지
높은곳에서천상의눈을
낮은곳에서지상의눈물을
다품고있는나무
무슨죄를지었길래
이파리다떨어져가지만앙상히남아
떨었겠으나
잠시만월滿月도궁둥이를얹혀대고가는우듬지에
깃들이는새한마리
---「나목裸木」중에서

낙숫물소리가들린다
서로결이다른,
묘한안어울림으로튕겨진다
피리소리해금소리장구소리징소리북소리
모두품은시나위의봄밤
봄비맞으며무희巫姬는춤을멈추지않는다
요령까지안어울림박자에
묘한봄밤은시나위로젖어가고
추적추적봄비는내리고
묶인몸맺힌가슴에핀
하얀민들레꽃에튕겨진물방울
나는또무얼그리워하나?
---「봄비」중에서

책임질문제는책임지자는원칙의칼만갈다가
사슬에얽매어자기비판하는이밤에
함께단식투쟁했던박관현형과
조직과동지들을떠올리며
거친호흡에서긴호흡으로
어느새
사슬에얽매인나팔꽃이되고있었다
내일을준비하는나팔꽃사슬이되고있었다
---「항쟁의불씨」중에서

자화상을그리려는데손과발은어떻게감춰지겠는데얼굴은어떻게해야하나?
봄을기다려야하나?
아니면상처를보듬어야하나,말아야하나?
보초등환한옥창너머새해첫눈이내린다.
올겨울은유난히도슬픈눈이계속내린다.
눈물을머금은눈,그래서쿠데타의밤을아직도제압하지못해슬픈습설만펑펑내리는가.
엉망이된얼굴은도화지에갇힌다.
갇힌도화지하얀방흰바람벽이되어눈을맞는다.
미완성자화상에눈이내린다.
---「자화상4」중에서

사람을중심으로운동하고있는
세계어느한곳,여기자은도두봉산에서
바라보는바다너머저쪽이나
하늘너머바라보는우주저쪽이나
네가없으면다무슨소용이랴
사소히다투지말아야지
다투다고기잡이나간남편기다리던여인,늦도록멀리바다만바라보던여인,소나무에서떨어져죽어버린여인,
거꾸로선자태로변해버린분계해변여인송이보인다
---「두봉산에서」중에서

지구자기장의반발에방전중인
방전관따위에서나볼수있는
플라스마로사그라지는오로라
그극광에서펼쳐지는
아름다운빛의현혹은잠시저리가라하고
하여서시나브로진정된
우주의질서,윤슬같이
반짝이는
땅끝완도바다와
밤하늘의별
---「아득하게멀고넓어서끝이없는」중에서


시인의말

동경해마지않던지리십경을평소바쁘다는핑계로섭렵하지못했던아쉬움을감옥에서책으로달랬다.출소하자마자지리십경중하나인세석평전의철쭉꽃을보니꿈인가생시인가몰랐다.세석의철쭉꽃은고도가높아5월말에만개하니정말로제때세석평전의철쭉꽃을보고온것이다.지리산은어디를가나역사가기억하는처절한피맺힌장소다.

왕복12km,8시간산행은무리한산행이었다.그러나그때아니면볼수없는세석철쭉이었기때문에다소무리를했다.지구기후위기와한반도평화문제또한마찬가지이다.지금때를놓치면모두다낭패에빠지게된다.이러한것들을시로,문학작품으로형상화해야하는데,그러려면때를놓치지말고더많은정진을해야할것이다.

2025년가을
양기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