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그늘

빛그늘

$12.00
Description
걷는사람 시인선 136
이병국 시집 『빛그늘』 출간

갈라진 틈을 바늘과 실로 조심스레 꿰매며,
빛과 어둠 사이 새로운 세계를 수놓다.

“더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채로
빛그늘 안에 엉켜 있다”
이병국의 세 번째 시집 『빛그늘』이 출간되었다. 전작들을 거치며 단절과 재구성의 문제를 꾸준히 탐구해 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름’과 ‘잇기’라는 두 손동작을 하나의 미학으로 정교하게 가다듬는다. 그가 반복해 손에 쥔 가위는 결코 한순간의 파괴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고 평범한 손질을 통해 엉킨 매듭을 조금씩 풀고, 잘라 낸 자리마다 새로운 실을 대어 또 다른 관계와 시간을 만들어 내는 도구다. 시는 그래서 단호한 절단의 칼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천천히 작동하는 수선의 공예품처럼 읽힌다.
이번 시집에서 중심에 놓이는 감각은 ‘몸’이다. 시인은 생활의 반복과 결핍을 통해 체감되는 부재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그 부재로부터 다른 존재를 감지해 내는 능력을 탐구한다. 굳게 닫힌 자아는 타자를 외면하기 마련이지만, 스스로를 비우고 경계를 흐리게 하는 일은 오히려 타자와의 연결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자르기와 비우기는 자기 파괴가 아니라 연쇄적 재구성의 출발이다. 가난과 상실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삶과 만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출발점으로 그려진다.
시의 결은 단선적이지 않다. 저자는 직선적 분리를 거부하고 빗금과 기울어진 선으로 존재들의 자리들을 엮어 낸다. 서로 다른 기억과 관점 사이를 발끝으로 맞대며 겨우 잇는 순간, 비로소 ‘우리’가 생겨난다. 그러한 연결은 완전한 화해나 동일성을 약속하지 않지만, 차이를 포용하며 숲을 이루는 것처럼 새로운 공동체의 언어를 만든다. 이병국의 시는 바로 그 불완전한 잇기와 느린 수선의 과정에서 삶과 세계를 다시 불러오는 힘을 보여 준다.
후반부로 가면 시선은 개인을 넘어 역사와 공동체의 상처로 확장된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다룬 「1980년으로부터」,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추모하는 「다시 시작하는 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하고 그 숨결을 잇고자 하는 시인의 태도가 드러난다. 이는 잊힘으로 인해 사라지는 이들을 향한 깊은 윤리적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잊지 않기 위해, 말하기 위해, 또다시 쓰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재정비한다. “여지없는 이야기로 뒤엉키고 켜켜이 쌓여/긴 시간을 달려온 이들의 숨결을 잇는다.”(「1980년으로부터」)라는 시인의 고백처럼, 그의 언어는 상처를 봉합하는 대신 그 틈새를 밝히며 다음 세대의 숨결로 이어진다.
『빛그늘』은 잘라 내고 이어 붙이는 일로 세계를 수선하려는 시인의 성실한 작업이다. 빛과 그늘이 겹쳐지는 자리에서 그는 불완전함을 껴안고 새로운 관계와 시간을 꿰매어 낸다. 그 손끝에서 우리는 서로의 세계가 맞닿고 겹쳐지는 순간을 목격한다. 그 빛의 가장자리에서 오래도록, 아직 다 꿰매지 못한 세계가 조용히 숨을 쉰다
저자

이병국

저자:이병국
2013년《동아일보》신춘문예시부문과2017년중앙신인문학상평론부문에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으로『이곳의안녕』『내일은어디쯤인가요』,평론집으로『포기하지않는마음』이있다.

목차

1부나란히걸으며알게되는것들

빛그늘
모노크롬
봄밤
이을
가위
전지
우산
Somewhereshewants
Finehome
지속가능한내일
기울다
악장을거닐고,흔들리고

2부없는마음을헤아리려는듯이

당신이아닌나는누구입니까
에스퍼맨과데일리
강화
집에는집이없다
마흔셋
파시
핀홀
용치
다독이다
막다른길
볕의안부
헤테로토피아
만석

3부너는고작으로살아왔구나

대기의강
가을,인지적부조화
계절의경계
모래사막의겨울
열역학제2법칙
무단횡단
궤도
냉담
누가앉았던소파가비스듬하다
약속된우리
한줌의일상
가위
강화
화수

4부깃들지않는오늘의귀퉁이

까치밥
동백
골목에서
붉은낙엽
1980년으로부터
분명한일기
일요일
함박
스스로의서사
다시시작하는하루
파인다이닝
환상통
아저씨,왜나만보면웃어요?
언젠가끝이나겠지,만

해설
빛의수선공
-김다솔(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시인의말

여전한마음을헤아리며볕의안부를건넨다.
잘자,푸코야.

2025년가을볕언저리에서
이병국


책속에서

엇갈린나뭇가지사이로뭉툭한바닥을뉜다
빛의그늘과
맞닿은어둠이비틀대며

우리를가른다

어제의네가달무리에잠기듯
가을은짙고

나는발끝에맺힌기억을들추지못하고갈라진채로있다
-「빛그늘」부분

멍들지않게걸음을살펴도
그림자를밟지않는날이없습니다

피할수록깊숙이파고드는상처가
사막의한기를불러옵니다

옷을껴입어도아찔한깊이를털어내지못합니다

주저앉아숨을고르다하얗게질린바닥을쓸어보아도
찾는것이무언지찾을수없습니다

어쩌면더많은거짓이필요한것인지도모릅니다
-「Somewhereshewants」부분

종이울리고
뛰어노는어린아이의가쁜얼굴을마주한다

저처럼나는
환호할수있을까

묻고
묻는다

다시종이울리고
우두커니선채
머문자리를본다
슬픔을제밑동에갉죽거리며
무디어가는나를본다

그곳에
내가
살아있다
-「악장을거닐고,흔들리고」부분

일기를꺼내
어려운통증을매만지는일은
이십년쯤뒤의일이라서
숨바꼭질하듯매일을적어놓았다.

영구도,
영구적인것도
없다.

솎아낸말들이안마당에흐드러지게피고
눈을깜박이면아무것도없어
나는
방에갇혀
성급하게자랐다.

창호에구멍을좀더크게냈다.

틈은안으로만새어들었다.
안에서는바깥이잘보이지않았다.
-「에스퍼맨과데일리」부분

낮게산다는건
손을잃는다는거라는데
하늘은빛나고
땅은질펀하고
뱃길은끊겼어요
앞을가늠할수없어
오래머무를수없대요
건너편에서가지런한그림자
피어오르고
바쁠일없이
바삐솟는집들
빈주머니빈몸으로
짊어지고사는
사람들
-「만석」부분


집은언제나멀리있습니다.

접으면
접힐지도모르겠지만

깊고느린바닥을망설이는내가
문을서성입니다.

한평생은아직이라서
닿지않는것이좋겠습니다.
-「강화-절취선」부분

조용히겪어낼따름이라고외친다.흐릿해지는언어가나무를흔든다.그림자가흔들린다.괴사하는나무를손에쥐고시간을견딘다.

쓸모없는일이라고당신은생각할수있다.잠시의곁을나무의다른이름으로생각할수도있다.

나는차이가만든삭흔을다정하게받아들이기로한다.그것을끌어안고나무라고한다.

숲이라고한다.
-「스스로의서사」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