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의 시대

눈빛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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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정형定型의 미학으로 구축한 현대인의 자화상
가면 뒤에 숨은 진실을 찾아 ‘눈빛’의 심연을 향하는 시선

“온전한 얼굴은 이곳에선 금물입니다
지금은 눈빛의 시대 서로를 살피세요”
정병삼 시인의 첫 시조집 『눈빛의 시대』가 걷는사람 시인선 145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시조의 정형미 속에 현대인의 파편화된 일상과 노동의 비애를 차분하게 녹여낸다. 불신과 감시 속에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작금의 현실을 그는 “눈빛의 시대”라 명명하고 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지워져 가는 존재들의 본질을 복원하고자 깊은 사유를 펼친다. 3장 6구의 절제된 시어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실한 소통의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정병삼의 시선이 가장 집요하게 머무는 곳은 마스크와 침묵 뒤로 자신을 은폐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이다. 표제작 「눈빛의 시대」는 “온전한 얼굴은 이곳에선 금물”이라는 선언을 통해 입술이 “총알이 되어 우리를 겨누는” 살벌한 불신의 현장을 직시한다. 시인은 표정을 벗는 것이 낯설어진 시대의 징후를 읽어 내며 유일한 소통이자 생존의 수단으로 남은 ‘눈빛’의 심연을 파고든다. 권성훈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이를 ‘항구적 법칙’이라 명명하며 시인이 “사물의 출현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본성을 언어로 명시”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탐구는 사회적 감시 체계를 다룬 「빅브라더」에서 “붉은 눈동자”가 밤을 훔치고 오직 사실만을 증명하는 가혹한 풍경으로 확장되거나, 「돋보기에게」에서 “상처 입은 종이 위”를 볼록하게 투사하여 진실을 탄생시키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도로 위에서 “죽비”를 맞으며 탑돌이를 하는 “라바콘”(「라바콘 수행」)이나 “먼지 낀 자리마다” 쌓인 오해를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진공청소기」)등 일상의 사물을 수행의 도구로 격상시킨다.
시집의 후반부인 5부 ‘늘어진 그림자가 외벽에 기대어 있다’에 이르러 시인의 시선은 더욱 낮은 곳에 위치한 노동의 현장에 닿는다. 물류 센터에서 “동작이 굼뜨다고” 질책을 받으며 자존심을 삼키는 노동자의 뒷모습(「공」)과 “구조 조정의 삭풍” 속에 “체납 고지서”를 잔설처럼 마주한 가장의 무게(「신세한도」)는 절제된 그릇 안에서 숭고한 미학적 증언이 된다. 특히 「발소리의 크기」에서 “구겨진 구두를 보며 굽은 발만 핥는” 반려견의 시선을 빌려 고용 불안과 소외 속에 몸부림치는 현대인의 비애를 투사하는 대목은 이 시집이 지닌 연민과 통찰의 정점을 보여 준다. 시인은 “손끝에 말을 잡고 검은 밤을 달”(「키보드」)리며 써 내려간 시편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다시금 내일을 향한 다이얼을 누를 수 있는 단단한 위로를 건넨다.
나아가 정병삼의 시조는 수명이 다해 버려진 존재들에 새로운 호칭을 부여하며 생명력을 불어넣는 ‘재탄생’의 미학을 실천한다. 「플라스틱 텃밭」에서 시인은 “이제 부르지 않는 이름을 뜯어”내고 물병이 그릇이 되어 흙을 채우는 과정을 통해 “오늘을 도려내면 내일을 꽃피울까”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이는 「바나나 숙성」에서 얼룩진 껍질 속에서도 “속 맛은 변하지 않아 짙은 향 배어 있”음을 발견하는 통찰과 궤를 같이한다. 시인은 정형화된 시조의 율격 속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현대인의 그림자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견고한 형식을 빌려 무너져 가는 자아를 지탱하고 축조한다. 결국 『눈빛의 시대』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이름이라는 형식으로 호명하여 차가운 불빛 아래 고립된 타자들을 시의 세계로 위탁하고 연결한다.
저자

정병삼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나 202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목차

1부 이파리 끝에 매달린 고개 숙인 소리들
억새
폭포에게
바다를 그리다
별똥별
스무디한 계절
유리 사랑
티 포트
이별 버스
파
마른 호수
취한 나비
얼음 정수기
싱글 탈출 카페
키보드
돋보기에게
눈빛의 시대

2부 접었던 나를 펴다
라바콘 수행
반사경의 범위
탁발
매트리스 반성
진공청소기
매미 물음
달력을 훔쳐보다
딱풀
빈 병
바나나 숙성
자율 검문소
돌꽃
거울에 비친 등
도둑고양이의 미래
폐선의 기울기

3부 비 오는 날 누군가를 기다렸다
깃발
배롱꽃
농다리
오래된 알레르기
이끼
나는 남자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내 다이얼을 누른다
투명한 우산
실제 상황
곶감 속에 영감이 있다
지우개
한쪽으로 기우는 안테나
놓고 가시오
날지 못하는 새
장미 타투

4부 바다를 잡고 있어도 파도는 치지 않았다
피튜니아
스타필드 브런치
빅브라더
딱딱한 책
소리에 물들다
떨어진 새
해일 계단
모형 꽃게
움직이는 집
세계의 맥주를 집다
허공에 집짓기
휘어진 뒤란
철쭉꽃 인턴
워싱턴 야자수

5부 늘어진 그림자가 외벽에 기대어 있다
에어라이트
점핑
마른 수첩
공
신세한도
팽성 강가에서
계단이 가득했다
플라스틱 텃밭
명함
섬초
발소리의 크기
거리로 나온 복권
찢어진 벽보
다리 달린 안경
폴리스 라인
나를 위탁합니다

해설
항구적 법칙과 형식의 무게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