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지옥

소녀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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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소녀의 지옥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유메노 규사쿠 걸작 단편집 『소녀지옥』 국내 정식 출간
1920~30년대 일본 문학에서 가장 기묘하고도 현대적인 작가로 꼽히는 유메노 규사쿠(夢野久作)의 대표작 『소녀지옥』이 국내에 정식 소개된다. 에도가와 란포와 함께 이른바 ‘에로·그로·난센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진 유메노 규사쿠는, 그동안 일부 마니아층 사이에서만 회자되어 온 이름이었다.
『소녀지옥』은 유메노 규사쿠의 단편 세 편을 한 권에 엮은 작품집으로, 제목 그대로 “소녀가 빠져 버리는 지옥”의 여러 얼굴을 보여 준다. 첫 번째 이야기 〈별 것 아니었다〉에는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부풀리고 연출하는 “천재적인 거짓말쟁이” 히메쿠사 유리코가 등장한다. 병원과 경찰, 지식인 남성들을 능수능란하게 속이며 ‘특별한 소녀’가 되려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꾸며낸 것인지 점점 경계가 흐려진다. 그리고 그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과연 그녀가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무엇인지, 독자는 끝까지 의심하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 〈살인 릴레이〉는 신문에 “무서운 색마의 살인 릴레이”로 보도된 남성 운전사의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린 한 여차장의 고백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나만 살아남았다”는 전제로 시작되는 이 편지 속에서, 화자는 사랑과 공포, 연민과 자기혐오 사이를 끝없이 오가며 자신이 그 사건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되짚는다. 그녀가 친구에게 털어놓지 못한 마지막 말, 그리고 편지의 끝에서 선택하려는 결심이 무엇인지가 이 작품의 가장 큰 긴장이다.
마지막 이야기 〈화성의 여자〉는 비정상적으로 큰 키와 압도적인 체력을 지닌 여고생 화자가 중심이다. 운동장에서는 필요할 때만 ‘비밀 병기’처럼 떠받들어지고, 일상에서는 철저히 고립된 채 조롱의 대상이 되는 소녀. 그녀가 유일한 도피처로 삼아 온 폐창고, 그리고 존경받는 기독교인 교장과 얽히게 된 사건이 차츰 드러나면서, 독자는 한 소녀가 어떻게 “화성의 여자”라는 이름을 스스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름을 걸고 어떤 계획을 세워 가는지 따라가게 된다. 신문 기사, 경찰 기록, 편지와 진술이 콜라주처럼 이어지는 이 작품은, 끝까지 읽고 나서도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이처럼 『소녀지옥』의 세 작품은 모두, 거짓말과 폭력, 욕망과 허영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국에는 여성들이 어떻게 이용당하고, 믿어지지 않고,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유메노 규사쿠 특유의 과장된 설정과, 편지·보고서·신문 기사 형식을 섞어 놓은 기묘한 구성은 단순한 공포나 스릴을 넘어, 당시 일본 사회를 지탱하던 남성 중심의 규범과 위선을 비틀어 드러낸다. 독자는 각 편의 소녀들이 남긴 기록과 목소리를 따라가며, “지옥”이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사건 현장인지, 신문 지면인지, 혹은 소녀들의 내면인지-스스로 답을 찾게 된다.
저자

유메노규사쿠

저자:유메노규사쿠
유메노규사쿠는일본후쿠오카출신의소설가로,본명은스기야마타로다.군인,우편국직원,농업운동가,승려수업까지다양한삶을거친뒤비교적늦은나이에본격적인문단활동을시작했지만,불과10여년남짓한기간에강렬한작품들을쏟아내며일본기괴·범죄문학의독보적인존재가되었다.
에도가와란포가정교한플롯과트릭으로‘명탐정물’을개척했다면,유메노규사쿠는정신의균열,망상,언어와매체가만들어내는지옥을전면에내세운작가다.그의문장은때로는과도하게장황하고,감정과잉이며,논리적으로는삐뚤어져있지만,바로그과잉과불균형이독자를묘한최면상태로이끈다.
대표작으로는『도구라마구라』,『소녀지옥』,「기이한이야기의기이한이야기」등이있으며,특히『도구라마구라』는“일본3대기서(奇書)”로손꼽히며지금도컬트적인지지를받고있다.유메노규사쿠의작품은오늘날심리스릴러,호러,메타픽션등에익숙해진독자에게도여전히신선하고,때로는지나치게현대적으로느껴질만큼섬뜩한시대감각을보여준다.

역자:마이너스
해밀누리출판사의안팎에서모인번역팀은,언어라는거대한광산속에숨겨진가장빛나는보석을찾아내는광부라는뜻으로마이너스(Miners)라는이름을지었다.단순히한언어를다른언어로바꾸는데서멈추지않고,글에담긴영혼과맥락,그리고저자의진정한의도를찾아내기위해끊임없이노력한다.숙련된광부가원석의내면을꿰뚫어보듯,마이너스는문장이지닌고유한빛을발견하고,그것을섬세하게다듬어세상에선보이는것을팀의사명으로삼고있다.

목차

별것아니었다7
살인릴레이119
화성의여자149
옮긴이의말242

출판사 서평

“지옥”이라는말은흔히사후세계를가리키지만,유메노규사쿠의『소녀지옥』에서지옥은살아있는소녀들이매일같이서성이는공간에가깝다.학교,가정,신문과소문,연애와우정,도덕과교육-이모든것들이소녀를보호하기보다는,오히려조용히옥죄고밀어내는장치로작동한다.

〈별것아니었다〉에서소녀는“별것아닌거짓말”이켜켜이쌓인끝에스스로를파괴하는길로걸어들어간다.〈살인릴레이〉에서는특정한악인보다,여럿이나눠든가벼운말들이누군가를구석끝으로몰아붙인다.〈화성의여자〉에서는한여학생의시체가“새까만소녀”라는이름의소재로만소비되고,그뒤에숨은진짜목소리는기사와참고,행정문서와‘유서’의틈새에서겨우새어나온다.

이번한국어판은이세가지얼굴의지옥을한권에담아,유메노규사쿠라는작가의스펙트럼을그대로보여주고자했다.연애고백체,유언장,신문기사,참고메모,편지와장광설이뒤섞인문장은단순히기괴함을위해서가아니라,“이야기가어떻게사람을살리고죽이는가”를드러내는장치로기능한다.

이책은독자에게어떤단순한교훈을제시하지않는다.대신읽고난뒤,어쩌면이런질문을남길것이다.
누군가의이야기앞에서,나는얼마나쉽게“별것아니다”라고말해버리지는않았는지.
장난처럼나눈말이,누군가에게는‘살인릴레이’의일부가된적은없었는지.
그리고지금도어딘가에서,“화성의여자”는자신의이야기를쓸수있는종이한장을간절히기다리고있지않은지.

100년전의기묘한단편집『소녀지옥』은,그래서지금이곳을사는우리에게여전히유효한질문을던진다.“당신이믿어온‘정상’이라는세계가,누군가에게는지옥일수도있다는사실을,정말알고있었나요?”

책속에서

저는지난번,마루노우치클럽의경술회에서,단시간영광을얻은사람으로,귀형과마찬가지로규슈제국대학,이비인후과출신후배입니다.작년,쇼와8년6월초순부터,이곳요코하마시미야자키초에,우스키이비인후과간판을내걸고있는자입니다만,돌연이와같은기괴한편지를올리는무례를용서해주십시오.히메쿠사유리코가자살했습니다.(9쪽)

다른일은몰라도,여차장만큼은정말로안돼요.농부로사는것보다훨씬재미없고,훨씬더무섭고,싫은일이에요.여차장의운명이라는건,길거리에흩어진종잇조각보다훨씬값싼것이에요.여차장이되어보면곧알게돼요.간단히말하자면,농부의딸로있으면신랑감은순박한마을청년들중에서부모님이골라주시잖아요.운이좋으면,사랑하는사람과함께할수도있지요.하지만여차장이되면그런행복은처음부터포기해야해요.회사중역이라든가임원이라든가,자동차담당순경님같은이들의말은아무리부당하고불쾌해도얌전히들어야해요.그렇지않으면바로해고돼요.어떻게든구실을붙여서쫓아내버리니까요.(120쪽)

지난3월26일새벽2시경,시내오도리지역6번째구역에위치한현립여고운동장구석의낡은창고에서불이났다.강풍이불고있었기에자칫큰화재로번질뻔했지만,시소방서장을비롯한소방대의신속한대응으로창고한채만전소된채진화되었다.다행히교사건물에는피해가없어교직원들과학생들은안도의한숨을내쉬었다.그러나며칠뒤인같은달26일새벽,불이난자리를정리하던중,성별조차구분할수없을정도로새까맣게탄시신한구가발견되었다.현장은다시한번큰소동에휩싸였다.이후대학부검결과,시신은스무살안팎의여성으로확인되었다.특히허리부분주변에불을집중적으로붙이기위해연료가배치된흔적이발견되었다.이에경찰은사건을성적동기가얽힌방화살인사건으로보고,보도를일시중단한채철저한수사에들어갔다.(1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