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제도와 국가의 역사 서술에서 배제되어 온 기억의 잔여
재일조선인 1세들은 가혹한 삶의 풍파에 맞서는 가운데, 자신들의 발자취를 공식적인 언어로 치환할 방도를 갖지 못했다. 그들이 놓인 곳은 말하고 싶어도 말하기 위한 제도적 언어를 박탈당한 ‘구조적 침묵’의 심연이었다. 그러나 개별적인 죽음을 ‘씨앗을 기탁하기 위해 갈라지는 꼬투리’라 여긴다면, 1세의 낙조는 온전한 종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 삶의 절반이 공동체의 기억으로 스며들어 전이되어 가는, 고요한 재생의 갈림길인 것이다.
2세란 민족교육이라는 자장(磁場)을 교실의 냄새나 목소리의 울림 같은 ‘생활세계의 감촉’으로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신체에 각인한 세대다. 그들은 당사자인 동시에, 그 경험을 객관적인 언어로 번역해낼 수 있는 ‘특이한 화자’라는 천명을 부여받았다. 국가라는 강대한 권력이 다성(多聲)적인 기억을 하나의 ‘정사(正史)’라는 틀에 가두고, 주변부의 목소리를 망각의 저편으로 매장하려는 지금, 2세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침묵을 공공의 역사로 끌어올리는, 지성과 윤리를 건 고요한 반역이 된다.
이에지마 조선학교의 생몰로 보는 민족교육의 역사
전통이란 결코 고정된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침묵을 현재의 빛으로 다시 엮어내는 ‘끊임없는 창조’다. 하리마나다(播磨灘)의 니시지마(西島)에 한때 존재했던 조선학교라는, 사라져가는 사실(史実). 그것을 언어로 정착시키고 서사로 승화시키는 일은, 선대로부터 기탁받은 ‘씨앗’을 차세대라는 토양에 다시 뿌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말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떠나가는 1세의 ‘생’을 구출하여, 그것을 역사의 페이지에 새기는 ‘기억의 수호자’로서의 각오를 붓끝에 담았다. 그 언어는 냉철한 논리를 관통하면서도, 지난날의 침묵을 지시공간 속에서 가만히 껴안는 듯한 온화한 정념으로 떨리고 있다. 지성과 정애(情愛)가 하나로 녹아들 때, 얼어붙은 기억은 해방되고, 미래를 비추는 아침 햇살로 이어지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1세들은 가혹한 삶의 풍파에 맞서는 가운데, 자신들의 발자취를 공식적인 언어로 치환할 방도를 갖지 못했다. 그들이 놓인 곳은 말하고 싶어도 말하기 위한 제도적 언어를 박탈당한 ‘구조적 침묵’의 심연이었다. 그러나 개별적인 죽음을 ‘씨앗을 기탁하기 위해 갈라지는 꼬투리’라 여긴다면, 1세의 낙조는 온전한 종지가 아니다. 그것은 그 삶의 절반이 공동체의 기억으로 스며들어 전이되어 가는, 고요한 재생의 갈림길인 것이다.
2세란 민족교육이라는 자장(磁場)을 교실의 냄새나 목소리의 울림 같은 ‘생활세계의 감촉’으로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신체에 각인한 세대다. 그들은 당사자인 동시에, 그 경험을 객관적인 언어로 번역해낼 수 있는 ‘특이한 화자’라는 천명을 부여받았다. 국가라는 강대한 권력이 다성(多聲)적인 기억을 하나의 ‘정사(正史)’라는 틀에 가두고, 주변부의 목소리를 망각의 저편으로 매장하려는 지금, 2세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침묵을 공공의 역사로 끌어올리는, 지성과 윤리를 건 고요한 반역이 된다.
이에지마 조선학교의 생몰로 보는 민족교육의 역사
전통이란 결코 고정된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침묵을 현재의 빛으로 다시 엮어내는 ‘끊임없는 창조’다. 하리마나다(播磨灘)의 니시지마(西島)에 한때 존재했던 조선학교라는, 사라져가는 사실(史実). 그것을 언어로 정착시키고 서사로 승화시키는 일은, 선대로부터 기탁받은 ‘씨앗’을 차세대라는 토양에 다시 뿌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말할 방도를 찾지 못한 채 떠나가는 1세의 ‘생’을 구출하여, 그것을 역사의 페이지에 새기는 ‘기억의 수호자’로서의 각오를 붓끝에 담았다. 그 언어는 냉철한 논리를 관통하면서도, 지난날의 침묵을 지시공간 속에서 가만히 껴안는 듯한 온화한 정념으로 떨리고 있다. 지성과 정애(情愛)가 하나로 녹아들 때, 얼어붙은 기억은 해방되고, 미래를 비추는 아침 햇살로 이어지는 것이다.
파랑새, 파란 말로 노래 부르네 (하리마나다 조선학교 이야기에 얽힌 김덕룡의 기록)
$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