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에서일제강점기에이르는시기는한국전통농촌사회가내적모순과외적충격을동시에경험한격변기였다.19세기말까지이어진민란과농민항쟁,그리고20세기초일제의식민지지배는사회구조전반의재편을촉진하였다.한편신분제의해체와신교육의확산,근대적제도와지식의유입은이후한국사회의토대를형성하는계기가되었다.이러한변화는정치·경제·사회영역에국한되지않고인간의신체와질병,치료에대한인식과실천에도깊은영향을미쳤다.그러나기존연구에서는이시기의의료변화를주로서구근대의학의도입과확산,근대병원의설립,위생행정의전개라는제도사적틀속에서설명해왔다.그결과전통의료체계는급속히쇠퇴한것으로서술되는경향이강했다.
하지만이러한설명은식민지조선의농촌사회라는구체적현실을충분히반영하지못한다.근대의료기관과제도는농촌지역에광범위하게확산되지못했다.그결과한의학은쇠퇴하기보다는오히려지속·유지되었고,1930년대이후전시체제기에는약재부족과의료공백속에서그의존도가더욱강화되었다.즉,식민지농촌사회의의료현실은‘근대의학의확산’이라는단선적서사로는포착하기어려운복합적양상을보였다.본저서는이러한문제의식에서출발하여,농촌사회에서실제로경험된질병과치료의양상을생활일기라는자료를통해실증적으로밝히고자한다.
본저서가분석대상으로삼은생활일기는조선후기부터20세기중반까지3~4대에걸쳐장기간기록된것으로,농업경영과가족관계,유교의례,향촌공동체운영뿐아니라질병과치료,전염병대응,의료선택에관한기록을풍부하게담고있다.이는국가의제도문서나통계자료가담아내지못한농촌주민의실제의료경험을생생하게전해주는자료이다.특히본연구는유학자들이남긴생활일기에주목한다.이들은전통적학문탐구와가족·향촌운영의주체로서일상을살아가면서도,근대의료와위생개념,반복되는전염병이라는새로운현실과마주한존재들이었다.
연구대상지역은경북선산,전남구례,경남밀양,전북금산,경북예천등일제강점기대표적인농촌지역이다.본저서는약100년에걸친장기연속기록을분석함으로써,국가차원의의료제도정비와는별개로농촌사회에서실제로작동한의료체계와대응방식을지역·시기·가계별로분석한다.이를통해농촌사회에서한의학,민간요법,미신요법,근대의료가병존하며형성한복합적의료문화를역사적으로재구성하고자한다.
본저서의목적은세가지로정리할수있다.첫째,조선후기부터일제강점기에이르기까지한국인의질병과치료경험을의료수혜자의시선에서재구성하고자한다.기존연구가조선총독부,병원,의사등근대의료제도의주체를중심으로서술해왔다면,본저서는질병을경험하고치료를선택했던개인과가족,공동체를분석의중심에둔다.이를통해전통사회에서식민지시기로이어지는의료경험의연속성과변화를생활세계의관점에서파악하고자한다.
둘째,생활일기를활용한미시사적접근을통해조선후기에서일제강점기에이르는시기동안의료행위가개인의일상속에서어떻게이루어졌는지를밝히고자한다.생활일기는질병의발생과인식,치료선택과간병,회복과사망에이르는과정을장기간에걸쳐기록하고있어,의료가특정제도나전문가의영역에국한되지않고가족과향촌공동체의실천속에서형성되었음을보여준다.본저서는이러한기록을통해의료가일상생활과밀접하게결합된사회적실천이었음을구체적으로드러낸다.
셋째,조선후기와일제강점기의학사연구에새로운자료적지평을제시하고자한다.장기간에걸쳐기록된일기는질병의원인과종류,치료방법,약재이용,지역의료환경등에관한구체적이고신뢰할수있는정보를제공한다.
이러한문제의식아래본저서는조선후기부터일제강점기에이르기까지전통의료체계가근대의료의도입속에서도어떻게지속·변형되며공존했는지를지역과가계의생활일기를통해장별로고찰한다.각장은질병경험과치료선택을통해개인·가족·공동체가의료와삶을어떻게연결했는지를구체적으로보여준다.
제1장은경북선산지역무관노상추(盧尙樞,1746~1829)가1763년부터1829년까지약68년간기록한『노상추일기』를분석하여,18세기후반조선후기향촌사회의질병환경과치료체계를살펴본다.이일기는노상추개인뿐아니라4대에걸친가족구성원의질병과사망,치료과정이상세히기록되어있어장기적질병사복원에중요한자료이다.또한가족단위의대응,의서활용,민간요법과제의적치료의병행양상을통해향촌사회의생활세계속의료실천이어떻게조직되었는지를조명하며,질병이단순한개인적사건이아니라가족과공동체의사회적경험으로연결되었음을보여준다.
제2장은전남구례군오미동에거주했던구례문화유씨집안의생활일기『시언』(유제양,1851~1922)과『기어』(유형업,1898~1936)를분석하여,일제강점기농촌지식인의질병경험과의료선택을고찰한다.할아버지와손자가각각기록한두일기는동일가계내에서세대에따른질병인식과치료방식의변화를비교할수있는드문사례이다.세대간기록비교를통해전통의료와근대의료가병존하던실상을드러낸다.특히전염병대응과정과지역특수질병환경을분석함으로써,근대의료수용이세대·상황별로달리나타나는양상을확인하고,농촌지식인의실천적판단과선택을확인한다.그리고전통과근대가혼합된의료문화의특징을강조한다.
제3장은경남밀양의유학자이병곤(李炳鯤)이1906년부터1948년까지약42년간기록한『퇴수재일기』를통해,일제강점기농촌지식인의의료실천과한의학치료의지속성을분석한다.근대의료기관이제한적이던지역현실에서한의학중심치료가유지된과정을살펴본다.또한전시체제기한약재부족상황속에서의서를활용한자가치료,약재확보노력,간병기록을검토하여개인적·가족적의료지식이어떻게형성·운용되었는지를밝힌다.이는한의학이단순한잔존이아니라의도적·능동적선택이었음을강조한다.
제4장은산간농촌지역이었던전북금산군을사례로,근대의료인프라가거의부재한상황에서지역의료체계가어떻게작동했는지를『최병채일기』를통해분석한다.최병채는약47년에걸쳐생활일기를남긴농촌지식인으로,질병치료경험과의료소비행태가비교적상세히기록되어있다.금산군에근대식병원이존재하지않았던현실속에서한의학,침술,매약이지역의료의핵심으로기능했음을밝힌다.일제의위생정책은검병적호구조사,종두,주사접종등통제중심의행정으로나타났으며,실제치료체계로이어지지는못했다.최병채는서울의제약회사약보를지속적으로구독하며매약사용을확대하였고,이는근대의료지식이약품소비형태로농촌에유입된한단면을보여준다.농촌주민들이현실적선택을통해의료공백에대응한전략과약재확보및습득방식까지구체적으로검토하여농촌사회의의료적응력을보여준다.
제5장은경북예천군박면진·박희수가기록한『소택일기』를분석하여,20세기전반예천지역의의료환경변화와농촌유학자의대응방식을살펴본다.병원설립지연에도근대의료요소가점차유입된과정을분석한다.박씨가문이기본적으로한의원과한약국을중심으로치료하면서도,1930~1940년대에들어공의,일본인의원,간호사등근대의료요소를점진적으로수용하는과정을분석한다.특히박희수의아들박영우가약종상시험에합격해약방을개설한사례를통해,전통지식과근대약업이가문내부에서결합되는양상을살펴본다.이는농촌사회에서의료의근대화가단절이아닌혼합의형태로진행되었음을보여준다.
제6장은1918년전세계적으로유행한독감이경북예천군맛질마을에미친영향을『대택방계일기』를통해미시적으로분석한다.이일기는한마을의일상과전염병경험을담고있어,감염병유행의실제양상을구체적으로복원할수있다.1918~1920년사이세차례발생한독감유행과그로인한높은사망률,공동매장,일상생활의붕괴과정을살펴본다.주민들의한의학,민간요법,종교적대응과반복적유행속약재비축,대응방식변화등을분석하여농촌공동체가전염병위기에적응하고경험을축적해가는과정을입체적으로보여준다.
제7장은『대택방계일기』를장기적시계열로분석하여,대한제국기부터일제강점기에반복된전염병과마을공동체의대응을종합적으로고찰한다.국가위생행정과지역공동체대응이병존하던과도기의특성을분석한다.두창,홍역,콜레라,말라리아,유행성감기등다양한사례를통해,농촌사회에서전통적대응이여전히유효했음을확인한다.대한제국기우두접종,제의중단,한의학중심의대응방식과일제강점기위생행정의형식적강화이후에도여전히지속된전통적대응방식을비교한다.국가의위생체계와지역공동체대응이병존하던과도기의특성을분석한다.이를통해농촌사회가전염병에대응하는집단적실천의역동성을드러낸다.
제8장은『대택방계일기』를통해예천맛질마을함양박씨집안의질병경험과치료실천을분석한다.박조수와그의아들박영보가남긴기록을통해,근대전환기농촌사회에서한의학중심의치료가어떻게이루어졌는지,그리고민간요법과근대병원의료가어떠한방식으로병존했는지를살펴본다.일기속박씨가족은복통,설사,감한,담통,종기,지절통,두통,신열,허한등다양한질병에반복적으로직면했으며,이에대한대응은지역의원과약국을이용하는전통의료에기반하고있었다.다양한의료네트워크를활용하여문약하거나화제를받아사용한다.일제강점기에는경제적어려움과약재부족이라는현실적제약속에서민간요법의활용이점차확대되었다.반면근대병원의료의이용은매우제한적이었는데,이는농촌사회에서근대의료제도의접근성이여전히낮았음을보여준다.이장은이러한사례를통해근대화과정속에서도전통의료가농촌주민에게실질적인대안으로기능했으며,가족과가계차원의의료실천과전략적선택이지속되었음을밝히고자한다.
이책을준비하는과정에서많은분들의도움을받았다.한국연구재단의연구지원이없었다면이책을세상에내놓기어려웠을것이다.또한국립금오공과대학교선주인문사회연구소의박인호소장님,김석배소장님,송지혜소장님의격려와지원에깊이감사드린다.늘부족한제자의어설픈삶을따뜻하게지켜봐주시고관심을기울여주신이윤갑선생님께감사드린다.출판환경이쉽지않은상황속에서도여러차례기회를주신윤관백사장님께도진심으로감사드린다.돌아보면,세상을살아오며참으로많은분들의도움과후원을받았음을이제야깨닫게된행복한삶이었다.끝으로같은공동체의성원으로늘곁을지켜준남편과딸에게사랑과고마움을전한다
2026.4.
손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