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1960년, 이승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먼저, 이승만은 우리나라의 헌법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자본주의”로 제정하여,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설립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큰 역할을 하였다. 우리와 정반대의 “인민민주주의, 공산주의” 경제정책을 채택한 북한은 세계적인 빈국이 되었다.
이승만의 자유시장경제 헌법에는 중요한 역사적 신비가 담겨있다. 이승만의 자유에 대한 사상은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빗어졌다. 이들은 미개한 대한민국을 깨우기 위해 조선을 찾아온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을 큰 긍휼로 바라보았고, 배제학당을 세웠다. 여기에 조선 왕조 가문의 몰락한 한 젊은이가 들어왔는데, 그가 이승만이었다. 그가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근대학문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배제학당에서 당시 신세대 학자인 서재필 등과 교분을 나누며 활동을 하다가, 그의 개화된 사상으로 인하여 한성감옥에 가게 되었다. 사형까지 언도받았다가, 그 감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체험을 하며, 목숨까지 건지게 되었다. 그는 5년가량(1899-1904) 감옥에 있으면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거의 양육을 받았다. 선교사들은 이 이승만에게 약 500여권의 책을 공급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에 서양사 뿐 아니라, 일부 서양사상까지 접하게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에 이미 서양사상사에서 발견되어진 ‘자유’의 정신이 나온다.
이 시기에 공산주의가 출현하고 있었는데,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 1917년에 일어났다. 이승만은 이렇게 이제 막 출현한 공산당에 대해 1923년 〈공산당 당부당〉을 저술하여, 공산주의의 부당함을 이론적으로 지적하였다. 미국과 영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있는데, 아무도 공산주의의 본질을 지적하지 못하던 때에 그들보다 앞서서 공산주의의 핵심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그의 박사까지 수학한 학문에서 나왔는데, 그가 수학한 커리큘럼에 의하면, 이 시기에 그는 이미 서양사상사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조지워싱턴대학·하버드대학·프린스턴대학에서 수학하며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는데, 그의 수학한 커리큐럼에 의하면, 그는 서양사상사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역사까지 모두 수학을 하였다.
우리나라가 1945년 일제로부터 독립을 하고, 좌우의 이념대립이 심하였다. 공산주의의 달콤한 이론에 속아 넘어가지 않은 정치인이 많지 않았다. 심지어 이승만의 아우 같은 친구이자, 동료였던 김구마저도,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자신은 이승만의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북한의 김일성을 기다리겠다고 까지 말하였다. 당시 1946년 8월 미군정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좌경화된 정도를 약 77%정도(자본주의지지 14%, 모르겠다가 9%)로 본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헌법을 가진 국가로 탄생 시킨 것이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국가 건설은 헌법만 그렇게 고쳤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 자유의 의미는 소유의 자유이다. 국민 각자가 국가의 생산수단인 토지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토지의 소유자가 일부에 귀속되면, 모두가 그 토지 소유자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토지가 국민에게 배분되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승만은 이것을 보아내었는데, 그의 학문이 이러한 통찰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이미 로크를 비롯하여 칸트와 헤겔을 알고 있었으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근세철학자들은 소유의 자유에서 과학과 창의성과 기술이 나온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같은 주제인데, 이승만은 이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지적-정신적 힘이 그로 하여금 토지개혁에 몰두하게 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건립 후 곧바로 “유상몰수, 유상배분”의 토지개혁에 매진하였으며, 1950년 3월경 그 토지개혁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이것이 자유대한민국의 설립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1950년, 6.25가 일어났을 때,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의 국민들, 특히 농민들이 “땅을 나누어 준다”고 하면, 대거 일어나서 자신들에게 합류할 줄 알았다. 그런데 농민들은 이미 토지개혁으로 인해 땅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내 땅을 또 뺏는다고?”가 된 것이다.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이승만의 토지개혁을 6.25극복의 중요한 요소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이렇게 출발한 것이다. 이 기반에서 박정희의 경제부흥이 가능하였다.
1961-1979년, 박정희, 산업화-유신
박정희라는 인물은 어떻게 출현하였나? 그의 정직함과 강직함과 비상함은 미스터리이다. 그의 나라사랑의 신념은 신앙인에게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나라사랑의 윤리를 도대체 어디서 배웠나? 일제치하 어린 시절의 주일학교인가? 대구 사범학교인가? 세 번의 군인사관학교인가? 그런데 이들 모두가 나라사랑을 가르치는 곳이다. 이렇게 나라사랑으로 무장한 인물이 백성들의 가난을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가난을 돌보지 않는 당시의 정치인들을 본 것이다. 그는 가난과 싸우기 위하여 5.16군사혁명을 하였다고, 독일 방문시 에르하르트 총리에게 말하였다.
1964년 12월, 경제개발 1차5개년계획의 기간중 차관을 위해 독일을 방문하였다. 이때 광산촌 환영식장 연설장에서 흐느끼는 광부들에게, “우리 열심히 합시다.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후손에게 가난은 물려주지 맙시다”고 말하였다. 실내는 온통 흐느낌으로 변하였고, 독일 대통령 뤼브게도 이것을 보았다. 이 기간 중 독일 총리 에르하르트는 독일 라인강의 기적을 알려주었는데, 자동차산업을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훗날 이것은 시월유신의 한 이유이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의 차관을 종잣돈 삼아서, 1,2차 경제개발 기간 동안 경제를 위해, 특히 수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매월 두 차례의 경제관련 회의에 그의 재임기간 중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는 탁월한 경제전문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박정희의 중요한 파트너는 오히려 이병철과 정주영이었다.
박정희의 2차경제개발의 시기에 우리나라 안보에 중요한 위기가 닥쳐왔다. 그것은 세계적으로 미·소 데탕트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공산주의식 경제개발에 실패를 한 김일성이 이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도발을 시작한 것이다. 안보에 위기가 온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동서화합을 위해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하였다. 자주국방을 해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상황에 이른 것이다. 국민경제가 간신히 기근을 면하였고, 수출에 있어서도 경공업의 한계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데, 미군철수라는 안보문제까지 덮친 것이다.
이때 대한민국에 한 위대한 책사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오원철이다. 이 사람이 박정희에게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결합 모델로서의 공업구조개편론을 창안하여 제안하였다. 국방산업의 생산부품을 쪼개어 놓고 보니 모두 중공업과 같더라는 것이다. 그 책략에 의하면, 중공업을 발전시키는데, 동시에 국방산업이 발전한다. 역으로 국방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중공업이 발전한다. 그 표리일체의 양면성을 이용한 공업구조개편론이었다. 이것이 박정희 시월유신의 직접적인 이유가 된 것이다. 중공업과 국방산업이 동시에 달성된다.
박정희는 이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하면서 시월유신을 단행하였다. 중공업과 방위산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 시기에, 포항제철이 나오고, 중화학공업단지가 나오고, 자동차산업이 나오며, 조선소가 나오고, 발전소가 나왔다. 이 시기가 박정희 경제개발 3,4차 5개년계획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30대기업이 모두 출현하였다. 오늘날의 방산도 이 시기에 모두 출현한 것이다. 우리는 시월유신을 산업화 유신으로 불러야 한다.
박정희의 시월유신은 그의 정적 김대중에게 큰 약점을 제공하였다. 마침 국가에서는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전환을 하면서 노동자 항쟁으로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이때 남민전과 같은 공산주의세력이 그 배후로 들어왔다. 이렇게 발생한 것이 1979년 10.26사태이며, 1980년 5.18사태이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한 인물이 전두환 대통령이다.
전두환이라는 영민한 인물이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를 이어주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박정희의 모든 업적은 무산될 수도 있었다. 특히 박정희의 정적 김대중은 당시에 공산주의자 박현채의 사상에 물들어 필리핀식 농업위주의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내놓았다. 박현채는 대기업 중시경제정책을 “매판자본” 곧 “자본주의에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라고 말하며, 선동하였다. 박정희는 여기에 정권을 내줄 수 없었다. 그것도 시월유신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 반대세력을 진압하고, 박정희의 산업화를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계승해준 인물이 전두환 대통령이다. 그는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고, 산업화를 이루는 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98-2003년, 김대중의 은폐된 경제정책
김대중의 사상은 많은 면이 은폐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자유주의 국가였는데, 그가 처음 접한 것은 공산주의였으며,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대단히 정통한 인물로 보인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립하고, 1949년경,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자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전향자 교육을 했는데, 김대중은 보도연맹에 운영위원으로서, 여기서 강의를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는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공산주의 근본이념은 버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그가 1973년 8월에 세운 한민통, 그가 깊이 연루된 1980년 5.18, 1984년도에 이철 의원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을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훗날 대통령 재임시절의 여러 정책들에서도 나타난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사회 민주주의 계열로 분류되는데, 사실은 훨씬 그 이상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 북한 전노동당 비서는, 그를 북한 김정일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