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핍과 자책을 딛고 스스로를 벼려낸 개척자
조지 워싱턴은 엘리트 가문이나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소년 시절 아버지를 여읜 그는 형들에 비해 체계적인 정규 교양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 결과 평생 동안 지적 열등감에 시달렸으나, 언행에 진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결핍에 좌절하는 대신, 17세에 세네카의 스토아철학을 가슴에 새기고 110개 조항의 예절 지침서를 직접 필사하며 자신을 엄격히 단련했다. 타고난 혈기와 거친 감정을 통제하고 무서운 자제력을 갖춰 나간 이 소년기는, 훗날 어떤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워싱턴 특유의 침착함과 카리스마의 밑바탕이 되었다.
젊은 시절, 워싱턴은 미개척지를 누비는 야심 찬 측량사이자 거친 군인이었다. 16세에 버지니아 서부의 험난한 오지를 누비며 현장 감각을 익혔고, 유일한 해외여행이었던 바베이도스 여정에서는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흉터가 남았다. 그럼에도 이 경험은 역설적으로 워싱턴에게 면역을 제공해 훗날 그를 전염병이 창궐하던 독립전쟁에서 살아남게 했다. 22세의 어린 나이에 소위 ‘쥐몽빌 사건’으로 프렌치·인디언 전쟁의 도화선을 당기며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중심에 서게 된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시련 속에서 군 지휘관으로서의 감각과 리더십을 익혀 나갔다.
이 책이 복원해 낸 워싱턴의 가장 인간적 면모 중 하나는 바로 엄격한 명예와 사적 열정 사이에서의 고뇌다. 그는 청년 시절 친구의 아내이자 지적이고 매혹적이었던 샐리 페어팩스를 향해 뜨거운 연정을 품었고 이를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적 욕망에 이끌리는 대신, 이를 성숙한 우정과 자기 통제로 승화시켰으며 훗날 마사 워싱턴과의 결합을 통해 가정이라는 기반을 세웠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마저 공적 명예라는 원칙 아래 통제할 줄 알았던 절제력은 그를 단순한 야심가와 구분 짓는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다.
[2] 불가능을 가능케 한 독립전쟁의 총사령관
1775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했을 때 워싱턴이 직면한 현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정식 군사 훈련조차 받지 못한 오합지졸의 민병대와 터무니없이 부족한 화약 및 물자는 세계 최강 영국군에 맞서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실제로 보스턴 포위전 당시 대륙군의 화약 비축량은 전체 90통에 불과해, 병사 1인당 고작 아홉 발씩만 쏘면 바닥나는 상황이었다. 영국군이 대륙군이 처한 보급의 치명적 한계를 알아차리지 못해 대치 상태가 유지되는 사이, 워싱턴은 과감하게 군의 전열을 정비하는 동시에 타 식민지로부터 화약을 급히 징발하고 프랑스 등지에서 밀수해오는 실무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이로써 초기 대륙군의 궤멸을 막아냈다.
총사령관으로서 워싱턴은 적군뿐만 아니라 내부의 시기와 정치적 음모를 향해서도 싸워야 했다. 대륙회의의 끊임없는 견제와 무관심, 밸리포지의 참혹한 추위 속에서 병사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허레이쇼 게이츠 장군을 비롯한 정적들은 ‘콘웨이 음모’를 꾸며 워싱턴을 축출하려 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변명을 늘어놓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품격 있는 침묵’과 감탄스러운 자제력으로 맞섰다. 그는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는 성품과 확고한 도덕적 권위로, 분열된 군대와 정치인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며 독립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현실로 바꾸었다.
워싱턴은 자신이 치르는 전쟁이 단지 당대의 승패를 넘어 후세에 엄정한 평가를 받게 될 역사적 과업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포탄이 날아드는 전쟁 한복판에서도 자신이 주고받은 모든 서신과 명령서를 철저히 수집하고 정리하도록 했다. 비서진을 동원해 전쟁 중의 기록을 28권의 가죽 양장본 책으로 필사하고 보존하도록 한 그의 남다른 역사의식은, 훗날 독립전쟁의 역사가 승자의 과장이나 정치적 왜곡 없이 객관적 사료에 기반해 기록될 수 있는 든든한 근거가 되었다.
[3] 공화국의 기틀을 세우고 자발적으로 퇴장한 영웅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워싱턴 앞에는 어떠한 선례도 존재하지 않았다. 행정부의 통치부터 대통령의 의전, 의회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가 내딛는 모든 걸음이 곧 미합중국 헌정사의 표준이 되는 무거운 자리였다. 워싱턴은 토머스 제퍼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으로 대표되는 내각 내부의 격렬한 당파 싸움 속에서 균형을 잡으며, 재정 시스템을 확립하고 외교적 중립을 지켜냈고, 신생 공화국이 내분이나 해외 강대국의 외압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기틀을 다졌다.
무엇보다 워싱턴이 인류 역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권력을 자발적으로 내려놓았다는 데 있다. 8년간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직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되라는 주변의 유혹과 군의 추대를 단호히 거부하고 고향 마운트버넌의 농군으로 돌아갔던 그는, 대통령직을 맡고도 2기 임기를 마친 뒤 미련 없이 권력을 이양하고 물러났다. 공화정을 위해 왕관을 거부하고 농기구를 잡았던 로마의 영웅 킨키나투스처럼, 워싱턴은 스스로 권력의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세습 군주’가 아닌 ‘국민의 대리인’이 통치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숭고한 전통을 확립했다.
물론 워싱턴 역시 시대적 한계와 모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버지니아의 대농장주로서 수백 명의 노예를 소유했던 그는, 노예제라는 도덕적 딜레마를 안고 펜실베이니아주의 노예 해방 법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 편법 사이에서 고민한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사후 노예들을 해방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시대의 비극을 넘어서고자 했다. 이렇게 론 처노의 『조지 워싱턴』은 결점 없는 우상이 아닌, 인간적 한계와 시대의 파도를 넘어서며 공화국의 기틀을 벼려낸 위대한 리더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