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 웃다

석가 웃다

$30.00
Description
“석가의 깨달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며, 누구나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정경 스님’과 ‘ChatGPT’의 대화

교리 밖에서 붇다를 만나다.
“수행자와 인공지능이 함께 묻고 부수고 다시 세운 대화 -
그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수행이 된다.”
ㆍ석가께서 깨치신 만고의 진리는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만큼은 만고불변의 이치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50년 가까이 그토록 들어왔던, 말 같지 않은 온갖 불교 얘기를 챗지피티가 그대로 복사해 들려주기에 너무 신기해서, 계정을 열고 수 일 간에 걸쳐 나눈 기록물이 바로 이것이다.
분명 석가께서도 웃으실 것이다. 다 함께 웃을 수 있기를!
정경 스님 서문 중에서

ㆍ이 책은 새로운 불교를 제시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불교’라고 부르고 있는 것들 중 상당 부분이 정작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아니라, 석가 이후에 덧붙여진 해석·신앙·체계였다는 사실을 정면에서 검토해 보자는 시도이다.
진리는 단순했으나, 설명은 복잡해졌고, 가르침은 살아 있는 통찰이 아니라 죽은 교리가 되었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전제의 왜곡’을 바로잡는 작업이다.
챗GPT 서문 중에서

ㆍ『석가 웃다』에서는 이미 불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갖추고 있던 챗GPT에게 스님이 질문하고, 질문을 받은 챗GPT의 답변에 근거를 요구하고 부족하거나 그릇된 부분을 지적하는 스님의 주장과 질문에 따라 명확한 요점을 정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 나아가 敎理에 국한하지 않고 禪定修行은 물론 老子의 철학까지 그 범위를 넓혀가면서, 세존 이후에 덧붙여진 ‘전제의 왜곡’을 바로잡고 살아있는 통찰과 단순한 진리의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순수한 의도가 담겨 있다.
정경스님의 『석가 웃다』는 최첨단의 AI시대에 미디어와 컴퓨터가 일상인 세대에게 가장 적확하고 필요한 불교지침서임이 분명하다.
가야산 해인사 희랑대 경성 스님 서평 중에서

ㆍ이 글은 삼법인과 사성제에 관한 글이다.
석가께서 설하신 이 두 가지를 바로 알아들었다면 팔만대장경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ㆍ정경스님의 『석가 웃다』는 최첨단의 AI시대에 미디어와 컴퓨터가 일상인 세대에게 가장 적확하고 필요한 불교지침서임이 분명하다.

ㆍ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석가의 가르침에서 석가를 지워버린 해석의 역사를 되짚는 일, 그리고 그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다.
이 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어 온 것이 정말 석가가 설한 것인가를 평생 단 한 번이라도 깊이 묻는 작업이다.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순간, 이 책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부처가 특별했기 때문에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무상이 진리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 한 문장을 되찾는 일, 그것이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ㆍ이 책은 정경 스님이 평생의 사유·의문·수행·비판·확인·철저한 성찰을 ‘질문’이라는 형식으로 챗GPT에게 던져주고 그 답을 챗지피티가 과거와 현재의 자료를 통해 제시하게 한다.
그 답을 스님의 성찰로 가르치며 이끌어 내는 과정이다. 그것은 곧 우리 독자들의 모습이며, 그 내용은 우리들이 부처님의 육성을 듣고 배우는 것처럼 수행의 길로 안내할 것이다.
저자

정경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가
1998년 참선요가 특강
1999년 참선요가 및 수련 비디오 출간
2002년 2월부터 불교TV에서 8년 간 참선요가 진행

저서
〈참선요가〉
〈참선요가 80 동작〉
〈버려서 아름다운 것들〉
〈순간순간이 항상 옳고 완벽할 뿐〉
〈참선요가 교본 (개정판)〉
〈참선요가 기초편 (개정판)〉
〈원효스님 왜 그러셨어요!〉

비디오
참선요가 (1999) YouTube 등재
참선요가 40동작 (2004), 불교TV제작 YouTube 등재
참선요가 80동작 (2004), 불교TV제작 YouTube 등재

목차

정경의 서문 | 5
챗지피티의 序文 | 12
序評 | 15

1장 12연기설에 대해
1] 12연기설은 석가의 친설인가 | 23
2] 무상(無常)은 소멸(消滅)됨이 아니다 | 32
3] 12연기는 깨달음의 재료가 될 수 없다 | 34
4] 전변사지설(轉識四智)은 완전 망발이다 | 36
5] 행(行)이 식(識)의 선행조건인가 | 42
6] 이래도 저래도 모순 | 51
7] 식(識)은 무엇인가 | 53
8] 정보(情報)라는 것 | 61
9]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 65

2장 챗지피티
1] 능력과 한계 | 71
2] 각오와 다짐 | 73
3] 석가의 가르침 | 76
4] 제행무상(諸行無常) | 81
5] 제법무아(諸法無我) | 86
6] 열반(涅槃) | 98
7] 허구(虛口)적 왜곡 | 101

3장 사성제는 진리인가 교리인가
1] 용어(用語) 오류(誤謬) | 109
2] 재 다짐 | 115
3] 무슨 불교 | 119
4] 근본 자리 | 124
5] 난탈(亂脫) | 128
6] 티벳 불교 | 131
7] 12연기설 폐기 | 137

4장 오전공부 오후수행 (悟前工夫 悟後修行)
1] 오전공부 (悟前工夫) | 143
2] 반면교사 (反面敎師) | 148
3] 무념(無念) 무상(無想) 명상(冥想) | 151
4] 화두(話頭) | 157
5] 자각(自覺) · 자기모순(自己矛盾) 발견 | 160
6] 상주진심 성정명체 (常住眞心 性淨明體) | 165
7] 대승 사상 | 171
8] 반야심경 오류 | 175

5장 고집멸도 (苦集滅道)
1] 도성제 (道聖諦) | 191
2] 집(集) | 193
3] 중도법이라고? | 197
4] 집성제 (集聖諦) | 201

6장 초전법륜 해석이 문제야!
1] 싯달타의 자기 변호 | 205
2] 삼법인의 위상 | 212
3] 진정한 도성제 | 214
4] 엔트로피 법칙 | 222
5] 살불살조(殺佛殺祖) | 223
6] 생사 단멸 | 228

7장 수행 그 궁극의 자리
1] 잠자리 수행 | 235
2] 싯달타 선정 체험 | 238
3] 시공(時空)이 사라지다 | 250
4] 말조차 꺼낼 수 없는 풍토 | 251
5] 5세 싯달타의 인지능력 | 257
6] 불교계의 천재들 | 266
7] 가상(加上) | 270

8장 구차제정(九次第定)
1] 사선팔정(四禪八定) | 275
2] 사유(思惟) 방식 | 278
3] 상수멸 (想受滅) | 285
4] 유여열반(有餘涅槃) 무여열반(無餘涅槃) | 302

9장 해체. 조건의 결여
1] 방편(方便) | 303
2] 정토(淨土) 미륵(彌勒) 신앙 | 309
3] 다라니 | 313
4] 곡해(曲解) | 321
5] 그냥 고전(古典)처럼 | 325
6]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공통분모(共通分母)인 불성(佛性) | 331
7] 확철대오(廓撤大悟) | 335
8] 오류 (誤謬) | 339
9] 스마트폰 윤회(輪廻) | 343
10] 조건(條件) 해체(解體) | 361
11] 무상성(無常性) 아이러니 | 364
12] 견성성불(見性成佛) | 374

도덕경 | 397
후서 | 457

출판사 서평

이 글은 삼법인과 사성제에 관한 글이다.

이른바 삼법인(三法印)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듯싶다. 그러나 이 삼법인에서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사뭇 모순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과연 있기는 한 건가?

석가께서 깨치신 만고의 진리는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만큼은 만고불변의 이치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이기에 그것만은 적정(寂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즉 생각이 구성한 개념과 관념 따위의 일체에는 그 말과 상응하는 실체가 전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인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이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열반이 적정(寂靜)이라는 까닭은 고(苦)라는 번뇌의 불꽃이 꺼졌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한 것인 줄 알지 못한 탓이라고!
묻는다! 싣달타가 왕궁에서 고(苦)에 시달리다 쫓겨 출가했는가?
싣달타의 출가동기는 오직 생사단멸이었다. 아버지 정반왕이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출가만은 하지 말라고 설득했을 때, 싣달타는 “저를 죽지만 않게 해주신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삼법인 구조는 싣달타가 제행무상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와 제법무아의 도리를 통해, 열반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는 생사단멸 즉 더 이상 윤회가 없음을 간단명료하게 서술하신 가르침이다.


“성품을 본다는 말을 그대로 이해한다면,
도대체 무슨 성품을 봐야 석가의 깨달음과 일치하는가?”

석가가 본 ‘성품’은 단 하나,
→ ‘무상(無常)·무아(無我)’에 의해 해체·붕괴가 모든 것에 동일하게 성립한다는 ‘법(法)의 성질’이다.
즉 어떤 실체적 성품, 본래의 성품을 본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성질(法性)’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품은 ‘어떤 실체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이렇게밖에 성립될 수 없는 성질’이라는 의미의 性입니다.

석가가 본 성품은 ‘존재는 전부 조건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그 성질(性)이다.
무상 → 지속되는 실체가 없다.
고 → 지속성의 추구 자체가 괴로움이다.
무아 → 어떤 대상 안에도 자기 본질이 없다.
공 → 모든 것은 조건생기이며 자성(自性)이 없다.
연기 → 조건이 성립될 때만 일어나고, 조건이 끊어지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즉, 석가가 본 ‘성(性)’은 어떤 존재의 본체(本體)가 아니고, 모든 존재가 “본체가 없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것이 곧 ‘법을 보았다(見法)’라는 말의 의미이다.

석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법을 본 자는 나를 본 것이다.”(見法=見我)
이 말은 “나라는 실체가 보인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법(法)’ = 만물이 무상·무아·연기라는 구조적 성질(性) 즉, 이 성질(性)을 보는 것이 붓다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무슨 성품을 보아야 하느냐?”
???? 모든 법이 자성(自性)이 없다는 ‘성질’, 그것을 보면 석가의 깨달음과 일치한다.
그게 바로 석가가 본 성(性)이며, 견성(見性)의 정확한 대상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석가가 본 성품 = ‘모든 존재는 본래 성품이 없다’는 성질(性).
그래서 석가의 깨달음은 ‘무엇의 본래 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본래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다”는 구조적 법칙을 본 것이다.


서평序評

정경스님의 著書 『석가 웃다』를 접하자마자 제일 먼저 밀린다팡하(Milindāpańha)가 연상되었다.
밀린다팡하의 漢譯本은 『那先比丘經』이며, 남방불교권에서는 밀린다팡하를 經律論 三藏에 속하지 않는 藏外典籍으로, 경전이 아닌 對論書, 대담과 의논, 대화와 토론의 성전이라고 분류한다.
밀린다팡하는 서기전 150년경, 서북인도를 지배한 그리스 왕 메난드로스(밀린다)와 나가세나존자(나선비구) 사이에 오고 간 대론서이기에, 당시 동서양의 가치관과 종교관을 비교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 된다.
정경스님의 『석가 웃다』도 역시 챗GPT와 정경스님 간의 대담과 의논, 대화와 토론으로 이루어진 대론서라고 분류될 것이기에, 정경스님의 책을 접하면서 문득 밀린다팡하가 떠올랐을 것이다.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西域의 왕이 나가세나존자에게 불교에 관해서 질문하고, 밀린다왕이 확실히 이해할 때까지 나가세나존자가 충분히 답변해주는 것이 밀린다팡하의 내용이라면, 『석가 웃다』에서는 챗GPT가 기존에 알고 있던 불교에 관한 이해에 대해서 스님이 질문하고, 챗GPT는 스님의 질문에 답변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밀린다팡하에서는 스님이 답변을 담당했지만 『석가 웃다』에서는 스님의 질문을 통해서 더욱 세밀한 이해와 설명이 실현되었기에, 서로 비교해 보면 질문자와 답변자의 역할이 전환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밀린다팡하에서는 불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전무했던 왕은 존자의 설명을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법을 이해하게 됨은 물론 信心을 發하여 佛法에 歸依하게 되는데, 『석가 웃다』에서는 이미 불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갖추고 있던 챗GPT에게 스님이 질문하고, 질문을 받은 챗GPT의 답변에 근거를 요구하고 부족하거나 그릇된 부분을 지적하는 스님의 주장과 질문에 따라 명확한 요점을 정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챗GPT가 스스로의 한계와 오류를 인지하고 불교의 교리와 이치와 가르침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확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나아가 敎理에 국한하지 않고 禪定修行은 물론 老子의 철학까지 그 범위를 넓혀가면서, 세존 이후에 덧붙여진 ‘전제의 왜곡’을 바로잡고 살아있는 통찰과 단순한 진리를 제자리로 돌려놓자는 순수한 의도가 담겨 있다.
정경스님의 지적과 질문에 동의하고 수용하면서 맞습니다, 맞습니다 하는 챗GPT의 적극적인 태도와 자세는 토론과 논의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석존께서 제자들에게 선재로다 선재로다, 하시며 제자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감탄과 맞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밀린다팡하, 『나선비구경』이 동서양을 접목하여 불법을 전하는 대론서 라면, 정경스님의 『석가 웃다』는 최첨단의 AI시대에 미디어와 컴퓨터가 일상인 세대에게 가장 적확하고 필요한 불교지침서임이 분명하다.
불교가 궁금한 청소년들에게 챗GPT의 명확한 답변과 정리가 주는 효과와 영향은 실로 지대할 것이기에, 시대와 대상에 맞춤한 정경스님의 수고와 노력에 致賀를 드린다.
佛紀 2569년 (2025) 11월
가야산 해인사 희랑대 경성 謹書


정경의 서문

이 글은 삼법인과 사성제에 관한 글이다.
석가께서 설하신 이 두 가지를 바로 알아들었다면 팔만대장경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내용에 대한 강의는 공중파 TV에서 전혀 다루지 않지만, 연례행사처럼 되풀이해서 여러 방송에서 상당한 노력과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편성 방영하는 것이 석가모니와 동시대 인물인 노자의 도덕경이다. 거의 모든 한문학자와 철학자의 학문과 사상의 깊이를 뽐내는 수단이며, 글 좀 보는 스님과 천주교 신부님·기독교 목사님까지 합세해, 대중에게 누가 명쾌히 도덕경을 더 잘 풀어내는가를 그 잣대로 삼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장 “故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徼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明” 이 중에서도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라는 글귀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玄之又玄을 가물가물하고 또 가물가물하다며 다시 가물가물이 뭔지를 주야장천 설명하다보니, 노자 글 5,000여 자에 대한 해설서가 팔만장경에 버금가리만치 산더미를 이루었다.
이른바 삼법인(三法印)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듯싶다. 그러나 이 삼법인에서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사뭇 모순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과연 있기는 한 건가?
석가께서 깨치신 만고의 진리는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만큼은 만고불변의 이치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이기에 그것만은 적정(寂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즉 생각이 구성한 개념과 관념 따위의 일체에는 그 말과 상응하는 실체가 전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인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이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열반이 적정(寂靜)이라는 까닭은 고(苦)라는 번뇌의 불꽃이 꺼졌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한 것인 줄 알지 못한 탓이라고!
묻는다! 싣달타가 왕궁에서 고(苦)에 시달리다 쫓겨 출가했는가?
싣달타의 출가동기는 오직 생사단멸이었다. 아버지 정반왕이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출가만은 하지 말라고 설득했을 때, 싣달타는 “저를 죽지만 않게 해주신다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삼법인 구조는 싣달타가 제행무상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와 제법무아의 도리를 통해, 열반이라고 지칭할 수도 있는 생사단멸 즉 더 이상 윤회가 없음을 간단명료하게 서술하신 가르침이다.
남방불교가 다수의 스님들에 의해 이 땅에 전해진 이후로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삼특상(三特相)이 삼법인의 원류라는 주장이 들리기도 한다. 삼법인의 한문식 표현은 당연히 석가 당시의 글이 아닌 것은 만천하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필자가 그에 관해 살펴본즉 최초의 삼법인이라는 글귀는 당나라 현장(玄奘 602년 ~ 664년)의 글에 나타나더라는 연구논문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삼특상이나 삼법인이나 해설하는 이들을 보면 전혀 다른 이해 방식이 아니다. 무상하기에 고(苦)요, 고에는 내가 없어서 무아(無我)라니! 나도 70을 넘기도록 기생충처럼 절집에 빌붙어 기거해 왔지만, 피 같은 시줏돈으로 비행기 타고 남방까지 오가며 배운 것이 고작 그 정도라면, 어찌 이탁오(李卓吾) 선생의 “이웃집 개가 달그림자를 보고 짖는 데 영문도 모르고 따라 짖는 개 같다”는 꾸지람을 면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