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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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한땀 한땀 두려운 마음으로,
환상(illusion)으로 얼룩지고 얼버무려진 歷史를
본디 제 자리,
사실의 자리에 갖다놓으려는
고독하고도 위험한
이영훈 교수의 역사전쟁…
‘환상의 나라’ 시리즈(총 12권)가 시작된다.

제1권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출간


▶ 「환상의 나라」시리즈를 시작하면서
“환상의 나라,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아주 좋다, 멋지다, fantastic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 아니다. 허상이다, 착각이다, illusory하다, 그런 뜻의 환상이다.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데, 따져보니 근거가 없다,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거짓말로 판명된다, 그런 것이 내가 말하는 환상이다.
환상은 인간들을 큰 신뢰와 협동으로 이끌 수 없다. 환상이 빚은 역사와 현실의 간격은 정신과 육체의 분열을 야기한다. 환상은 그 자체로 반과학이다. 환상은 직시되어야 하며, 적절한 대안과 더불어 극복되어야 한다. 신생 대한민국의 지식인이 감당할 시대적 과제였다. 지난 70년의 건국사를 돌아볼 때 대학을 비롯한 지식사회가 그에 제대로 부응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식사회는 환상을 조장하는 역할에 골몰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이 나라는 갖가지 환상의 굴레에 심하게 옥죄인 가운데 숨쉬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안으로는 한 국민이라 하기 힘들 정도로 이념의 대립이 심한 가운데 밖으로는 우방과 공연한 마찰을 일삼고 있다.
2016년 5월부터 3개월간 어느 인터넷 매체에서 ‘환상의 나라’라는 제목의 강의를 한 것은 그 같은 위기감에서였다. 모두 12개 주제였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컸던 순서로 몇 개를 나열하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나라는 누가 팔았는가’ ‘우리 민족, 그 불길함’ ‘위안소의 여인들’ ‘환상의 통일론’ 등이다. 지금의 이 책은 제1강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의 강의노트를 학술서로 평가받을 수 있는 분량과 형식으로 확장한 것이다. 나머지 강의에 대해서도 하나씩 같은 식으로 단행본을 출간할 계획이다.”

저자

이영훈

목차

머리말-004

1.한국사제1의위인-015

2.세종과노비제
15~17세기인구의30~40%는노비·024
양반의노비규모·026
입역立役과납공納貢·028
노비는주인의재물·033
노비는함부로죽여도죄가되지않았다·036
노비증식의경로는양천교혼良賤交婚·039
노비제는기자箕子의법·042
고려와조선의사회구성·045
고려노비의처지는그리
열악하지않았다·046
태종의노비제봉쇄정책·050
세종,노비의권리를박탈하다·053
주자의아름다운말씀·057
병길丙吉은시신에대해묻지않았다·061
세종,양천금혼의빗장을풀다·062
충노忠奴미담·065
추노推奴활극·069
성군이라면영조·073
죽은종을위로하다·076
『흥부전』의세상·079

3.세종과기생제

김치종·084
낙동강푸른물에·087
슬픈향복香卜·089
직비直婢·093
풍류비風流婢·096
기생의기원·097
고려기생의신분·101
비천卑賤관념의심화·104
세종,기생의딸을기생으로삼다·107
기녀를두어사졸士卒을접대하라·110
위안의실태·114
대를이어위안하다·117
천산賤産과천고賤姑·119
기생머리올리기·121
음녀淫女속공屬公·124
19세기의기생제·127
춘향의꿈·132

4.세종과사대주의

대몽골울루스·140
이씨왕가의내력·142
최초의세계지도·145
기자箕子의나라·147
세종,하늘에대한제사를폐하다·151
지성사대至誠事大·156
사라진부월斧鉞·160
역월제易月制의폐지·163
도덕국가로의순화·169
백성에게바른한자음을
가르치다·171
학계라해도집단연고의무리·175
최만리崔萬理의반대·178
소중화의주체성·180

5.대한민국은자유인의공화국이다.

요약·184
몇가지추가·187
현대한국사학의문제점·190
자유에대한상념·194
그대는자유인인가·199
현대판『소학小學』·201
문명사의대전환·203
환상의성립·208



출판사 서평


▶저자소개
서울대학교사회과학대학경제학과를졸업하고같은학교대학원에서경제학박사학위를받았다(1985).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한학을공부하였다(1977~1982).한신대학경제학과교수,성균관대학교경제학부교수를거쳐2002년이후서울대학교경제학부교수로재직하다가2017년에정년을하였다.경제사학회,한국고문서학회,한국제도경제학회회장을역임하였다.현재는이승만학당의교장을맡고있다.
주요저서로는『조선후기사회경제사朝鮮後期社會經濟史』(한길사,1988),『수량경제사로다시본조선후기』(공저,서울대학교출판부,2004),『대한민국역사』(기파랑,2013),『한국경제사』Ⅰ·Ⅱ(일조각,2016)가있다.
“나는한국의근대문명은일제가이땅을지배한기간에제도화되었다고생각한다.그이유로사람들은나를친일파또는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손가락질하였다.대학을찾아와나를파면하라고데모한사람들,연구실에들어와나를훈계한대학원생,연구실문에계란을던지고도망친학부생,나를공격한여러차례의대자보,이루말할수없는수모를겪었다.그모든매도에도불구하는나는내가딛고있는실증의토대가허물어지는아픔을느낀적이없다.나는한국근대문명의역사적경로를달리설명함에성공한어느연구자도알지못한다.”



▶세종과노비제
17세기중엽조선왕조의인구는대략1,200만을헤아렸다.그중의30~40%,그러니까360~480만의인구가노비신분이었다.노비가그렇게나많았던가,들어본적이없다고한다.그렇지만어김없는사실이다.1606년에만들어진경상도산음현과단성현의호적이전하고있다.현재전하는것가운데가장오랜호적이다.산음현호적에서는인구의42%가노비신분이다.단성현호적에서는64%이다.1609년에만들어진울산부호적이있다.거기서노비의인구비중은47%이다.이상이17세기초라면,17세기말에는1690년에만들어진대구부호적이있다.거기서는인구의43%가노비이다.이처럼17세기경상도의경우,호적에등록된인구의42~64%가노비였다.
경상도외의호적으로서는1663년에만들어진한성부호적을들수있다.오늘날의서울아현동,가좌동,합정동일대의호적이다.호적에등록된인구는총2,374명인데,그가운데1,729명,곧73%가노비이다.
당시한성부의인구는대략20만이었다.그중의절반은4대문안의성내에서,나머지절반은4대문밖의성저城底에서살았다.위호적은17세기중엽성저인구의근4분의3이노비였음을보여주고있다.성내도마찬가지였을것이다.잘알다시피한성부,곧서울은왕실을비롯하여귀족적양반가문이모여사는곳이다.
17세기서울은한마디로노비들이바글바글하는도시였다.15,16세기로올라가면전하는호적이없기때문에노비의인구비중을정확히알기힘들다.그렇지만여러가지정황으로보아17세기보다많았음은거의확실하다.『왕조실록』에나오는여러정보를종합적으로검토해보면15세기말총인구900만가운데적어도40%는노비였다.
15~16세기서울에거주한양반관료는아무리미관말직이라도100명의노비는소유하였다.관직이높아지면그수가더욱많아져수백명쯤은보통이었다.현재전하는분재기分財記가운데노비를가장많이소유한사람은정3품관직의홍문관부제학을역임한이맹현李孟賢이란사람인데,총758명에달하였다.그보다품계가높은판서나정승급의고관대작이면1천명을넘기기어렵지않았다.왕족으로올라가면아마도수천명이었을것이다.알려진최대규모는세종의제5왕자인광평대군廣平大君과제8왕자인영응대군永膺大君이다.『왕조실록』은이두왕자의노비가각각1만명을넘었다고이야기하고있다.
고려왕조의멸망과조선왕조의성립은공동체사회에서신분제사회로의이행을의미하였다.조선왕조를연정치세력은고려왕조의전통을이어처음에는노비인구의확산을억제하는정책을취하였다.1401년태종은노비와양인과의결혼을전면금지하는영을내렸다.노비는노奴와비婢의결혼만으로단순재생될뿐이라는노비제봉쇄정책을폈다.
1418년8월세종의시대가열렸다.1420년9월예조판서허조許稠는노비가주인을고소할경우이를수리하지말고참형에처해야한다고주장하였다.허조는중국당의태종이노가주인을고소할경우설령그내용이반역에관한것이라도이를수리하지않고노를참해버린고사를그근거로제시하였다.이같은허조의주장에세종은동의하였다.
조선의양반관료들은노비의주인고소가인륜의명분에서정당할수도있음에대해주의를기울이지않았다.『왕조실록』을보면노비의고소를일체교형으로다스리자는신하들의주장에세종은역시순순히동의하였다.
조선노비제의확립에있어서1422년의노비고소금지법奴婢告訴禁止法제정만큼중요한것은없다.노예의진정한요건은법능력의상실에있다.이를가리켜올란도패터슨은‘사회적죽음SocialDeath’이라하였다.노예는살아있지만실은죽은자와마찬가지이다.타인의불법행위에대해맞설권리가없고자신을보호해줄공동체를상실한상태가노예의본질이다.
조선왕조에들어노비인구가크게팽창하게된데에는세종의역할이컸다.세종은노비가주인을고소할수있는법적권리를박탈하였다.이후노비는주인의완전한사유재산으로변하였다.노비를함부로죽여도큰죄가되지않는시대가되었다.그에따라노비가격이고려시대에비해5배나뛰었다.태종은노비와양인의결혼을금지하는한편,비가양인남자와결혼하여낳은자식을양인신분으로삼았다.세종은노비와양인의결혼을방임했으며,노비와양인남자의소생을노비신분으로돌렸다.세종은노비를정상의인류로간주하지않았다.세종은자주남편을바꾼다는편견에서비의정조를인정하지않았다.세종이비의소생을모두노비로잡은것에는이같은노비관이작용하였다.이후노비인구가부쩍증가하는가운데한국사에서노비제의전성기가열렸다.

▶세종과기생제
1419년세종1년에평안감사가기생제와관련하여두가지를건의하였다.하나는기생으로인해관리들의풍기가문란하니관리의기생간음을금하자는것이다.그는한기생을여러관리가돌아가며간하는것은도덕적으로있을수없는일이라고주장하였다.평안감사의건의는여러신하의반대에도불구하고세종에의해채택되었다.
다른하나의건의는기생이모자라니확충하자는것이다.그에대해세종이어떠한결정을내렸는지는분명치않지만,이후역사는그같은방향으로흘렀다.우선각종비로부터기생을보충하거나그렇게하자고했으니기생은사실상비와동일한신분으로간주되었다.이후『경국대전』은교방의기생은정원이230명이며각군현의관비를3년간뽑아올려충당한다고규정하였다.
흔히들기생을춤추고노래하고성접대를하는직업인으로알지만그렇지않다.조선의기생은그러한역을국가로부터강요받은관비에다름아니었다.또한원기생의딸을기생으로삼자고했으니기생은그신분을세습하는것으로간주되었다.실제세종10년이면고급관료의기첩이라도그자녀가천역을면치못하는현상이벌어지고있었다.이윽고1431년1월이면조선기생제의성립과관련하여가장중요한조치가내려졌다.세종은각고을의창기가낳은자식은공사公私의비가남편을자주갈아치우는예에준하여천인으로삼자는형조의건의를수락하였다.여기서기생의딸을기생으로,기생의아들을관노로삼는신분세습의율이공식적으로결정되었다.뒤이어1431년11월세종은관비가양인남자와낳은자식도부계를인정할수없으므로기생의예에준하여모두천인으로돌리자는건의에찬성하였다.
1432년3월조선노비제의기틀을놓은종모법從母法의성립은1년2개월전기생을대상으로한종모법의성립을그출발로하였다.따지고보면조선기생제야말로조선노비제의중핵을이루었다.
조선시대에걸쳐중앙정부와지방관아에는춤추고노래하고성적위안을제공하는기생신분의여인들이있었다.기생의신분은딸에게세습되었다.특정여인에게성접대의역을강요하고세습시킨다른나라의예가있는지알수없는일이다.그만큼기생제는세계사에서한국사가지닌개성적특질을상징하고있다.그기생제를사실상창출한군왕이다름아닌세종이었다.기생의딸은기생이라는법은세종에의해만들어졌다.이후기생은관비의신분으로떨어졌다.이전고려시대만해도기생은관비가아니었다.나아가세종은국경지대의고을에군사를접대할기생을설치하였다.이후전국의각군현에수십명씩의기생이배치되었다.세종이창출한기생제는20세기군위안부제도의역사적원류를이루었다.

▶세종과사대주의
조선왕조가들어서면서천제天祭는천자의고유한예로서제후는이를행할수없다는주장이신하들로부터제기되었다.태조와태종은그에구애되지않고천제를거행하였다.1419년세종1년에가뭄이심하였다.변계량이원구단에서천제를거행할것을청하였다.세종은“참람한예는행함이불가하다.”고답하였다.천제를지낼수없다는것이다.그러자계량이수천년동안행해온예를폐함은부당하며,더구나조선은강토가수천리로써중국내의백리제후와비할수없다는논리를내세웠다.그에대해세종은“어찌강토가수천리라하여천자의예를분수없이행하리오.”하면서다시거절하였다.이에변계량은심한가뭄을맞아제후가하늘에제사를드림이무슨잘못인가라는예의임시변통론을내세웠다.이에세종은그주장을받아들여천제를거행하였다.막등극한22세의청년세종은나이50세의중신변계량을이길수없었다.
세종은참을성있게그의시대를기다렸다.그렇게성격이온유하고,중신을예우하고,서둘지않음이세종의훌륭한인품이다.그가치세당대에신하들로부터성군으로칭송을받은것은다그만한이유가있어서였다.천제는제후가행할수없는참람한예라는세종의소신은오랜기다림끝에드디어실행을보았다.다음해1439년에큰가뭄이들었다.친히원구단에나가천제를거행하라는상소가있었지만세종은거절하였다.전통적으로동아시아왕조국가에있어서천제는종묘와함께왕조의정통성을상징하는최고수준의의례였다.천제는하늘과의관계에서,종묘는조상신과의관계에서국왕의절대적권위를대변하였다.1443년천제가최종폐지됨으로써조선왕조의국가체제는제후국의그것으로충실히정비되었다.
만국공법이전의전근대세계에서작고약한나라가크고강한나라에굴종하는것은종묘와사직을보전하고백성을평안케하는고육지책이다.사대는하는자나받는자나모두에게정략적관계이다.하는자는속마음을숨기고받는자는상대를의심한다.조선태종조까지의사대가그러하였다.양국간에는군사적긴장이잠재하였다.오고가는사신은상대국의정치를염탐하였다.세종조에들어오면분위기가바뀐다.『세종실록』을읽으면그점을확실히느낀다.한마디로세종은지성으로사대하였다.
고려왕조는군사국가였다.그점에서도덕국가인조선왕조와달랐다.고려는3만여명의중앙군을보유하였다.이들은국가로부터토지를지급받고그로부터세를걷어살았다.직접농사를짓지않으니직업군인으로서전투력이강하였다.군사국가로서고려는전쟁에장수를파견하는출정의出征儀라는군례를행하였다.출정이결정되면우선사직단에제사를지내고종묘에이를고한다.이어서대궐의뜰에서출정군의원수에게왕이부월斧?을내리는의식을거행한다.이같은출정의는천자의예에속한다.부월은천자의권위를상징하였다.부월을받은장수는대궐문을나서는그순간부터출정에관한모든일을처리할권한을갖는다.군령을어긴휘하장수와사졸을재량으로처결할수있음은물론이다.제후국도출정의를행했는데,부월을내리는의식은없었다.제후에게는내릴만한부월이없었다.부월이없으니출정군의대장이휘하장수와사졸을처결하는권한에도제약이있었다.
1419년세종1년에이종무李從茂가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되어대마도를정벌하려갈때세종은한성부두모포백사장에서이종무와여러장수를전송하였을뿐이다.공식적인군례는없었다.1433년여진이평안도국경을침범하여최윤덕崔潤德이도절제사都節制使가되어출정할때도마찬가지였다.
이후세종의명에따라편찬된오례五禮의군례에서출정의는포함되지않았다.세종은천자의출정의는고사하고,제후의출정의에도관심을두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