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가야 여행 - 일상이 시리즈 5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가야 여행 - 일상이 시리즈 5

$17.90
Description
전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도출하는 새로운 방식이 시도된 최초의 대중 역사서
광개토대왕릉비문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촉발해 일본의 역사 왜곡의 빌미가 되기도 한 가야
현장을 찾아가 하나하나 확인하는 고고학적 재미와 쾌감
이 책은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못하여 연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고대국가 ‘가야’를 ‘수로왕 전설’인 난생설화를 통하여 역으로 추적하여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역사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역사 에세이이다.
광개토대왕릉비문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촉발해 일본의 역사 왜곡의 빌미가 되기도 한 가야는 정작 국내 역사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로왕의 전설과 구지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기억할 만큼 대중적인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덕후 출신 역사학자 황윤의 편견 없는 가설과 다양한 문헌 해설, 그리고 부지런한 발품을 통하여 드러나는 가야 역사를 보노라면, 신라에 패망하여 ‘가야’라는 이름은 사라졌을지라도, 신라의 삼한일통 과정에 합류, 이후 역사에서 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비로소 통합의 역사가 된 가야를 읽어낼 수 있다.
때로는 왜곡되고, 때로는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역사의 기록을 함께 확인하고 풀어내는 과정과 각 역사 속 장면과 명칭 등의 의미를 함께 알아가는 가야 역사 여행은 역사에 대한 흥미를 돋우고, 고고학의 재미와 쾌감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저자

황윤

작가.소장역사학자이자박물관마니아.대학에서는법을공부했으나역사와박물관에관심이더많았다.역사자료를찾고박물관과유적지를찾아감상,고증,공부하는것이휴식이자큰즐거움이다.역사인물,고미술에관한교양을대중화하고자글을쓴다.삼국시대와신라에특히관심이많다.

저서:《일상이고고학,나혼자국립중앙박물관》《일상이고고학,나혼자전주여행》《일상이고고학,나혼...

목차

프롤로그

1.광개토대왕
동아대학교석당박물관
광개토대왕릉비
그럼더해석해볼까
비석이세워진진짜이유
《삼국사기》속광개토대왕

2.김해로가보자
중국집영의루
김해에서확인해야할것세가지
대성동고분군,그중에서도29호분
나라에서철이나므로

3.대성동고분박물관
잘생긴디자인의박물관건물
무덤의변천과정
여러지역에서모인유물들
일본과의교류

4.국립김해박물관
검붉은표면의건물
가야의여러국가들
김해가야의범위
보물1922호금동관으로본금관가야
금관가야의무기체계
4세기시점일본
다시광개토대왕릉비를생각하며
400년전후의구체적모습
결국하고싶은이야기를담은것

5.사라진비밀의책,《개황력》
김해구산동고분군
금관가야마지막왕김구해의흔적
《삼국유사》와《개황력》
신화의탄생을추적하다
신라김씨의시조김알지
수로왕의진짜이름은무엇이었을까

6.경주에서찾아보는흔적
다시이어지는여행
대릉원
고대왕들의전설적인수명
왕비족의등장
다시살펴보는수로왕과허황후

7.김씨라는성
국립경주박물관
황금의나라,신라
신라왕이름,김진흥
김알지원래이름은금알지?
발음이름과뜻이름
문무왕릉비와소호금천씨

8.삼한일통
삼국통일시대가야인
헌집줄게새집다오
문무왕을화장한능지탑지
사천왕사로가는길
비석을찾아보자
신라말왕건의전설
한유명한거북이이야기
전해져오는또다른거북이이야기
마지막으로여행을정리

에필로그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광개토대왕릉비에언급된가야
고고학으로임나일본부설을반박하다

이야기는부산의석당박물관에서만난광개토대왕릉비에서부터시작된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백잔*과신라는과거고구려의속민이된이래조공을바쳤는데)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왜가신묘년이래바다를건너백잔▨▨신라를함락(破)하고신민(臣民)으로삼았다.)
*백잔:백제를낮춰부르는말

두번째문장에서▨▨로표기된글자는훼손된부분으로명확하지않지만,가야로알려져있으며,이문장은일본이임나일본부설을주장하는데에결정적인증거로쓰이고있다.임나는가야지역을의미하니,광개토대왕릉비는왜가가야를거점으로백제,신라를점령했음을뒷받침한다는것이다.
과연정말일까?저자는이를확인하기위해김해로이동한다.김해에도착하여찾은곳은대성동고분군이다.그중단연눈에띄는고분은29호분이다.봉분은없어졌으나고분을발굴하기전의모습으로전시되어있는데,철로만든큰칼,화살,청동솥,특히금동관등출토된유물을통해당시왕이라부를수있는자를묻은최초의무덤이었음을알수있다.크지않은봉우리형태였으니만들어진시기는3~4세기,따라서고구려5만대군이오기전에만들어진고분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414년에세워졌다.비에적힌신묘년은391년이며,고구려가신라의부탁을받고5만대군원정으로백제와가야를토벌한시기는400년이다.왜는400년이전까지는백제와가야를통해철기와그외고급문화를받아온입장이었고,가야,백제세력이약해진후에야본격적으로철기문화가발달한다.가야에서출토된유물이이를증명한다.즉,391년에일본이백제,신라,가야를점령했다는것은어불성설이라는의미이다.

이비문해석에대해서는19세기후반이후지금까지정말많은논의가있었는데,한일간민족주의적관점이투영되어서로유리하게보는경향을거쳐현재는한·중·일학자들모두저문장을그대로읽고해석하는경향이강해졌다.당시일본이바다를건너백제,신라등을함락시키고통치할수있는실력이었는지에대한의문을고고학적으로비교하여논리를구성하고있다.

그렇다면광개토대왕릉비에는
왜?백제를능멸하고왜를옹호하는글이새겨졌을까

답은371년백제근초고왕의고구려침공에서찾을수있다.세력을키워가던백제는3만대군을평양으로보냈고,광개토대왕의할아버지였던고국원왕이전투에서사망하고만다.광개토대왕집권이후백제는꾸준한공격대상이었고,396년백제는결국고구려에항복하지만포기하지않고고구려와통교를맺은신라를공격한다.그리고이것이고구려의5만대군남방원정으로이어졌다.고구려가백제를낮추고고구려의힘을과시하는글을남긴것은당연한순서다.오죽했으면광개토대왕릉비에는백제도아닌백잔(百殘)이라고백제를한껏낮춰부르고있다.

직접남긴역사조차없는가야
그런데1세기인물인김수로는어떻게살아남은것일까

백제,신라,고구려만큼의유명세는아니어도누구나한번쯤은가야와그의시조수로왕을들어봤을것이다.김수로는성씨가운데압도적으로가장많은본관을차지하는김해김씨의시조이기도하다.그러면가야의맥이끊기고직접남긴역사조차없는와중에1세기인물인김수로는어떻게살아남은것일까?그의난생설화와구지가는어떻게우리에게까지알려진것일까.

13세기일연이저술한《삼국유사》의‘가락국기’부분은가야에관한유일한기록이다.이것은11세기고려문종때김해에파견되어지방관을지낸문인이편찬한《가락국기》를요약한것이고,이는《개황력》이라는책에서왔다는언급이있다.개황이“금관가야라는황국을개창하였다.”라는의미로쓰였다고하니,《개황력》은수로왕의건국설화를중심으로구형왕에이르기까지의연대기를편찬한것으로빨라도6세기후반,이는곧가야가멸망하고난후의기록이라는점이특징임을알수있다.그렇다면일연은왜《삼국유사》기이편'가락국기'를실으며6가야중유독금관가야이야기만을남겼을까.

이는가야패망이후신라에서의가야인위상을통해증명된다.가야계출신인김유신장군의증조부는금관가야의마지막왕이었다.또그의여동생이태종무열왕의왕비가되어왕비족이되었고,결국삼한일통의왕문무왕은가야계왕이었던것이다.이는가야는사라졌지만,금관가야인의영향력은결코소멸되지않았음을의미한다.따라서가야의난생설화는가야패망이후계속보완되었고,금관가야의역사서인《개황력》이가락국기의유일한자료로남을수있었음을유추해볼수있다.

다음은성씨문제다.김씨는한반도에언제출현했을까.김수로,수로왕의성씨는김씨다.지금의성씨문화에서는아무런문제가되지않지만,수로왕이있었던1세기에는성이없었던것을감안한다면,이이야기는분명후에덧대어진이야기일수밖에없다.

《개황력》을인용한글에“수로왕의성은김씨라하는데,즉나라의조상이금색알로부터나온까닭으로금으로성을삼았다.”라는언급이있다.성씨의사용이신라진흥왕때라는점을감안한다면결국가야의시조수로왕전설은결국진흥왕의이름이김진흥으로언급된6세기중반보다뒤에지어졌음을알수있다.결국수로왕의이름디자인형식을미루어볼때도수로왕을언급한《개황력》또한최소6세기후반이후에정리된책임을증명한다.수로왕이현재김수로로성씨를갖게된배경만보더라도,신라내에서가야인의위치를짐작할수있다.심지어신라의왕족과같은김을성으로부여했다.

이책은이처럼당대사람들이하고싶었던이야기와상상력으로가득한신화에하나하나덧붙여진이야기들을걷어내는과정을통해베일에싸였던가야의진짜역사를찾아함께읽어내려가는묘미를선사한다.

가야인의거대한흔적
삼한일통의접착제와같은역할,더나아가민족의식의시작점이되다

금관가야는6세기에멸망했지만이대로끝난것은아니었다.삼국통일시기대단한업적을세운이들이가야계신라인이었으니김유신과문무왕이바로그들이다.

9세기통일신라의대표적문장가인최지원은당나라태사시중께올리는글에서“삼한이곧삼국이며마한은고구려,변한은백제,진한은신라”라고말하였다.신라는당나라와의결전을통해한반도내종족을하나로묶으면서삼한일통의식을유달리강조하였으며,이것은최초로등장한한반도내동일민족의식이라불릴만한사건이었다.
《삼국사기》의김유신열전에는“삼한은한집안이되었고백성은두마음을갖지않는다.”라는내용이나온다.이는고려인인김부식의기록으로“삼한=삼국”이라는인식이신라를거쳐고려시대에도이어졌음을보여준다.조선전기까지이어진“삼한=삼국”이라는인식은조선후기에이르러실학을통해역사지리에대한관심이커지면서가야역사가다시금부각되면서“삼한=백제,신라,가야”로다시돌아오게된다.
신라가구축한삼한일통의식이고려에이어조선까지수백년에걸쳐당연하듯인식되어온것은한반도역사에있어최초로등장한민족개념이었기때문이다.그리고그시작점에다름아닌가야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