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 평전 : 암흑기의 선각

이상룡 평전 : 암흑기의 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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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국가의 존립이 무너지는 절망의 시기, 사방이 어둠에 덮여 한 줄기 빛도 찾기 어려운 시국이었다. 긴 세월 호사를 누려온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 두렵지만 나서길 꺼리고, 같은 세월 갖은 착취와 학대를 받아온 백성들은 이가(李哥)나 왜가(倭哥)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체념으로 나서길 주저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의 국시라면 충(忠)과 효(孝)이다. 모든 사회적 가치, 덕목, 교육, 예의, 범절이 여기에 모아지고 두 글자로 압축되었다. 충은 특히 국가의 안위가 문제되었을 때 적용되는 예비용이지만 평상시에는 군주에 대한 경애심이고, 효는 나날에 쓰이는 상비약처럼 가정의 윤리관이었다. 그런데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놓이면서 충은 삼십육계하고 효는 조상들 묫자리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론적이고 예외도 없지 않았다. ‘암흑기의 선각’ 또는 ‘호모 노마드’(homo nomad)라 불리어 마땅한 사람(가족)들이 있었다. 같은 물을 마시고도 양은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 했듯이, 같은 전통 유학을 배우고도 보수 유림의 낡은 외투를 벗어던지고 혁신유림으로 갈아입었던 사람들이었다.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은 붓 대신 무기를 들고 의병활동→ 애국계몽운동→ 친일파 송병준, 이용구 등 처단 상소→ 해외망명에 나섰다. 노마드의 개척정신이 아니고서는 실천이 어려운 도정이었다.
백면서생에게 의병이나 해외망명은 여간해선 감행이 어려운 결단이었다. 더욱이 단신이 아닌 가족, 친척이 함께하는 망명은 쉽지 않다. 누대에 걸쳐 전승된 명문가의 기득권을 내려놓았고, 떠나기 전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노비문서를 불살랐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표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먼 이역에서 서거하였다. 유언으로 유해를 해방이 될 때까지 고국으로 옮기지 말 것을 당부할만큼 ‘조국해방’을 절체절명의 소명으로 삼았던 애국자였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선각자였다.
저자

김삼웅

독립운동사및친일반민족사연구가로,현재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공동대표를맡고있다.[대한매일신보](지금의[서울신문])주필을거쳐성균관대학교에서정치문화론을가르쳤으며,4년여동안독립기념관장을지냈다.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위원,제주4·3사건희생자진상규명및명예회복위원회위원,백범학술원운영위원등을역임하고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위원,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자문위원,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위원,3·1운동·임시정부수립100주년기념사업회위원등을맡아바른역사찾기에부단히노력하고있다.

역사·언론바로잡기와민주화·통일운동에큰관심을두고,독립운동가와민주화운동에헌신한인물의평전등이분야의많은저서를집필했다.주요저서로『한국필화사』,『백범김구평전』,『을사늑약1905그끝나지않은백년』,『단재신채호평전』,『만해한용운평전』,『안중근평전』,『김대중평전』,『안창호평전』,『빨치산대장홍범도평전』,『김근태평전』,『10대와통하는독립운동가이야기』,『몽양여운형평전』,『우사김규식평전』,『위당정인보평전』,『김영삼평전』,『보재이상설평전』,『의암손병희평전』,『조소앙평전』,『백암박은식평전』,『나는박열이다』,『박정희평전』,『신영복평전』,『현민유진오평전』,『외솔최현배평전』,『3·1혁명과임시정부』,『장일순평전』,『의열단,항일의불꽃』,『수운최제우평전』,『꺼지지않는오월의불꽃:5·18광주혈사』,『운암김성숙』,『나철평전』,『정의의길,역사의길』,『광이불요의지도자:성재이시영선생평전』,『개남,새세상을열다』,『이승만평전』,『김재규장군평전』,『주시결평전』,『김남주평전』등이있다.

목차

감사의말씀-이항증

1부그는누구인가
석주이상룡선생을찾아서
국가위난기에임청각에서태어나

2부교육,성장시기
과거낙방,일본침략나날이심화돼
대한협회안동지회조직일제에구속
의병지원에서계몽운동으로

3부국치와망명
국치로절망,해외망명길찾아
만주횡도천에망명짐풀다
만주에서자치기관경학사설립
척박한환경,경학사중심의한인사회구축
경학사부설신흥강습소설립

4부만주에세운교육,협동기관
광업사에이어자신계조직
부여옛땅에후예들이부민단창설
중국정부당국에공한보내
일제의토지수탈,만주이민급속증가
이주동포많아지자활력‘만주기사’짓다

5부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창설,주지사허가받아
신흥무관학교교장맡아경영책임
병기구하지못해이론교육으로
추위와혹한에도학도들의기충천
졸업후에는신흥학우단으로
3500명배출무장투쟁지도자로활동

6부남만주동포에게메시지
단군옛터에서희망을양식삼고
망국족이지만사람의권리를갖자
제군!단체만들어힘을기르도록

7부무오독립선언참여
대표급39인과‘대한독립선언서’발표
‘주권불멸론’,독립운동의적통내세워
국민의‘육탄혈전’을촉구

8부3·1혁명기의활동
한족회와군정부조직책임맡아
‘군정부’조직중임정수립되자‘서로군정서’창설
아들보내군자금모으고체코제무기구입
게릴라전으로일제에타격

9부무장독립전쟁시기
만주독립군봉오동,청산리대첩이뤄
봉오동,청산리대첩의역사적평가
목에는거액현상금,보복전에서재기

10부이승만탄핵이후
이승만의위임통치론극력반대
임시정부의정원,이승만대통령탄핵
결렬,그러나의미있는국민대표회의
박은식,고별사에서‘이상룡협조요망’

11부베이징의조선공화정부
‘조선공화정부’이상룡을대통령추대
대통령추대거부,만주로귀환

12부임시정부의수반
박은식대통령하야,이상룡천거
상하이삼일당에서초대국무령취임
국무령사임하고다시서간도로

13부국무령퇴임이후
남만주로돌아왔으나체력약화
고향에서동생이모시러왔으나

14부독립못본채눈을감다
75세서거,‘국토회복되기전에는이곳에묻어라’
가족,일가친족의항일투쟁
풍채의젓하고도량은크고두터워

15부면면히흐르는독립운동가의집안
유고와손부가쓴운명의모습
3등급훈격에재심신청했으나

연보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1894년은국내외적으로격변의해였다.동학농민혁명에이어일본군이수원부근풍도에서청국군함을선제공격함으로써청·일전쟁이일어나고,정부의갑오개혁,동학군2차봉기등이계속되었다.이땅의남반부에서는일본군에의해동학농민군이시산혈해(屍山血海)를이루고,북반부에서는청일양국군의사활을건전쟁으로피바다를만들었다.

경술국치라는미증유의국난속에서이상룡은단호했다.많은지식인과민중들이역사의격변을맞아방향을잡지못한채우왕좌왕할때그는추진해온대로해외망명을결행했다.그동안집안일을해온머슴들을모두해방시키고노비문서를불태웠다.그리고가족들의해외이동과정착에소요될비용을마련하기위해논밭과집을팔았다.

이상룡과한인지도자들은이주한인이많아지면서풍화시엔(通化縣)을중심으로서간도일대에본격적인독립운동기지를건설하고자서둘렀다.경학사가해체된이후한인사회의자치와산업의향상을지도할새로운조직의필요성이대두되었다.1912년가을부민단이조직되었다.“부여의옛영토에부여의후손들이부흥결사를세운다는뜻”이담겼다.

이상룡은신흥무관학교교장으로재임할때는물론퇴임후에도자신이지은『대동역사(大東歷史)』를교재로우리역사를강의하였다.“1913년이상룡은만주지역독립운동계만이아니라그곳으로이주해오는동료들을정신적으로무장시키고자역사서를저술했는네,이것이바로신흥무관학교의교재로사용된것으로전해진다.중국인들의압박을견디면서독립운동의근거지를마련하기위해서는무엇보다‘기(氣)’를살려야했다.그는『대동역사』를편찬하였는데이는민족교육의지침을마련한것이었다.”

아아,제군들이여!측간의구더기가똥을즐기는것은그더러움을편안히여겨서입니다.골짜기의새가교목으로옮겨가는이유는밝은것을취한것입니다.지난날우리들은문을닫고깊숙이거처하면서외인(外人)들을접하지않았기에절로이미비루하고열등하게되었는데도,아직도요즘시대가어떤시대인지를알지못하고있습니다.

석주어른께서는당신의450년된고택인‘임청각’을매각해서독립사업에쓰려고외아들인나의시아버님을한국으로들여보냈다.아버님은20누대의종손으로서가문도내팽개치고독립운동한답시고떠나갔던사람이독립달성도못하고고향에다시들어가려니얼굴에소가죽을덮어쓴것같더라고나중에도몇번말씀하시는것을들었다.종손은가문을지켜야하기때문에어느집안도종손이망명을떠나는법은없단다.그런데석주어른께서는종손이면서집안일보다국가안위가더우선이라하며떠났으니문중에서좋아할리가없었다.

만주의무장전쟁세력이비록‘벽상조각’에그쳤지만조선공화정부를조직하면서이상룡을대통령으로추대할만큼그는이분야의확고한위상을갖고있었다.북경군사통일회의는국민대표회의가소집되고,임시정부측이개조파와창조파로갈리는등독립운동진영이극심한분열과대립을거치면서1924년해체되고말았다.

국무령은명칭이바뀌었지만여전히많은권력이부여된임시정부의수반이다.하지만이상룡은전임박은식과같이권력이나명예에급급한인물이아니었다.취임당시67세로건강도썩좋은편이못되었다.여생을바쳐임시정부를발전시키고이를동력삼아조국광복에초석이되고자다짐한다.

53세의늦은나이에망명하여그야말로풍찬노숙의세월이흘러어느덧70고개에다달았다.날이갈수록포악성이더해가는일제의포위망은드넓은만주땅을종횡하며압박하였다.위기감을느낀후배독립운동가들이안전을위해더깊은산중으로거처를옮기도록하고신변을보호해주었다.그의목에걸린거액의현상금은중국인들도넘보았다.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