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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평북정주출생으로최남선과더불어신문학을개척한대표적인문인이다.일진회장학생으로도일하여명치학원에서수학했으며,귀국후오산학교에서교편을잡기도했다.초기에는'무정'을비롯하여,'개척자','윤광호','방황'과같은작품을발표하였다.일본에서'2.8독립선언서'를기초하고상해로탈출한후에는도산안창호의사상에큰영향을받고돌아왔다.1930년대초반까지윤리중심적색채를띤'재생','마의태자','흙'같은장편을집필하였고,중반이후에는'이차돈의사','원효대사','무명'등불교적인색채가짙은작품을창작했다.1937년수양동우회사건으로투옥된이후,창씨개명하고학병권유연설을하는등친일활동에본격적으로참여했다.1950년납북되었다.
서문/4꿈/9김씨부인전(金氏夫人轉)/209어떤아침/219사랑에주렸던이들/229가실(嘉實)/263[해설]춘원과동학,기독교그리고불교/305
현대사회와는달리근대사회는신성기반문화의재탈환이라고하는측면에서접근하면유효한이해에도달할수있다는생각이있습니다.특별히식민주의를표방하고있는경우에는더욱그렇다고여겨집니다.실제로서구로대표되는식민본국에서는과학주의에입각하여‘신의죽음’을논하며도덕적타락에함몰되는양상을띠어가고있었던반면,식민지국에서는전통적신성에로의회귀라든가식민본국으로부터유입된신성기반의문명에의지하여도덕적으로더욱활성화되는양상을보여주고있습니다.서구로대표되는식민본국에서는신성문화가얇아지고있는반면,식민당하는식민지여러나라에서는외려그반대의양상을보였다는것은주목을요하는일입니다.춘원은이와같은사정을당시실제식민지배당하는상황하에서그누구보다도잘알고있었던게아닌가하는의구심이있습니다.춘원은1939년인가그의『육장기』라는꽤긴단편에서이와같은본심을토로하고있습니다.『내가독립운동을하고교육사업도하고민족계몽운동도해왔지만그게다헛것이야.거기에하나님이없으면,부처님이없으면아무것도아니란말이야.하나님이있어야,부처님이있어야그래야의미가있고완성이되는거란말이지.아니면,그런건다껍데기인거야.」뉴욕타임즈의기자프리드만은그의저서『렉서스와올리브나무』에서제2차세계화즉제2차식민주의에대항하는것은각지역이나나라의전통이라고하였는데,그전통의핵심이다름아닌신성기반의문화를일컫는것이었습니다.세계화나식민주의,글로벌리즘에대항하는그리하여그시도를무화시키는핵심이하나님이나부처님으로대변되는신성문화그자체라는것은시사하는바가큽니다.이런관점이이해되고나면춘원의위의발언이무엇을의미하는지명징하게안전에잡혀옵니다.춘원이도달한지점은결코만만한지점이아니며,우리에게많은것을시사해주는것이라는점을살필수있습니다.일찍이부모를여의고친척집을전전하며살던춘원의간난신고의어려운삶에반전의기회로다가온것이천도교였습니다.그리고그가전전해다니던친척집의팔촌형제가운데이학수즉나중에운허스님이되는분이있었고,어려서부터그와는춘원이의기가투합했다고하는이야기도눈여겨볼필요가있겠습니다.춘원은『거룩한죽음』이라는단편에서천주교교주가사형당하는모습을아주안타까운심정을담아그려내고있습니다.춘원과동학과의관련을보여주는작품이라고하겠습니다.일본유학을가서춘원이접하게되는게기독교입니다.하숙집주인이일본인목사였다고하고,후에춘원이입학하는메이지중학교도기독교계통의학교였습니다.춘원이얼마나독실하게깊이기독교를믿었는지는명확하게알려져있지않습니다만,그의작품들속에서언급된언사들속에서추정해볼때그가기독교에상당한조예가있었고,진심으로접근하고있음을살필수있습니다.춘원은누구보다도도산안창호를존경하고추종하고있었습니다.그런데,그도산이독실한기독교신자였습니다.도산이설립한독립운동기관인흥사단에가입하면서도산이면접을행하는가운데당신의종교는무엇인가묻는장면이나오는데,그때춘원은기독교라고대답했던것으로추정됩니다.흥사단에무사히가입하기위해서였기도하겠지만,실제로당시는춘원이기독교에깊이심취해있었다고보는게타당하다고여겨집니다.이런점에서춘원이독립운동에매진했던동안에는춘원은내내기독교신자였을가능성이높습니다.그의마음의지주가그곳에있었다고보여지기때문입니다.그런데,1937년수양동우회사건으로징역을살고6개월만에출소하여나왔을때세상은춘원을백안시하기시작했습니다.그가변절했다는소문이자자하게퍼지고있었습니다.안창호선생을비롯한관련자들은감옥에서나오지못하고있는데춘원만은너무도일찍감옥을출소해나왔기때문입니다.그리고얼마지나지않아춘원은공식적으로불교에귀의했음을세상에알립니다.이런면에서보더라도독립운동에매진할동안의춘원은기독교에기울어있었다고보는게타당하다고봅니다.1930년대중후반불교에귀의한이후춘원은죽음에이르기까지불교신자였습니다.해방되고나서4년반여년동안춘원은남양주광릉을시야에두고있는봉선사에칩거하여있었습니다.그때의생활상을담은문집『산중일기』가출간되어나와있습니다.춘원이광릉봉선사에칩거한것은여러가지이유가있겠지만,가장눈에띄는것은봉선사주지가다름아닌운허스님이었기때문이었습니다.운허는춘원의친척동생으로어려서함께놀며수학하던사이이고젊은시절에는만주로나가독립운동을함께하기도했던형제요동지이기도했던인물이었습니다.말년에‘부처님에로의길’이라는또같은길을걷게된도반이라할수도있는사이였으므로춘원이봉선사라는절에자리를잡게된것은어쩌면지극히자연스럽고당연한일이었을지모르겠습니다.물론세상의색안경은다른측면이더욱더부각되어있는듯도합니다.당시춘원이‘반민특위’의추적을당하고있었고,이를피해잠시몸을숨기기위한필요에서운허스님이있는봉선사를이용했다는것입니다.어느쪽이진실이든하여튼춘원은해방후봉선사에몸을담았고,거기서진짜속세를등진수행자의면모를여실히보여주고있었던것만큼은사실입니다.거기서춘원이무엇을보았고무엇을생각했고,무엇을깨우쳤는지는사실잘알수없습니다.그러나그단편단편적인것에대해서는전혀접근이불가능한것은아닙니다.그가남겨놓은그의작품들을통해서입니다.거기서그는이책에소개되는『꿈』을썼고,『원효대사』를탈고했으며,명문의수필집『산중일기』를완성했습니다.그모두가수작이요주옥같은작품들입니다.춘원의봉선사생활의끝은결국‘반민특위’재판에서패소하고감방으로가는것이었습니다.그리고는곧6.25전쟁이터지고허둥지둥하는사이에인민군에잡혀북으로끌려가게됩니다.일반사람의기준으로볼때아무래도춘원의일생은행복한것과는거리가있었던게아닌가싶습니다.파란만장하였으나결코행복했다고는하기어려운,그런간난신고의것…사람을몹시지치고힘겹게하는삶의과정이대체로이와같다고봅니다.그러나춘원이말년에도달한그깊이와성취만큼은우리가곰곰이다시살피고재음미해보아야하는게아닌가싶습니다만.그것은분명‘신성의탈환’이라고할까요,아니면‘재탈환’이라고할까요.그런가슴뿌듯하게하는,두근두근가슴뛰게하는것임이틀림없기때문입니다.‘신성의탈환’내지는‘신성의재탈환’이라면춘원은어쩌면목적지에도달한것일지도모르겠습니다.그가한평생고아처럼방황하며찾아헤매다녔던그것을말입니다.춘원은그것으로서충분했던게아닐까요.충분했던거라고봅니다.춘원을욕하고매도할명분따위,이제우리에게는남아있지않다고사료됩니다.-이가을(2024년),글의길(글도)의편집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