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힘을 믿는다 (정찬 산문집)

슬픔의 힘을 믿는다 (정찬 산문집)

$15.00
Description
예술의 영혼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응시한다.
삶의 고통 속에서 예술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세계의 고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위로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에 질문을 던지며 그 안에서 발견하는 공감, 연대, 슬픔의 윤리. “허구와 사실 세계를 넘나들면서 권력과 사랑의 본질을 파헤치는 데 천착해 온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가 정찬이 등단 37년 만에 처음으로 산문집 《슬픔의 힘을 믿는다》를 펴냈다. “애도의 깊이가 곧 공동체의 깊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나’와 ‘너’라는 분리된 두 존재를 연결하는 슬픔의 윤리, 진실을 직면하게 하고 희망을 일깨우는 슬픔의 힘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슬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슬픔은 피동적 감정이 아닙니다. 고통과 절망을 껴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능동적 감정입니다.” 그에게 슬픔은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깊이 공감하고, 고통의 의미를 깊이 헤아리는 것이며, 아파하는 이, 절망한 이에게 손을 내밀게 하는 힘이다.

《슬픔의 힘을 믿는다》에는 저자가 슬픔과 마주 서서 쓴 글들이 담겨 있다. 섬세하고 예민한 눈으로 이 세상의 위로받지 못한 슬픔들을 발견하고, 정직하고 단정한 언어로 그 슬픔들에 위로를 건넨다. 또한 문학과 예술은 고통의 산물이기에 고통을 깊이 응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세계의 고통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해 온 작가들의 특별한 삶을 들여다본다.
저자

정찬

1983년무크지〈언어의세계〉에중편소설〈말의탑〉을발표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소설집《기억의강》,《완전한영혼》,《아늑한길》,《베니스에서죽다》,《희고둥근달》,《두생애》,《정결한집》,《새의시선》,장편소설《세상의저녁》,《황금사다리》,《로뎀나무아래서》,《그림자영혼》,《광야》,《빌라도의예수》,《유랑자》,《길,저쪽》,《골짜기에잠든자》등이있다.동인문학상,동서문학상,올해의예술상,요산김정한문학상,오영수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책을펴내며

제1부문학과예술의운명

이덕희,삶과죽음사이심연으로
채영주,세번의일탈
봉준호의질문
〈미인도〉의비극
랭보의‘성스러운죄’
기형도‘기억의집’에서
윤이상,영원한귀향
‘먼집’으로떠난허수경
김윤식,니체,도스토옙스키
카뮈와어머니
미시마유키오,‘성스러운황홀’
간독시대의언어
살아서돌아온자
이스마일카다레,소설의심연
〈공동정범〉과예술의힘
위로할수없는슬픔
‘토리노의말’을응시하라
이세돌의감각

제2부슬픔의힘을믿는다
학림의그림자속으로
작가의은밀한욕망
슬픔의강변에서서
카프카에게물었다

제3부폭력의기억,슬픔의공동체
사드와전짓불의공포
박정희유령
십자가의무게
증오의감옥에갇힌‘태극기’
체게바라의꿈
“망루를불태운것은우리다”
4ㆍ3과베트남전쟁
5월광주의빛
베를린,판문점,싱가포르
12월12일의기억
4월의순간들
김재규의죽음
김원봉,백선엽,이인태의생애
박종철아버지와김용균어머니
부재의기억
국가권력의근거에대한물음

제4부고통과희망사이
경주지진의묵시록
촛불의미학
국민을두려워하지않은죄
문재인의운명
방송의주인은누구인가
‘나의죽음’,‘우리의죽음’
이명준은왜바다에투신했을까
히로시마와난징
‘경계인’의춤
‘양심적’병역거부논란
한중일공동체를상상한다
66시간열차대장정
5ㆍ18혐오표현의심리
트럼프대통령에게
갇힌한반도에서나는소망한다
팬데믹의역설

독자의글_나는왜정찬을읽는가(정희진)

출판사 서평

“나에게정찬은소설가와지식인의개념을바꾼사람이다.작가는이야기꾼이아니라사상가여야한다는게나의생각이다.정찬의글은독자에게‘줄거리의소비’가아니라‘생각하는노동’을요구한다.문체가정치학이자미학임을정찬만큼잘보여주는작가도드물다.그의글을읽다보면문장과문장사이가무간도(無間道)로느껴지는순간이있다.그순간독자는작가의깊은숨결에어지러움을느낀다.
나는소멸에이르기까지시간이지루한사람이다.그래서긴행렬에서눈길둘곳이필요하다.잠깐만이라도행복하기위한.이책《슬픔의힘을믿는다》는내가알지못하는그런친구가되리라믿는다.”
_정희진(여성학연구자/문학박사)

책은4부로구성되어있다.
1부‘문학과예술의운명’은고통속에서뛰어난작품을창조한작가들과그들의작품과죽음을이야기한다.‘절대와완전’이라는이십대의꿈을평생놓지못한작가이덕희,머나먼타국에서모국어에대한향수와허기로쓴허수경의시들,전쟁으로아들을잃은후죽은아들을안은채울고있는‘피에타’를만들어낸케테콜비츠…….그외에도채영주,기형도,윤이상,아르튀르랭보,알베르카뮈등의이야기가들어있다.
2부‘슬픔의힘을믿는다’에는저자가작품활동을하면서큰영향을받은작가와작품이야기들이실려있다.〈슬픔의노래〉를만든폴란드작곡가헨리크구레츠키와아우슈비츠에서예술가의임무에관해나눈대담,작가카프카에게집요한질문을던짐으로써개인적삶과카프카작품의관계를밝히는가상인터뷰가흥미롭다.
3부‘폭력의기억,슬픔의공동체’는억압과폭력이지배했던과거역사와바로잡지못한과거의유산으로인해반복되는아픔을이야기한다.현기영의소설《순이삼촌》으로제주4ㆍ3을복기하고,아버지에서딸로이어진유신시대에대한분노와5월광주항쟁의의미를되짚고,용산참사와세월호의희생자들을위로한다.
4부‘고통과희망사이’는촛불혁명이후다시타오르기시작한희망을기록한다.김정은위원장의‘66시간열차대장정’을보며갇힌한반도에서벗어나는꿈을이야기하고,한중일공동체라는새로운국제관계를그려보기도한다.경주지진을직접겪으며원전없는세상에대한깨달음을얻기도하고,코로나19팬데믹에서타자의시선에서‘나’와‘우리’의시선으로바꿀기회를발견한다.

“슬픔의강변에서예술가는무엇을할수있는가?”

“예술가는어둠속에서빛을찾는사람이다.”예술가란살아남은자의형벌을가장민감히느끼는사람이다.살아있다는것은축복이자형벌인데,예술가는축복보다형벌에민감한사람이다.저자는그형벌을견디지못하는자는예술가가아니라고단언한다.

그녀의이십대는‘절대와완전에대한과대망상적집착’으로점철된시절이었다.어떤것이아니라모든것을알고싶었고,무엇이나다되어보고싶었고,온갖것을다사랑하고싶었다.……그런그녀에게삼십대는힘의한계를깨닫는시간,온갖가능성대신한가지확실한것을선택해야하는시간,날아오르는자세에서발을땅에내려놓아야하는시간이었다.……이덕희가숨을거둔것은지난8월11일새벽이었다.향년79.사인은영양실조로인한폐렴이었다.의사의말에따르면육신이그녀의뼛속영양소까지앗아가뼈가녹아내렸다고했다._‘이덕희,삶과죽음사이심연으로’,14,15~16쪽

콜비츠의피에타는‘노이에바헤’천장의둥근구멍아래서비가오면비에젖고,눈이내리면눈에묻힌다.……지금우리는씨앗같은생명들이구조적으로짓이겨지는광경을목도하고있다.죽음의일상화는애도의결핍을낳고,애도의결핍은죄를은폐하고진실을박제한다.유령처럼떠돌고있는슬픔들을끊임없이육신화해야하는까닭은여기에있다.……광화문광장에서비가오면비에젖고,눈이내리면눈에묻히는우리의피에타를보고싶다._‘위로할수없는슬픔’,74,76,77쪽

망루는철거민들에게최소한의삶을지키기위한거점이었다.사랑이꿈과기적사이의어떤것이라면,모욕은절망과죽음사이의어떤것이다.그들은비정한물신사회에서오랫동안모욕을받은사람들이었다.……〈공동정범〉의놀라운점은참사이후트라우마로고통받고있는그들에게영화작업이치유행위로작용한사실이다.카메라는지옥같았던기억의고통에갇혀굳어버린그들의마음속으로섬세하게스며들어부드럽게변화시키고있었다._‘〈공동정범〉과예술의힘’,70~71쪽

“과거의슬픔은곧현재와미래의슬픔이다.”

제대로반성하고애도하지않은과거는끊임없이그림자를드리운다.5월광주의슬픔은세월호의슬픔이고,용산참사의슬픔은산재사고로아들을잃은어머니의슬픔이기도하다.그러나저자는쉽게절망하지않고끝내절망아래짓눌려있던희망의씨앗을발견한다.박종철아버지와김용균어머니를통해“내아들은죽었지만다른사람자식들은살리고싶”었던부모들의이야기를전하고,세월호사고를기록해다큐멘터리〈부재의기억〉으로만들어낸‘416기록단’의이야기를통해불행을나누어희망으로바꿔내는공감의힘을말한다.

김미숙은아들이죽기전그곳에서8년동안열두명이산재로죽었고,28번이나시정요구를했음에도돈이많이들어간다는이유로묵살당한사실을알게되면서아들의죽음이혼자의죽음이아니라는사실을깨닫게되었다.김미숙이세상의지붕위로올라가아들의참혹한죽음이품고있는진실을외친것은“내아들은죽었어도다른사람자식들은살리고싶다.”는간절한염원때문이었다.……그녀가옛남영동대공분실509호실에마련된박종철의영정에흰꽃한송이를바치는순간박종철과김용균의삶이서로에게스며들면서시공을초월한역사적만남이이루어진것이었다._‘박종철아버지와김용균어머니’,175~176쪽

팽목항입구갯벌매립지에잿빛컨테이너가있었다.사고해역주변에서거둔물건들가운데주인을찾을수없는것들을모아둔유류품보관소였다.거기에도운동화가있었다.진흙묻은옷가지와바닷물에젖어풀죽은인형,변색된가방과모자가있었고,줄끊어진기타도있었다.그물건들속에는물속으로사라진아이들이하고싶었던말들,하지만끝내하지못한말들이스며들어수런거리고있었을것이다.예술가는,그가진정성있는예술가라면그들의수런거리는소리에귀를기울인다.〈부재의기억〉은귀를기울이는예술가가만든작품으로내게다가온다._‘부재의기억’,180쪽

“서로를발견하는일은인간의성스러운의무다.”

어둠에빛을밝혀진실을구한촛불혁명은분열로얼룩졌던우리사회에서로를외면하지않는공감의가치를되살렸다.다른사람의아픔을나의아픔으로받아들인이들은촛불을들었고모두에게더나은삶을위한변화를만들어냈다.저자는이런‘능동적슬픔’을두고이렇게이야기한다.“우리는알고있습니다.절망속에희망이씨앗처럼깃들어있음을.그씨앗을키우기위해서는절망에짓눌리지않아야할것입니다.절망을응시하고,절망을껴안으면서,절망을넘어서야할것입니다.”

예술작품에서문제적인간의내면은세계의내면이다.고르차코프의촛불이문제적인간인도메니크의희생을밝히는것은세계의내면을밝히는일이다.고르차코프는촛불을들고희뿌연수증기가피어오르는노천온천속을조심조심걷지만몇걸음만에촛불이꺼진다.카메라는바람에꺼진촛불을다시켜고고통스럽게걸어가는고르차코프의모습을묵묵히보여준다.몇차례실패끝에마침내‘저쪽’에도달한그의얼굴은희망으로빛난다.한국사회의‘저쪽’은어디일까?우리가촛불을꺼뜨리지않고‘저쪽’을향해쉼없이나아가야하는이유는참으로오랜만에서로에게서희망으로빛나는아름다운얼굴을보았기때문이다._‘촛불의미학’,198쪽

코로나19가팬데믹이되기전까지인류는타자의시선을거의바꾸지않았다.인간속에내재한‘이기적자아’때문이었다.인간의이기적자아는끔찍한전쟁앞에서도쾌락을느낄정도로기괴하다.……코로나19바이러스는폭탄과달리대상과지역을가리지않고무차별적으로파고들어가세계를전쟁터로만들었다.이런미증유의위기속에역설적으로희망의씨앗이깃들어있다는사실은신비롭다.바이러스팬데믹이타자의시선이라는이기적쾌락에갇힌인류에게감옥의문을열어준것이다.문이열렸다고해서그안에갇힌사람이나온다는보장은없다.자신이감옥에갇힌것을모르는사람은문이열린사실조차모를것이며,그안을편안히느끼는사람은나올이유가없기때문이다.그렇다면문밖으로나온사람들이해야할일은무엇일까?_‘팬데믹의역설’,2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