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시작과 동시에 기록이 된 진짜 역사를 만난다”
기미년 3월 1일 토요일, 정오를 알리는 남산의 오포(午砲) 소리를 신호 삼아 종로2가 탑동공원(탑골공원)의 팔각정(육각당)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섰습니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이 탑동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선언식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시 30분 경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민족대표들은 탑동공원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시각 민족대표들은 탑동공원이 아니라 그곳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300여 미터 떨어진 태화관(서울 인사동)에 있었습니다. 태화관은 원래 조선왕조 순화궁 터였고 이후 이완용의 별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며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 밀약이 이뤄졌던 치욕의 장소였습니다. 민족대표들은 이곳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한다는 의지도 담았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은 전국 대도시와 중소도시, 면, 리 단위의 농촌지역으로까지 퍼져 당시 13도 220개 군의 행정 체제였던 한반도에서 무려 211개 군(95.9%)이 만세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일제는 평화적인 시위로 진행된 3·1운동을 총칼로 짓밟았고, 이 과정에서 7500여 명이 살해됐고 1만 6000여 명이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한민족의 독립 열망을 확신시켜준 3·1운동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3·1운동의 열기는 한 달 뒤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중국과 인도 등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민족의 표현기관을 자임한 〈동아일보〉 창간 역시 3·1운동이 가져온 결과물이었습니다. 만세운동 이듬해인 1920년 나온 동아일보는 올해로 창간 100년을 맞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은 전국 대도시와 중소도시, 면, 리 단위의 농촌지역으로까지 퍼져 당시 13도 220개 군의 행정 체제였던 한반도에서 무려 211개 군(95.9%)이 만세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일제는 평화적인 시위로 진행된 3·1운동을 총칼로 짓밟았고, 이 과정에서 7500여 명이 살해됐고 1만 6000여 명이 부상했습니다.
하지만 한민족의 독립 열망을 확신시켜준 3·1운동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3·1운동의 열기는 한 달 뒤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중국과 인도 등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민족의 표현기관을 자임한 〈동아일보〉 창간 역시 3·1운동이 가져온 결과물이었습니다. 만세운동 이듬해인 1920년 나온 동아일보는 올해로 창간 100년을 맞습니다.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세트 (양장본 Hardcover | 전 2권)
$5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