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 밑에 일군 밭

구들 밑에 일군 밭

$18.27
Description
수학 강사로 일하던 저자 한미선은 2015년 뇌출혈로 쓰러져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소생했고, 이전보다 더 왕성하게 강사로 일했다. 그러다 3년 전 다시 뇌졸중으로 중태에 빠졌고, 이번에도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 간신히 깨어나 재활 치료 중이다. 지금 당장은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쓰기 쉽지 않은 작가가 30년 가까이 묵혀 두었던 단편소설 16편을 꺼내서 지인들에게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에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전력하다 1995년경 수감생활을 했던 저자가 출소 후 1년 동안 속리산에 칩거하면서 완성한 작품이다.
사회변혁 운동에 투신했던 저자의 이력 때문에 도식적인 소설일 거라 예단할 수 있는데, 실제로 16편의 단편소설 하나하나는 “인물의 심리와 행동, 배경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들어맞게 표현”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다.
초등 교과 연계
저자

한미선

1963년강원도묵호(동해시)에서2남3녀중셋째딸로태어났다.돌담으로둘러싸인묵호집에는오래된배롱나무가있었고,이소설집에자주등장한다.
중학교입학과함께가족을따라서울로이사했고,1982년고려대수학과에입학했다.그시대의많은청춘이그러했듯이학생운동과노동운동의경험도했다.학교졸업후에는월간『노동자』기자,진보시사지월간『말』의자유기고가로활동했다.30대초반에는갈라진나라를하나로이어보려다공안사건에연루돼구속되기도했다.감옥에서나와다른세상을겪어보기위해1년가까이택시운전을했고,이때의경험을바탕으로10편의연작소설창밖으로세상이보인다’를썼다.
한동안전공을살려수학강사로이름을날리기도했다.최근에는청소년을위한통일민주교육을준비했으나급작스럽게뇌졸중이찾아와온힘을다해병마와맞서고있다.
이책의마지막에실린「희망새를찾아서」의마지막장에나오는말처럼“싸움은이제부터시작이다.”라는생각을하며돌담너머의삶을응시하고있다.
저서:『그래도못다한이야기:전감사관이문옥고백록』(1991)
『김대중·김영삼,경쟁과공존의역사』(한미선·오연호공저,1992)

출판사 서평

학생운동,노동운동으로바빴던친구가언제소설을?

『한미선단편선』은작가가30여년전에쓴글들을모아낸소설집이다.6편의단편과옴니버스식장편연작소설로구성되어있다.작가인친구는80년대학생운동에함께몸담았던논변이정연했고탁월한리더십을가진나의동료였다.그리고뜨거운열정을품은젊음이었다.수학을전공했고수학적재능이뛰어난친구는어떤문제든논리적인접근방식을취해현실적인감각이없다고응수하는나와는자주충돌했다.

그런친구가소설을썼다는것은그자체로놀라웠다.내가아는친구의모습이거기에는없었기때문이다.각자다른영역에서사회운동을할때친구가진보성향의잡지인‘말’지자유기고가로도활동했던것을알았고필명으로책을낸것도알고있었다.친구가쓴기사를보면서‘성격대로가지런하고조리있게글을쓰는군.그런데사람의마음을건드리는감성은약해.’그랬던기억도있다.그랬던친구가소설을썼다니.더욱이그시기에.초고에적혀있는글쓴시기가택시기사로,야학교사로,현장운동가로종횡무진뛰어다니고,공안사건에연루되어옥살이하던시기와도겹쳐있었다.도대체무슨일이있었던거야?

두번의뇌출혈수술,그리고꺼내든30년전원고

이책이30여년동안서랍에갇혀묵혀있다세상에나오게된탄생배경또한독특하다.친구는현재생사를넘나드는수술후후유증으로병마와싸우고있다.3년전,급박하게온두번째뇌출혈로수술을했다.다행히목숨을건졌고가족들의돌봄으로회복으로돌아섰지만,여전히표현과거동에제약이있는상태이다.그간친구는다른친구들과는소식이끊어진채,지방에선꽤유명한수학강사로,가족과함께유기농업을하며생계를꾸렸다고한다.재활치료를받던친구와어렵게연락이닿아만난자리에서‘책을내고싶다’는말을했다.친구가말한책은알기쉽게접근할수있는수학지도서와예전에쓴소설을책으로출간하고싶다는것이었다.수학지도서를내는것은지금의몸상태로불가능하고,소설은써놓은것이니손을봐서책으로출간할수있겠다싶었다.

지금은시장에서도구하기어려운타이프로친원고가컴퓨터로옮겨져세상밖으로나오게되었다.그동안왜출간하지않았는지를물었을때‘그냥.’‘그런생각을안해봤다.’는친구의대답에궁금증은접어두기로했다.자전적소설,‘구들밑에일군밭’에어린화자의탄생장소는살구밭이다.새벽녘진통으로어머님이부여안은살구나무밑에서첫호흡을뱉었듯이,30여년만에세상밖으로얼굴을내민소설집의탄생도화자의투병이라는진통과정이있었기에가능했다,이모든과정이우연일까?필연일까?

1년간속리산에서쓴2천매

소설을읽으면서또놀랐다.책을읽기전나의선입견과예상을넘어선글이었기때문이다.일단양이다.200자원고지로2천매에가까운방대한양은직업소설가도3년이란세월에쉽지않다.다른일을병행하면서쓰기엔더욱그렇다.1년간속리산에칩거하며글쓴기간이있었다하더라도창작은쉬운작업이아니다.‘이게가능해?’라는말이맴돌았다.무엇이차고넘치게해서글을쓰게했을까?

예상을뛰어넘는또다른점은수학을전공한친구의이력에걸맞지않은절묘한문학적묘사능력이었다.‘아직아무도밟은이가없는,골목길에덮인눈이가로등불빛에반사되었다.첫발자국을내면서병만은연신자신의발자국을돌아보았다.곧바로걸어보고,갈지자로도걸어보고,오던길을돌아서서뒷걸음질쳐보기도했다.그러다가성큼성큼덩실덩실발걸음을큼직하게떼보기도했다.’「창밖으로세상이보인다」에서사랑이시작될때의설렘을표현한구절이다.인물의심리와행동,배경이톱니바퀴처럼딱딱들어맞게표현되어여운과이미지가나를들썩이게한다.

약자들의우울한삶과희망찾기

주제에대한접근과서술방식도나의선입견과는멀었다.친구는뜨겁게한국사회의변혁을꿈꾸고몸소행동했으므로소설또한사회주의리얼리즘공식에걸맞은소설일거라는나의예측과다르게인간삶의보편적인문제를들여다보고있었다.그렇다고이소설들이리얼리즘이아니라는얘기는아니다.한국사의격변기에있었던,있을법한,현실에뿌리박은곳곳의이야기이다.잭런던의‘강철군화’,막심고리키의‘어머니’처럼자신이처한상황에눈뜬인물이사회변혁에나서는,눈물과감동이따르는이야기라기보다는우울한역사적반복과정에서약자들의삶이실패할수밖에없는처지와상황을예리하고촘촘하게표현한이야기들이다.어렵게희망을찾아가는이야기도있다.

누군가그랬다.작가의숙명은목소리를내지못하고밀려난사람들의목소리를들려주는사람이라고.단편「타인들」은갑작스러운아버지의죽음을둘러싸고구성원각자가독백이란형식으로가족사를회고하는이야기이다.각자가다른구성원과의사이에서벌어진사건을각자의시선에서토로한다.독백의내용은서로에대한서운함,원망,이해할수없음이다.가족사이가벌어진것에나는잘못없음이다.그런데독백을듣다보면사건에대한기억도다르고오해를풀지않은채각자의입장에서만판단하는것을발견할수있다.작가는독백만들려주고가타부타개입하지않는다.그런데독자는작품을읽다보면숨겨진목소리가무엇일지찾게된다.그렇게이야기를들려주는작가의목소리에서작가의천성을가진친구를발견할수있었다.

다만30년전에쓰인문체라요즘추세인단문은아니다.그래서읽기가만만치않을수있다.그러나복문이기에발휘되는유려하고밀도높은서술방식은당시의세계관을반영하고기록하는의미도있다.곱씹어보면요즘글에서찾기어려운깊은여운도준다.

돌담넘어꽃잎을흩뿌리는백일홍나무의표상

책표지에백일홍나무와돌담이펼쳐져있다.백일홍나무는친구의소설에자주등장하는상징적소재라삽화로했다.‘말이서있는것이지실제로는누워있다고표현해도그다지어색하지않을정도로기묘한형상을한나무였다.비비틀리고꼬인가지들은하늘로오르기보다는옆으로내뻗치기를훨씬좋아했다.뿌리는분명돌담밖에있지만,내다리통만한굵기의가지가돌담을불쑥뚫고들어와잔잔하고여린붉은꽃잎들을마당구석에흩뿌리고있었다.부잣집정원에서꽃을피웠더라면수백만원의가치는족히발휘했을법한이백일홍은식구들그누구의관심도못받은채로제몸을이리저리비틀며자라고있었다.’「구들밑에일군밭」에서표현된백일홍나무의모습이다.그런데작품에나온그나무는작가의어린시절고향집의나무를형상화했다고한다.

작품에서표현된백일홍나무는작가가추구하는삶의표상같다.돈으로환산되는부잣집정원에서꽃피우지않는나무.하늘로치솟는자기과시보다옆으로내뻗치기를좋아하는나무.자신이내린뿌리를넘어서돌담넘어도꽃잎을뿌려주는나무.누구의관심을못받아도이리저리비틀며자라는나무.그나무는홀로고고한가치를추구하기보다는자기주변에한없는관심을기울이고세상과맞부딪치며성장하면서자신이가진재능과열정을함께나눌줄아는친구이자작가의모습과겹친다.

「꽃이진자리」에서인물이씨는난만하게흩어진꽃잎과뭉크러진꽃잎들을‘낙화의시신’이라고말한다.그리고정성스럽게그시신들을흙에안장한다.이런인물의행위는하나하나의존재를알뜰하고애틋하게대하는작가의삶의가치가표현된것이리라.그리하여꽃이진자리에서새로운생명을피우게될것이다.나는작가가살아온삶의내력이좋은이야기를만든밑바탕이되었다고생각한다.그이야기들을잘품는다면우리각자는새로운이야기를만들수있을것이다.
(신효선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