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 반유신 민주화 운동, 김대중 납치와 인혁당 사법 살인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 반유신 민주화 운동, 김대중 납치와 인혁당 사법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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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박정희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
어떻게 이런 일까지 저지를 수 있을까”

인혁당 재건위·민청학련 사건 관계자
대법 판결 하루도 안 돼 8명 학살

‘반유신 민주화 운동’ VS ‘박정희의 유신 체제 수호 의지’
저자

서중석

저자서중석은1948년충남논산에서출생했다.서울대학교국사학과를졸업하고,연세대학교대학원에서석사학위를,서울대학교대학원에서박사학위를받았다.1979년부터1988년까지동아일보기자로재직했으며,6월항쟁당시《신동아》취재기자로역사적현장에서그날의사건들을생생히목격하고기록했다.현재성균관대학교사학과명예교수이며역사문제연구소이사장,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상임공동대표,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을맡고있다.
주요저서로《80년대민중의삶과투쟁》《한국근현대민족문제연구》《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1·2》《신흥무관학교와망명자들》《남북협상:김규식의길,김구의길》《조봉암과1950년대》(상·하)《비극의현대지도자》《배반당한한국민족주의》《이승만의정치이데올로기》《한국현대사60년》《이승만과제1공화국》《대한민국선거이야기》《지배자의국가민중의나라》《6월항쟁》《사진과그림으로보는한국현대사》등이있다.

목차

책머리에
연표

첫번째마당:
체육관대통령취임전에이미
반유신투쟁은시작됐다

두번째마당:
박정희의지시나묵인없이
김대중을납치할수있었을까?

세번째마당:
공작목표,
김대중살해였나단순납치였나

네번째마당:
진상조사막고자작극설유포
국내언론,일제히일본언론공격

다섯번째마당:
박정희-다나카,4억엔검은거래?
진상규명방해한일본정부와만주인맥

여섯번째마당:
개헌운동에맞서긴급조치발동,
폭압의민낯드러낸박정희

일곱번째마당:
프락치출신박정희는어떻게
민청학련에공산주의낙인을찍었나

여덟번째마당:
박정희는왜‘사법살인’수사를
굳이직접챙겼을까

아홉번째마당:
앞줄사형,다음줄무기
공판조서까지조작해중형선고

열번째마당:
지주교도구속하고변호사도구속하고
박정희의오기와착각

열한번째마당:
묘한시점에터진8·15저격사건
미궁에빠진숱한의혹들

열두번째마당:
박정희의집요한일본책임론과반일운동
왜일본·미국은문세광사건에비협조적이었나

열세번째마당:
‘반쪽짜리들러리정당’신민당
‘선명야당’내세운김영삼등장

열네번째마당:
광고로언론탄압한박정희정권,
격려광고로받아친민주시민들

열다섯번째마당:
부정으로얼룩진“국민투표독재”,
박정희“신은나에게또다시중책을”

열여섯번째마당:
한대학상대로긴급조치7호발동,
병영국가에죽음으로항거한김상진

열일곱번째마당:
대법판결하루도안돼8명학살
사법살인에시신까지강탈한유신권력

나가는말

출판사 서평

1972년10월17일유신쿠데타가일어났다.박정희는그날쿠데타를일으키고한사람이모든권력을거머쥔유신체제를탄생시켰다.박정희는유신체제를수호하기위해온갖수단방법을동원했다.그래서이시기에는야당등정치세력이제대로된역할을할수없었다.곧의회민주주의가존재하기어려웠던시기였고,국회는박정희가요구하는대로유신체제를떠받쳐주는역할이상을하기가어려웠다.그런의미에서유신체제는우리역사의암흑기라할만하다고서중석교수는말한다.
그렇지만유신체제에목숨을걸고반대하는세력도있었다.서중석교수는유신체제시기의정치사가“무슨수단방법을써서라도절대적으로유신체제를수호하겠다는박정희의의지와‘유신체제는도저히용납할수없다.이건있을수없는헌정유린행위이다.이런체제는타도해야한다’라고역설하면서그것에맞선투쟁,반유신운동을벌인세력의싸움이었다”고말한다.한국현대사연구의권위자서중석교수의《서중석의현대사이야기》12권의주제는바로‘반유신민주화운동’과‘박정희의유신체제수호의지’를다루고있다.곧이책에는학생운동권과종교세력의반유신운동,김대중납치사건,최종길교수의문사,민청학련·인혁당재건위사건,문세광의육영수저격사건,동아일보기자들의자유언론실천선언등박정희의유신체제에일어난다양한사건들이등장하는데,이를통해박정희가얼마나잔인하게민주주의를파괴했는지를샅샅이고발하고있다.서중석교수는유신체제시기에일어난이다양한사건들을자세히들여다보는의미에대해다음과같이말하고있다.“유신체제의중요한사건들이왜그런형태로일어났는가를살펴보는것은오늘의시점에서박정희신드롬으로인한우리사회의어려움을치유하는데에도,현재우리정치를이해하는데에도,그리고미래를열어나가는데에도대단히중요하다고본다.”

유신체제등장과함께시작된저항운동

박정희는1972년10월17일유신쿠데타라는국가변란을일으킬때까지자신의1인강권체제에저항하거나비판적인세력을계속탄압했다.학원을병영화하는작업이1969년3선개헌이후본격화됐고,1971년10월위수령을발동해반독재운동을이끌어갈세력을철저히제거했다.또한언론탄압으로3선개헌을전후해언론을무기력하게만들었고,역시1971년에언론계저항세력을무력화했다.야당에대해서는유진산세력을계속지원해분열공작을강화했다.그리고10·17쿠데타를일으키자마자강성야당의원들을잔혹하게고문한다음구속했다.
이때문에박정희1인강권체제에대한도전은어디에서도나타날것같지않았다.그렇지만유신체제가출현하는순간부터학생들과종교인들이들고일어났다.그것에이어반유신민주화운동이활발하게전개되며유신권력을위협했는데,본격적인반유신투쟁은박정희유신권력의민낯이그대로드러난김대중납치사건이나면서봇물터지듯터져나오게된다.
첫시작은1972년12월고려대에서일어났다.고려대정문에걸려있던“한국적민주주의이땅에뿌리박자”는현수막을학생들이불태워버린것이다.이듬해고려대학생들은《민우》라는지하신문을만드는등다양한형태로저항했다.그러나학생들은곧간첩단사건등으로대거구속되고만다(민우지사건,검은9월단사건).이와함께전남대학생들도지하신문《함성》을배포하며저항운동을펼쳤고(이강,김남주등구속),기독교세력들도1973년4월22일남산부활절연합예배를열며저항운동에동참했다(박형규목사등구속).

유신체제를뒤흔든‘김대중납치사건’

그리고1973년8월유신체제의성격을적나라하게드러낸사건으로서국내외에큰파장을불러일으킨‘김대중납치사건’이일어난다.김대중은야당의주요인사였을뿐만아니라1971년대선때아깝게떨어졌고,박정희이후의정치를맡을만한사람이이라고평가를받던사람이었다.그래서김대중납치사건의파장은국내외로대단히클수밖에없었다.이때문인지이사건은유신체제를뒤흔드는계기로작용했다.곧국내에서이사건을계기로반유신운동이광범위하게일어나게된것이다.
김대중납치사건과관련해서,김대중납치를누가지시했는가를놓고오랫동안논란이많았다.그러나박정희정권쪽에서는끝까지박정희는‘그런지시를하지않았고,아무것도몰랐다’고주장했다.이에대해서중석교수는“박정희집권18년을살펴보면중요한모든사건중에서사실박정희지시없이일어난게있느냐하는생각을갖게한다”며“여러가지를고려할때이사건은박정희대통령과무관하게일어난사건이라고보기가어렵다는생각이든다”고말하고있다.
김대중납치사건은일어난지40년이넘었지만풀리지않은의문점이여전히많은사건이다.그러한의문점에는일본정부와관련된것들도있다.일본정부는박정희정권과밀착해박정희정권에게유리한방향으로일을처리했다는비판을면키어렵다.특히그배후에는박정희의만주인맥이움직이고있었던점도명백히주시해야한다.

걷잡을수없이퍼진유신반대운동,그리고긴급조치

김대중납치사건이일어나자저항운동은걷잡을수없이광범위하게일어난다.1973년10월납치사건이일어난지두달이채안된시기에서울대문리대에서시위가일어났고,이시위는여러대학으로번졌다.11월에는종교인,언론인,지식인등15명시국선언발표를했고,이어서동아일보기자들이언론자유수호제2선언문을채택해저항했다.12월에는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가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을벌였다.
이렇게유신헌법을바꾸라는요구가커지는속에서,1월8일박정희는긴급조치1호와2호를발동했다.긴급조치1호는대한민국헌법,즉유신헌법을부정,반대,왜곡또는비방하는일절의행위를금한다고하면서,이러한긴급조치를위반한자또는비방한자는법관의영장없이체포,구속,압수,수색하며15년이하의징역에처한다는내용이었다.긴급조치위반자를비상군법회의에서심판,처단했는데2호는그러한비상군법회의설치에관한것이었다.
긴급조치1호,2호에의해유신체제시기의대부분을차지하는‘긴조시대’가드디어열린다.유신헌법이헌정을유린하는억압과폭압의시대를열었는데,그것이긴급조치에의해한층더구체화된것이다.긴급조치가발동됐는데도그것을반대하는움직임은계속됐다.그러면서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을주도한장준하와백기완이첫번째로체포되고,이후수많은사람들이구속되었다.그런가운데대형사건으로사람들뇌리에남아있는민청학련사건,인혁당재건위사건이일어나게된다.

“있을수없는판결”-민청학련·인혁당재건위사건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과인혁당(인민혁명당)재건위사건(2차인혁당사건)은유신체제를다룰때빠지지않는사안이다.그만큼유신체제에서일어난사건들을대표할만한사건으로꼽힌다.그리고그두사건은긴밀히연결돼있다.
박정희는1974년4월3일밤“반체제운동을조사한결과,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불법단체가불순세력의조종을받고있다는확증을포착하였다”고발표하면서긴급조치제4호를발동했다.그러면서민청학련관련자1,204명을연행,조사했고그중253명을비상군법회의에송치해서180명을기소했다.
이어박정희정권은박정희정권은인혁당재건위사건을터트린다.서도원,도예종등이1969년경부터지하에흩어져있는(제1차)인혁당등의잔재세력을규합해인민혁명당을재건했다는것이었다.그리고여정남으로하여금반정부학생과접촉하게했고,공산주의사상을가진학생들이정부를전복하고공산정권을수립하려는것을알고서그들을격려하고민중봉기를위한방법등을교시했다는것이었다.곧인혁당재건위가민청학련을배후에서조종했다는것이다.
민청학련사건과마찬가지로인혁당재건위사건또한완전한조작품이었다.조직의실체도없는데무진고문이가해졌고,재판전에가족과도면회를할수조차없었다.심지어사건관련자들을변호하는변호사까지구속하기도했다.수시로인권을침해하는물론법적인절차까지무시한수사였다.
1974년7월8일인혁당관련자로기소된22명중21명에대한결심공판이열렸다.이날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7명에게사형,8명에게무기징역,6명에게는징역20년형을구형했다.군인들은군법회가구형한대로판결했다.2심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두사람만형량이변동됐을뿐사형판결을받은7명을포함해나머지사람들의형량은똑같았다.그리고1975년4월8일대법원에서인혁당사건에대한판결을내렸는데,인혁당재건위관련사건으로재판을받은22명중7명의사형판결이그대로확정되고민청학련관련사건으로재판받은여정남도사형이확정됐다.
“있을수없는판결이었다.비상군법회의의군인들이아닌민간인들조차,그것도대법원판사들이그런있을수없는판결을했다는것은말이안되는일이었다.13명의대법원판사들이허둥지둥일어서서나갈때법정은부인들의절규와분노로아수라장이됐다.사형판결을받은7명의부인등여성들과제임스시노트신부,2명의개신교선교사들은법정을떠날것을거부하며2시간을버텼다.”
엄청나게놀라운일은대법원판결다음날새벽에또다시일어났다.대법원확정판결이있은후19시간이채되지않은4월9일새벽4시55분에서도원부터차례로오전8시30분까지여덟사람이법의이름으로학살된것이다.어떻게이런일이벌어질수있었을까?서중석교수는이렇게말한다.“긴급조치4호선포,그리고그와함께발표한특별담화를보면박정희가유신체제를수호하기위해서는극단적인행위도마다하지않겠다는결의를굳게다졌던것으로보인다.”박정희가이시기에유신수호를위해특단의조치를취한일련의행위중하나로봐야한다는것이다.

박정희가한국사회에미친악영향

박정희는유신체제를지키기위해서그어떤일도서슴지않고벌였다.인혁당재건위사건관련자들을대법원판결이난지하루도안돼학살한것은물론,갖은색깔론으로저항운동을말살시켰다.곧자신의1인독재체제에반대하는세력은그누구도가리지않고잔인하게짓밟은것이다.
영구히존속할것만같았던박정희의유신체제는7년으로끝이난다.그러나그때문에한국인들은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엄청난비용을치러야했다.그러한비용부담이1979년10·26으로끝난것도아니다.그후유신체제의서자격인전두환체제로이어지면서또다시큰고통을받게된다.그뿐아니라2000년대에박정희신드롬이불면서다시한번어려움을겪는다.박정희신드롬은이명박·박근혜정권을출현하게하는등민주주의진전에암적요인으로작용했지만,단순히민주주의에대한저해요인으로만작용한게아니다.한국인의정신과생활모든면에치유하기힘든어려움,남북관계나정치,경제분야에서계속해악영향을끼쳤다.따라서이책에서다루는유신체제의여러사건은과거에만머무는것이아니라지금한국사회와도큰관련이있다.그래서이시대를돌아보고성찰하는것은우리사회의어려움을치유하는데에도,현재우리정치를이해하는데에도,그리고미래를열어나가는데에도대단히중요한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