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국민의 탄생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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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일본은 왜 청일전쟁을 일으켰는가?
일본 민중은 어떻게 ‘국민’이 되어 전쟁에 협조했는가?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조선은 왜 최대 희생자를 내야만 했을까?

민중, ‘국민’이 되어 전쟁에 협력하다

청일전쟁 통사를 다룬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기존 청일전쟁 관련 책과 몇 가지 차별점이 있다. 그동안 국내에 출간된 책들은 주로 정치, 외교, 군사적 관점에서 청일전쟁을 다뤘지만, 이 책은 언론과 민중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국민’을 탄생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이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청일전쟁은 근대 일본이 치른 첫 대외 전쟁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경제의 근대화와 함께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청일전쟁은 왜 시작되었던 것일까? 당시 일본의 민간인이자 지식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일전쟁을 가리켜 문명국인 일본과 야만국인 청의 전쟁, 즉 “문야文野의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언론을 통해 전쟁 지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스스로 군사 헌금 조직화의 선두에 서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국민도 이 주장들을 받아들였다. 곧 ‘문명 전쟁’론이나 ‘문야의 전쟁’론은 국민의 내셔널리즘과 전쟁 협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저자는 이처럼 정치인, 지식인, 민간인이 하나가 되어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민간인들은 ‘국민’이 되어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전장에서 병사·군부로서 전쟁을 체험했고, 후방 지역 사회에 남은 압도적 다수는 다양한 언론 매체가 전하는 정보를 통해 전쟁을 ‘체험’했다. 이들의 전쟁 ‘체험’과 전후의 전몰자 추도, 또한 전쟁 중에 친숙해진 ‘군인 천황’상에 대한 숭배를 통해 근대 일본의 ‘국민’이 형성되어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오타니 다다시 교수는 일본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미디어사를 전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 정부의 대외 언론 공작과 당대 일본 언론들의 모습, 국민들이 이런 언론을 어떻게 대하는지 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또 당시 일본 정치를 책임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나 무쓰 무네미쓰를 다른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곧 이들이 당시 펼쳤던 정치와 외교가 어떤 것이었나를 살피면서, 과연 청일전쟁이 꼭 일어나야 했던 전쟁이었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정치인, 지식인, 민간인 등의 협력 관계를 살피면서 전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도 질문하고 있다.
당시 일본 군인들의 모습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와 전투를 하고, 중국 대륙에 진출한 상황, 그리고 대만을 점령한 상황들이 세세하게 나와 있다. 일본군이 저지른 ‘조선 왕궁 점령 사건’이나 ‘뤼순 학살 사건’을 다루면서 일본의 ‘역사 위조’를 지적한 점도 다른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은 1894년 7월 23일 조선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구속했다. 이 사건을 일본의 역사에서는 먼저 사격을 가한 조선군에 일본군이 반격해서 왕궁을 점령한 자위적·우발적 사건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견해가 명백한 ‘위조’라고 말하면서 일본 공사관과 혼성 여단이 사전에 계획해서 실행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뤼순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도 일본 역사에서는 부정되거나 규모를 축소하고 있는데, 이 사건을 상세히 다루면서 뤼순 학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문제는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저자

오타니다다시

지은이:오타니다다시(大谷正)
1950년,일본돗토리현출생.오사카대학문학부를졸업했으며,같은대학교에서박사학위를받았다.1982년에센슈대학법학부강사,조교수,교수를거쳐,2010년부터센슈대학문학부역사학과교수로재직중이다.전공은일본근대사.미디어사.주된저서로《근대일본의대외선전》(1994),《병사와군부의일청전쟁》(2006)등이있다.  

옮긴이:이재우
1989년전북익산출생.해군부사관(하사제대)으로근무했고2018년현재는서울에거주하면서역사,사회,문학등에관심을가지고공부를하고있다.특히최근의미국과중국의대립등을보며청일전쟁,러일전쟁등에대한책과영상물등을수집하고있다.  

목차

머리말
청일전쟁관련연표

제1장|전쟁전야의동아시아

1.조선의근대와톈진조약체제
‘속국’과‘자주국’|개화정책과임오군란|청일의대응|갑신정변-급진개화파의쿠데타실패|조슈파와사쓰마파의대립|톈진조약과일본,청,영국의협조체제|극동러시아-이미지와실상

2.일본과청의군비확장
청의군비근대화-회군의팽창|북양해군의근대화|임오군란이후일본의군비근대화|우선시된해군의군비확장|육군,7개사단체제로|육해군연합대연습|참모본부의대청전쟁구상의형성

제2장|출병에서전쟁으로

1.갑오농민전쟁과청일양국의출병
제2차이토히로부미내각의성립|이토내각의고난-조약개정과대외경파|갑오농민전쟁-동학의확대와봉기|조선정부의파병요청|청과일본의출병

2.갈피를잡지못하는청일정부
청일양군의조선도착|이토수상의협조론,무쓰외상의강경론|제1차절교서와영국·러시아의간섭|청정부내의주전론과개전회피론

3.전쟁이시작되다.
7월19일의개전결정|풍도해전|조선왕궁무력점령|혼성제9여단의남진|성환전투|선전조서를둘러싼혼란-전쟁은언제시작되었나?|개전에대한메이지천황의생각

제3장|한반도점령

1.평양전투
전쟁지도체제|단기전에서장기전으로|제5사단본대,조선으로|짐을옮기는병사의부족-“수송의한계”|제3사단의동원|노즈제5사단장의평양공격결의|청과일본의무기차이|격전-혼성제9여단의정면공격|평양점령과청군의패주

2.황해해전과일본정세
9월17일의조우|승리-과도기의군사기술과제해권확보|메이지천황과히로시마대본영|대본영어전회의|청일전쟁와중의총선거|히로시마에서열린제7임시의회

3.갑오개혁과동학농민군섬멸
갑오개혁-친일개화파정권의시험|이노우에가오루공사부임과조선의보호국화|제2차농민전쟁-반일·반개화파|동학농민군에대한제노사이드

제4장|중국침공

1.일본군의대륙침공
제1군의북진과청군의요격체제|압록강도하작전|가쓰라사단장과다쓰미여단장의독주|제2군편성-뤼순반도공략으로|무모한뤼순공략계획

2.‘문명전쟁’과뤼순학살사건
구미의눈과전시국제법|뤼순요새공략작전|11월21일,어둠속의뤼순점령|학살-서로다른사건의모습|왜일본군은학살행위를벌인것인가?-병사의종군일기를읽다|서양각국에대한변명공작

3.동계전투와강화제기
제1군과대본영의대립|야마가타제1군사령관경질|제1군의하이청공략작전|랴오허평원의전투|산둥작전과대만점령작전|산둥작전으로북양해군궤멸

제5장|전쟁체험과‘국민’의형성

1.언론과전쟁-신문,신기술,종군기자
조선으로향하는신문기자들|강화되는언론통제|국민의전쟁지지와정보개시|신기술도입과《아사히신문》의전략|《아사히신문》의취재체제|고급지《시사신보》의전쟁보도|아사이주와‘화보대’|《국민신문》과일본화가구보타베이센부자|사진과회화의차이|가와사키사부로의《일청전사》전7권

2.지역과전쟁
의용병과군부|군부모집|병사의동원과환송|전장과지역을연결한지방지|《후소신문》기자스즈키게이쿤|성황이었던전황보고회|개선,귀국과사람들의환영|추도와위령-‘선별’과도호쿠의사정|후쿠시마현청문서가남긴‘지역과전쟁’|동원과전시사무-정·촌장들의‘근무평정’|청일전쟁과오키나와|그후의오키나와

제6장|시모노세키강화조약과대만침공

1.강화조약조인과삼국간섭
직례결전준비|정청대총독부의이동|강화전권사절에취임한이홍장|교섭개시와이홍장에대한테러|청의고뇌와조약조인|삼국간섭-러시아,독일,프랑스의랴오둥반도환부요구|랴오둥반도반환과‘와신상담’

2.대만의항일투쟁,조선의의병투쟁
대만총독부와‘대만민주국’|증파되는일본군|남진작전수행에대한격렬한저항|‘대만평정선언’이후에도끝나지않은전투|민비살해사건|항일의병투쟁과아관파천

종장|청일전쟁이란무엇이었을까?
전쟁의규모|전쟁상대국과전쟁의계속기간|누가,왜,개전을결단했는가?|미숙한전시외교|곤란한전쟁지도|전비와청일의전후경영

후기
참고문헌
옮긴이의말

출판사 서평

일본은왜청일전쟁을일으켰는가?
일본민중은어떻게‘국민’이되어전쟁에협조했는가?
청일전쟁후동아시아는어떻게달라졌는가?
조선은왜최대희생자를내야만했을까?

민중,‘국민’이되어전쟁에협력하다


청일전쟁통사를다룬《청일전쟁,국민의탄생》이출간되었다.이책은기존청일전쟁관련책과몇가지차별점이있다.그동안국내에출간된책들은주로정치,외교,군사적관점에서청일전쟁을다뤘지만,이책은언론과민중의관계를중점적으로다루며청일전쟁의전과정을다루고있다.그러면서저자는청일전쟁이일본의‘국민’을탄생시켰다고말하고있다.즉근대적인의미의국민이이시기에형성되었으며,이국민들의적극적인협력이있었기에전쟁이일어났다고말하고있다.
청일전쟁은근대일본이치른첫대외전쟁이었다.청일전쟁이후일본은경제의근대화와함께군국주의의길을걷기시작했다.그렇다면청일전쟁은왜시작되었던것일까?당시일본의민간인이자지식인이었던후쿠자와유키치는청일전쟁을가리켜문명국인일본과야만국인청의전쟁,즉“문야文野의전쟁”이라고주장했다.그는언론을통해전쟁지지를표명함과동시에스스로군사헌금조직화의선두에서는등적극적으로전쟁에협력했다.국민도이주장들을받아들였다.곧‘문명전쟁’론이나‘문야의전쟁’론은국민의내셔널리즘과전쟁협력을촉진하는역할을했다.저자는이처럼정치인,지식인,민간인이하나가되어적극적으로협력했기때문에전쟁이일어날수있었다고말한다.특히민간인들은‘국민’이되어전쟁에적극적으로나서기시작했다.“어떤이는전장에서병사·군부로서전쟁을체험했고,후방지역사회에남은압도적다수는다양한언론매체가전하는정보를통해전쟁을‘체험’했다.이들의전쟁‘체험’과전후의전몰자추도,또한전쟁중에친숙해진‘군인천황’상에대한숭배를통해근대일본의‘국민’이형성되어간것이다.”
이책의저자오타니다다시교수는일본근현대사,그중에서도미디어사를전공했다.그렇기때문에이책의후반부에서다루고있는일본정부의대외언론공작과당대일본언론들의모습,국민들이이런언론을어떻게대하는지등을잘묘사하고있다.
또당시일본정치를책임지고있던이토히로부미나무쓰무네미쓰를다른관점에서비판하고있는점도이책의장점이다.곧이들이당시펼쳤던정치와외교가어떤것이었나를살피면서,과연청일전쟁이꼭일어나야했던전쟁이었는지를질문하고있다.정치인,지식인,민간인등의협력관계를살피면서전쟁책임은누구에게있는지도질문하고있다.
당시일본군인들의모습들을자세히다루고있는점도이책의장점이다.일본군이조선에들어와전투를하고,중국대륙에진출한상황,그리고대만을점령한상황들이세세하게나와있다.일본군이저지른‘조선왕궁점령사건’이나‘뤼순학살사건’을다루면서일본의‘역사위조’를지적한점도다른책에서는찾아볼수없다.일본은1894년7월23일조선경복궁을점령해고종을구속했다.이사건을일본의역사에서는먼저사격을가한조선군에일본군이반격해서왕궁을점령한자위적·우발적사건으로설명했다.그러나저자는이견해가명백한‘위조’라고말하면서일본공사관과혼성여단이사전에계획해서실행한사건이라고말하고있다.마찬가지로뤼순에서저지른학살사건도일본역사에서는부정되거나규모를축소하고있는데,이사건을상세히다루면서뤼순학살사건이왜일어났는지,문제는무엇인지를밝히고있다.

청일전쟁은언제시작되어언제끝났는가?

보통한국역사에서는청일전쟁을“1894~1895년조선의지배를둘러싸고중국(청)과일본간에벌어진전쟁”이라고규정하고있다.즉1894년8월1일일본이청에선전조서를공포하면서전쟁이시작되었고,1895년4월17일시모노세키강화조약이체결되어전쟁이종료되었다는인식이다.그러나저자는전쟁개전시기와종결시기에대해문제점을지적하면서이와같은관점은“옛날교과서와같은인식”이라고말한다.그리고여러연구들을종합한결과다음과같이결론을내린다.
광의의청일전쟁은전투대상과지역이세개(조선,중국,대만)인복합전쟁이며,1894년7월23일일본군의조선왕궁공격으로시작되었다.전쟁이끝난시기는청과의전쟁은1895년3월30일휴전조약조인으로전투가정지되고,시모노세키강화조약조인과비준서교환으로5월에법적으로종료되었다.하지만조선과의전쟁및대만주민과의전쟁은시모노세키강화조약으로종료되지않았을뿐만아니라11월18일의대만평정선언으로도,1896년4월1일의대본영해산으로도종결되지않았으며전투의양상을바꾸면서실질적으로계속되었다고말한다.즉조선과의전투는갑오농민전쟁진압으로끝나지않았으며,그이후의의병투쟁으로계속되며,청과의전쟁이종료된이후에도이어진다는것이다.마찬가지로대만에서도일본군에저항하는무력투쟁은오랫동안지속되었기때문에저자는광의의청일전쟁은종결기간이애매한전쟁이라고말하고있다.

누가,왜전쟁을일으켰는가?
전쟁에대한책임은누구에게있는가?


당시일본정치는어지러웠다.1890년11월25일일본에서처음으로제1회제국의회가소집되었다.초기의회에서는번벌정부와자유당및입헌개진당등의민당(반정부세력)이대립해정부가제출한예산안은잇달아민당측에의해삭감되었다.이런상황에서1892년8월,제2차이토히로부미내각이성립했다.이토내각도마찬가지로조약개정과예산안등으로민당측과계속대립했고,결국두번이나의회를해산하면서까지정권을유지했다.1년도지나지않아두번이나의회를해산하는행위로사실상헌법정지상태가될가능성마저있었으며,또이토내각은앞으로다가올총선거결과에자신감이있었던것도아니었다.이런와중에조선에서갑오농민전쟁이일어났고,조선은청에게파병을요청했다.일본도이에질세라톈진조약을근거로들며곧바로조선에파병했다.
청일전쟁은정말필연적으로일어나야했던전쟁이었을까?저자는그렇지않다고말한다.그렇다면전쟁에대한책임은누구에게있는가?조선에파병할때까지만해도이토히로부미는전쟁을피하려고했다.오히려청과의협조를유지하면서조선에서얻는권익을유지하자는입장이었다.그러나조선에파병이되자대내외적으로전쟁을하라는압박을받았다.각종저널리즘과국민,심지어민당측에서도전쟁을해야한다고부추겼다.그리고결국이토는국내의정세를극복하고자전쟁을결심하게된다.저자는당시수상이었던이토히로부미가전쟁개전에대한책임이가장크다고말한다.그가전쟁을결심하지않았다면청일전쟁은일어나지않았을지도모른다.그리고외교의책임자였던무쓰무네미쓰의책임도무시하지못한다고말한다.저자는무쓰무네미쓰가자신의외교실패를만회하기위해전쟁을주장했다고비판한다.육군을비롯한군부세력은그이전부터전쟁을준비하고있었으니당연히전쟁개전책임이클수밖에없다.
저자는자유민권운동을추진했던민당세력또한전쟁에대한책임이크다고비판한다.민주적인정치운영을요구하며정부를비판해왔던민당이어느순간부터전쟁을부추기는세력이되었으며,청일전쟁개전과그후일본의제국화에큰책임이있다고지적한다.“예전에‘정비절감,민력휴양’을주장하던민당세력의다수는청일전쟁중에전쟁승리에열광했고,청일전쟁이후에는정부와군이확립한아시아에대한군사침략노선에동조하여국민에게부담을지우는증세와공채모집을승인했다.그대가로민당이받은것은청일전쟁이전부터보였던번벌정부와의제휴가한층강화된것과번벌정부가독점하던행정부에참가하게된것이었다.”
또한당시의저널리즘과국민들도전쟁을부추기고전쟁에적극가담했다.언론들은선뜻전쟁결심을하지못하는이토내각을비판했고,국민들또한의용병운동을일으키면서전쟁에적극협력했다.정치적인민주화를요구한재야세력또한예외는있었지만,번벌정부이상으로침략적이었다고저자는지적하고있다.

청일전쟁최대희생자는동학농민군
뤼순학살사건의진실


“앞으로의연구를기다려야하는부분이남아있지만,청일전쟁에서최대의희생자는조선에서발생했을가능성이높다.”
저자는청일전쟁전기간을통틀어가장많은희생자가동학농민군에서나왔다고말한다.동학농민군은당시총에맞아죽거나,칼로찔려죽거나,부상을입어죽어나갔다.저자는전체희생자가3만명이훨씬넘는것은확실하며그외에사망한경우등을추가하면5만명에육박할것이라고말하고있다.
책에는동학농민군을진압하기위한일본군의전략이자세히나와있다.당시일본군의목적은동학농민군을“모조리살육”하는것이었다.이를명령한사람은가와카미소로쿠육군참모차장이었다.당시일본군을이끌던그는대표적인주전론자였고,청일전쟁당시대본영에서전쟁지도를사실상주도한인물이기도하다.1894년11월제2차갑오농민전쟁이일어났고,농민군은한때일본군의병참선과전신선을파괴하기도했다.그러자가와카미는동학농민군과그들을지원하는조선농민에대한제노사이드적인살육을명령했던것이다.
원래일본정부는청일전쟁이라는무대에서일본군이전시국제법을준수한‘문명전쟁’을수행할수있는능력을가졌음을보여주려고했다.그러나현장에서는잘통하지않았다.동학농민군학살처럼잔인한학살이중국뤼순에서도일어났다.저자는당시병사가쓴종군일기를통해일본군의잔혹성을밝히고있다.아군의시체를목격한병사들은흥분해서적을“모두죽이기”로하거나복수하겠다는말을종군일기에남겼다.그러나상급지휘관이그런행위를엄격히금지했다면학살사건은그정도로중대해지지않았을것이다.그런데오히려상급지휘관은병사들에게학살을부추겼다.한병사는“야마지장군으로부터다음과같은명령이있었다.……앞으로는토민土民이라할지라도아군을방해하는자는남김없이죽이라는명령이다”라고기록했다.또다른병사는“집합지를출발할때,남자로서장정인청나라사람은모두놓치지말고,살려두지말고모두죽이라는명령이내려졌다.모든병사들이용기가넘쳤다”라고썼다.“지나支那병을보면가루로만들고싶어했고,뤼순시내에있는사람을보면모두죽였다.그때문에도로등은죽은자들만있어서행진하기에도불편하다”라고종군일기에묘사된것처럼뤼순에서무차별살해가벌어졌던것이다.저자는이런학살사건이“단순히적의잔학행위에대해서하급장교나하사관과병사계층이흥분해서보복을했다는우발적사건에머무르지않는,일본군의조직자체에서유래해청일전쟁시점에벌어진구조적사건”으로봐야한다고지적하고있다.

언론과국민들의전쟁협력
민중은국민이되어국가와함께싸웠다


이책의백미는단연제5장<전쟁체험과‘국민’의형성>에잘나와있다.이장은당시일본의사회사를서술하고있다.전쟁정보가언론에의해서어떻게사람들에게전해졌는지당시의언론상황을자세히다루고있으며,전쟁정보수용을통해서민중들이‘일본국민’으로서어떻게공통의식을가지게되었는지를파헤치고있다.
당시일본언론은정부를비판하는입장이었다.그래서이토내각은초고검열제,납본제등을실시하며언론을통제했다.그러나점차일본군이전쟁에서승리를하게되자정부는오히려언론을이용하기시작했다.일본군이황해해전에서승리하자그때부터승전소식을언론에알려주기시작한것이다.언론들은전쟁현장에종군기자와화가들을파견해전쟁소식을더생생하게전달하려고노력했고,전쟁정보를전달받은독자들은차츰언론의내용에적극호응하며‘일본국민’으로서전쟁을바라보게되었다.책에는당시언론현황,기자와화가들의활약상,독자들의반응등이상세하게소개되어있다.언론은좀더많이,좀더상세하게전쟁정보를전달하려고노력했고,이를성공적으로이룬언론사는급속도로성장했다.독자들또한전쟁정보를통해국가와개인을하나로여기는풍토가만들어졌다.“지역신문은종군하는사람들에게가장사랑받는위문품이었고,전장과지역후방사회사이에정보를전달하는파이프였다.이파이프를통해서전장과지역후방사회는정보가교환되어서로를자극했고,전장의체험이일반화되어지역신문의독자에게공유되었던것이다.”
《후소신문》기자스즈키게이쿤은4회에걸쳐전장에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