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 (유신 체제 붕괴, 김재규는 배신자인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 (유신 체제 붕괴, 김재규는 배신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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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4권~15권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유신 독재의 몰락 과정을 자세히 분석한다. 서중석 교수는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12·12총선을 박정희 정권이 종말로 치닫게 되는 분수령으로 꼽는다. 12·12선거는 유신 체제, 그중에서도 긴급 조치 9호 아래 치러진 선거였다. 그런 만큼 당연히 정치적 발언이 엄격히 제한됐다. 하지만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거론하거나 나름대로 공약을 하는 것은 허용됐다. 또한 돈 선거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금품을 풍성하게 쓰는 것도 묵인했다. 그렇게 12·12선거는 민심의 이반을 잘 보여준 선거가 됐다.
저자

김덕련

지은이:서중석
1948년충남논산에서출생했다.서울대학교국사학과를졸업하고,연세대학교대학원에서석사학위를,서울대학교대학원에서박사학위를받았다.1979년부터1988년까지동아일보기자로재직했으며,6월항쟁당시《신동아》취재기자로역사적현장에서그날의사건들을생생히목격하고기록했다.현재성균관대학교사학과명예교수이며역사문제연구소이사장,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상임공동대표,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을맡고있다.

주요저서로《80년대민중의삶과투쟁》《한국근현대민족문제연구》《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1·2》《신흥무관학교와망명자들》《남북협상:김규식의길,김구의길》《조봉암과1950년대》(상·하)《비극의현대지도자》《배반당한한국민족주의》《이승만의정치이데올로기》《한국현대사60년》《이승만과제1공화국》《대한민국선거이야기》《지배자의국가민중의나라》《6월항쟁》《사진과그림으로보는한국현대사》등이있다.  

지은이:김덕련
서울대국사학과를졸업하고,2004년부터2015년까지인터넷신문오마이뉴스와프레시안에서기자로일했다.뿌리깊은나무는바람에쉽게흔들리지않는다는생각으로,현재인문기획집단문사철에터를잡고역사와사회에관한책작업을하고있다.그동안《김기춘과그의시대》를쓰고《서중석의현대사이야기》시리즈를기획·공저했으며《세계를바꾸는파업》,《근현대사신문》(전2권),《세계사와함께보는타임라인한국사》(전5권)를함께쓰고만들었다.  

목차

책머리에
연표

유신체제붕괴

첫번째마당
유신권력에결정타날린부마항쟁
낮에는학생시위,밤에는민중항쟁

두번째마당
“박정희물러가라”와부유층공격이
함께나타난마산항쟁

세번째마당
부마항쟁은김영삼제명때문?
박정희경제파탄이항쟁불렀다

네번째마당
박정희“내가직접발포명령”
차지철“100만~200만죽인다고……”

다섯번째마당
박정희심복김재규
유신의심장을쏘다

여섯번째마당
“간접적이지만중요한”10·26동기,
박근혜·최태민문제

일곱번째마당
박근혜·최순실게이트의기원,
최태민과박근혜의검은유착19년

여덟번째마당
진보언론은왜2012년대선때
최태민문제를제대로파헤치지않았나

아홉번째마당
박정희쏜김재규는
배신자인가

열번째마당
김재규거사를
어떻게평가할것인가

열한번째마당
유신독재는왜
7년만에와르르무너졌나

열두번째마당
유신붕괴재촉한성장제일주의,
투기광풍조장한유신권력

열세번째마당
고도성장이냐,안정화정책이냐
사사건건박정희와신현확경제팀충돌

열네번째마당
박정희만은부패하지않았다?
부정부패악취,18년간진동했다

열다섯번째마당
10·26일어나자아무도유신지지하지않아
대한민국대통령으로부적합한친일경력

나가는말

출판사 서평

유신독재,김재규의총성으로와르르무너지다
김재규거사를어떻게평가할것인가?

박정희는청렴했다?박정희가경제를살렸다?
부정부패악취진동한박정희집권18년

박정희의몰락을상상이나할수있었을까


1970년대중반만해도박정희의유신독재는끝날기미가보이지않았다.당시민주화운동을하던사람들조차박정희가물러나리라는생각을하지못하던시절이었다.1975년박정희는4·29특별담화를발표하면서총력안보운동이라는대대적인동원정치를펼쳤다.다시한국사회는반공물결로뒤덮였고,이어서긴급조치9호가선포되면서국민들의입은철저히봉쇄되었다.또한박정희유신권력은4대전시입법과학도호국단,반상회등을통해학원의병영화뿐아니라전사회·국가의병영화를기민하게이뤄냈다.여기에다포항에서석유가나왔다는박정희의기만적인발표로사람들은오랫동안들떠있었고,중동건설특수가가세하면서경제가호조를보였다.이런시절에어찌박정희유신독재의끝을상상할수있었을까.반유신민주화운동세력은고립을면치못했다.
그렇지만박정희유신독재는1970년대후반들어조금씩몰락의길을걷고있었다.또다시불붙기시작한대학가시위,한미관계뒤흔든코리아게이트,유신붕괴의문을연12?12총선,김영삼의원직날치기제명,박정희치부폭로한김형욱의폭탄증언……무엇보다유신경제의허구성을드러낸YH사건과부마항쟁은박정희유신권력을파국으로몰고갔다.총으로권력을움켜쥔독재자박정희의마지막모습은처참했다.5·16쿠데타를일으킨지18년만에,유신쿠데타를일으킨지7년만에박정희는부하인김재규의총을맞고숨을거두었다.
그렇게강고해보였던유신정권은왜7년만에무너졌을까?독재자박정희는한국사회에무엇을남겼을까?지금도‘박정희가경제를살렸다’‘박정희는청렴했다’고믿는사람들이많다.하지만서중석교수는박정희집권18년은부정부패가만연한사회였다고말한다.박정희가경제를살렸다는말도허구에불과하다고단호하게말한다.YH사건과부마항쟁이일어나게된원인도경제가파탄났기때문이었다.《서중석의현대사이야기》14권~15권은필연적으로무너질수밖에없었던유신독재의몰락과정을자세히분석한다.

12·12선거,박정희유신붕괴의문을열다

서중석교수는1978년12월12일에치러진12·12총선을박정희정권이종말로치닫게되는분수령으로꼽는다.“박정희유신체제몰락의드라마는12·12총선,국회의원의3분의2를선출하는선거였는데이선거에서패배한것에서시작됐다.그렇기때문에난현대사에서중요한사건의하나로1975년총력안보운동과함께1978년12·12선거를꼽고있다.”
12·12선거는유신체제,그중에서도긴급조치9호아래치러진선거였다.그런만큼당연히정치적발언이엄격히제한됐다.하지만경제적,사회적문제를거론하거나나름대로공약을하는것은허용됐다.또한돈선거라는말이나돌정도로금품을풍성하게쓰는것도묵인했다.그렇게12·12선거는민심의이반을잘보여준선거가됐다.
선거결과는놀라웠다.신민당을포함한야당이공화당보다8.5퍼센트포인트나많이득표한것이다.유신체제에서상상하기어려운사태였다.이런결과가나온이유는박정희유신독재에대한염증,경제실패에대한불만때문이었다.당시선거투표율은77.1퍼센트였는데,이는박정희정권전기간중가장높은수치였다.그야말로선거에적극참여해박정희유신정권을심판했던것이다.“12·12선거결과가말해주는아주중요한의미는정치에대한참여의식또는현실정치에대한비판의식과민주화에대한기대,열망같은것이이선거에서나타났다는점이다.”

YH사건,유신체제를파국으로몰고가다

YH사건은부마항쟁과함께박정희유신체제를파국으로몰고간양대사건이다.두사건모두박정희유신경제정책으로말미암은사건인데,결국유신체제가유신경제로인해파국을맞게됐다는걸이두사건은보여준다.서중석교수는YH사건이한국현대사에서아주중요한큰사건이라고말한다.“요즘사람들,특히젊은이들은대부분YH사건이왜그토록중요한사건,큰사건이라고내가얘기하는지이해가안갈것이다.그러나그당시사람들은김영삼이건박정희건기자들이건학생들이건‘이건굉장한사건이다.정말큰사건이다’라는걸잘알고있었다.김영삼과박정희의극한대립이얼마간완화되는것아니냐하는순간에터진대형사건,김영삼과박정희의관계를더이상타협적으로만들수없게한결정적사건이바로YH여성노동자신민당사농성사건이다.이점에서도이사건은중요하다.”
또서중석교수는YH사건의역사적의미에대해서이렇게말하고있다.“YH사건은단순한노동자관련사건이아니었다.특정한업체에서일한여성노동자의투쟁만가리키는게아니라유신체제의성격이고스란히담겨있는중대한사건이었다.사회의여러층에엄청난충격을줬다.특히학생들한테준영향이대단했다.1979년10월15~16일부산대에서나온학생들의선언문이말해주듯이이사건은학생들이부마항쟁을일으키는하나의중요한계기였다.그리고학생들이나중에노학연대를하고1980년대에노동자와함께노동운동을거세게펼쳐나가는데에도전태일분신사건과함께이사건은큰추동력이됐다.”
한마디로YH사건은유신체제의모순과총체적허구성을여지없이드러냈다는점에서매우중요하다.박정희가펼친근대화노선의파탄,박정희경제정책의파탄을극명하게보여준사건이기도하다.

강제진압,그리고김경숙의죽음

YH무역은가발을생산하는업체였다.당시가발기업은수출산업의총아였고,YH무역은그산업의대표기업으로꼽힐정도로잘나갔다.1966년노동자10명으로시작했던기업이불과4년만인1970년에노동자숫자가4,000명을넘어서는기업이됐다.전체기업들의수출순위에서15위를기록할정도였다.그러나곧가발산업은사양산업이되었다.게다가사주는회삿돈을유용했다.무리하게확장한사업도실패했다.그러면서은행빚이눈덩이처럼쌓였다.결국YH무역은1979년3월30일에‘4월30일자로폐업하겠다’는공고문을붙였다.
노조에서는회사를살리기위해여러모로노력하는동시에폐업에맞서강경투쟁을벌였다.이렇게싸우자정부와회사가일단한걸음물러서는듯했다.‘4월30일자폐업’방침을조금변경하는식으로나왔다.그렇지만결국노동자들을속인노동청과경찰서,무책임한회사때문에여성노동자들은거리로쫓겨날상황에놓이고말았다.노동자들은7월30일또다시농성에들어갔다.그러자8월6일회사는폐업을하겠다고다시공고했다.결국여성노동자들은신민당사로가서농성을이어간다.

“거리에내쫓긴저희들은어디로가란말입니까!배고픔과무서움에서벗어날수있는길은정녕없다는말입니까?……배우지못했다고사회에서천대를받고멸시를당하면서도못배운저희들만원망하며저희동생들이나같이는되지않게하기위해서조금의월급이나마용돈을줄여가며저축하면서동생들의학비를보태주고또부모님들의생계와약값에도보탠다는뿌듯한기쁨으로신념과긍지를가지고일해왔습니다.……저희들은부당한것을원하고요구하지는않습니다.다만우리가일할수있는일자리만주시어생계를이어갈수있게만해달라는것입니다.……해결이아니면우리는여기서죽어나갈수밖에없습니다.저희들의이호소가꼭이루어지기를간절히바랍니다.”

박정희가선택한것은강제진압이었다.철제방패와방망이로무장한수백명의기동경찰이들이닥쳐닥치는대로폭력을휘둘렀다.당사에함께있던신민당국회의원들에게도예외없이폭력을휘둘렀다.경찰은작전을개시한지불과10여분사이에여성노동자들을당사밖으로끌어냈다.그과정에서안타깝게도당시21세였던김경숙이사망하고만다.경찰은‘스스로동맥을끊고투신자살했다’고발표했지만,2008년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김경숙의부검보고서와시신상태등을근거로해서손목에서는동맥을끊고자해한흔적이발견되지않았으며,추락장소도‘건물뒤편창문아래지하실입구’라는경찰발표와달리‘창문이없는건물왼편비상계단아래’였다고밝혔다.또곤봉과같은둥근물체로가격당한상처가손등에있었으며머리뒤편에서치명적인상처가발견됐다고발표했다.
이사건이후정부,여당에서는YH노조배후의불순세력을규명하겠다는방침을세우고산업선교회를집중적으로탄압하게된다.신민당은YH사태를“국기를뒤흔드는전대미문의폭거”로규정했다.신민당의원들은바로농성에들어갔다.4층강당연단에“8·11폭거는말기적발악이다”,“국민의분노가무섭지않은가”같은대형플래카드를붙이고당사현관입구에는검은천을길게늘어뜨려서이사태에조의를표했다.이후김영삼과박정희는극한으로대립하게된다.이사건은경찰의잔인한진압으로끝이나는것같았지만,부마항쟁으로이어졌고,결국박정희유신독재를끝장낸양대사건중하나로역사에기록되게된다.

“우리도인간이다”,1970년대민주노조운동

이렇게잔인하게진압당한YH노조는민주노조로불렸다.당시여성노동자들은방적,방직,모방,스웨터,봉제산업,가발,전기·전자산업,식품,제약등에서많이일했는데,여기에민주노조가활발하게만들어졌다.
당시민주노조는임금인상투쟁,노동조건향상투쟁에서상당한성과를거뒀다.유신체제에서단체교섭권과단체행동권이사실상금지돼있는상황이었는데도민주노조들은단체행동을통해요구조건을쟁취하면서조합원들의지지와신뢰를확보했다.그러한조직력을바탕으로민주노조들은권력과자본,상급노조의끊임없는탄압에과감하게저항했다.
대표적인사례로1974년원풍모방노조의민주화투쟁과회사재건투쟁,1977년9월에있었던청계피복노조의노동교실사수투쟁,그리고1976년부터1978년까지집중적으로이뤄진동일방직노동자들의노조수호투쟁,1974년반도상사노동자들의노조결성투쟁과임금인상투쟁,그리고1979년YH무역노조의폐업반대투쟁등이있었다.이중1976년에서1978년까지집중적으로전개된동일방직인천노조의투쟁은국가권력,자본,상급노조라는세권력이합작해벌인노조파괴공작에정면으로맞서싸운1970년대후반의대표적인노동투쟁의하나로꼽힌다.
이밖에책에는고문으로‘북괴동조세력’몰아간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유신권력의또다른표적이된도시산업선교회이야기,분별력상실한박정희의모습을잘보여주는김영삼의원직날치기제명사건,박정희권력의치부를폭로한김형욱의잇따른폭탄증언등이담겨있다.

부마항쟁,유신정권에결정타를날리다

부마항쟁은유신정권에결정타를날린역사적사건임에도오늘날많이잊힌투쟁이다.부마항쟁은1960년4월혁명,1980년광주항쟁,1987년6월항쟁과함께대표적인민주화운동이자민중항쟁이다.그럼에도많은사람이잘알지못한다.이는부마항쟁이당시제대로보도되지않았기때문이다.부마항쟁은1979년10월16일부산에서일어났는데,17일까지어떤언론기관도보도하지않았다.18일0시를기해계엄이선포되고나서조금보도되기시작했다.이렇게된까닭은긴급조치9호때문이었다.긴급조치9호아래에서는유신체제를비판하는것은그어떤것도보도하지못하게돼있었다.
그렇다면부마항쟁은왜일어났을까?부마항쟁은김영삼의원직제명때문에일어났다고알고있는사람들이많다.김영삼제명이영향을끼친건확실하지만그다지크지않다는게서중석교수의판단이다.이를테면부산대교내와시내에서있었던시위에서‘김영삼제명’을거론한구호는나오지않았다.그보다는‘박정희유신정권에대한불만이나분노폭발’이부마항쟁이일어난원인에더가깝다고서중석교수는말한다.
또부마항쟁은YH사건과뗄수없는관계를맺고있다.당시부산대학생들의민주투쟁선언문을보면“모든경제적모순과실정을근로자의불순으로뒤집어씌우고협박,공포,폭력으로짓눌러왔음을YH사건에서단적으로보여주고”라고적혀있다.곧YH사건이부마항쟁의큰계기였다는것을알수있다.이와더불어유신체제에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