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사진에 나타나는 표현할 수 없는 흔적
사진현상학에서 푼크툼의 의미
변함없는 ‘실재’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실재를 똑같이 재현해 내는 매체의 발달을 가속화시켜 카메라의 섬광으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순간을 기록’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 우리는 스마트폰에 내장된 카메라로 현실을 스펙타클로 끊임없이 복제, 전달, 소비하며 살고 있다. 이미지 없는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영상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사진영상은 현실을 기록해 기억하게 해주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 그 결과 사진은 한편으로 각자 믿고 싶은 것만 보려는 확증편향(確證偏向)을 공고히 해주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첨단과학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에 의해 3D 영상, 홀로그램으로 현실을 완벽하게 복제하는 것 너머 가상세계로 대체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은 테크노 영상의 기원인 사진의 본질에 대해 다시 진지한 사색을 요구한다. 『‘푼크툼’의 사진현상학』은 사진의 인증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바르트가 ‘거기 존재했던 것’이 ‘사진’에 잔여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실’이 새긴 상흔, 즉 ‘푼크툼의 파토스’를 통해 점점 스펙타클로 되어가는 사진에 대한 숙고를 에세이로 남긴 『밝은 방』을 현상학적 사진학으로 재구축한 것이다. ‘실재했던 것’과 ‘흔적’ 사이의 ‘불가역적인 상실’은 실재와 이미지 간의 오래된 논쟁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성찰하게 해준다. 나아가 ‘상실’이 상처가 되지 않고 늘 화려하고 새로운 이미지들로 바꿔 버리는 뉴미디어 시대에 ‘사라진 것’이 야기한 강렬한 파토스에 의해 이타적인 존재와 만나게 해주는 ‘푼크툼’은 디지털 영상시대에 가장 강력하게 소환되어야 할 체험이다. 따라서 사진의 개별학으로서 『‘푼크툼’의 사진현상학』은 이미 고전이 되어버렸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함께 고심했던 『밝은 방』의 문장들 사이에 녹아있는 바르트의 혜안(慧眼)과 만나게 해 줄 것이다.
변함없는 ‘실재’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실재를 똑같이 재현해 내는 매체의 발달을 가속화시켜 카메라의 섬광으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순간을 기록’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 우리는 스마트폰에 내장된 카메라로 현실을 스펙타클로 끊임없이 복제, 전달, 소비하며 살고 있다. 이미지 없는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영상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사진영상은 현실을 기록해 기억하게 해주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 그 결과 사진은 한편으로 각자 믿고 싶은 것만 보려는 확증편향(確證偏向)을 공고히 해주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첨단과학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에 의해 3D 영상, 홀로그램으로 현실을 완벽하게 복제하는 것 너머 가상세계로 대체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은 테크노 영상의 기원인 사진의 본질에 대해 다시 진지한 사색을 요구한다. 『‘푼크툼’의 사진현상학』은 사진의 인증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바르트가 ‘거기 존재했던 것’이 ‘사진’에 잔여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실’이 새긴 상흔, 즉 ‘푼크툼의 파토스’를 통해 점점 스펙타클로 되어가는 사진에 대한 숙고를 에세이로 남긴 『밝은 방』을 현상학적 사진학으로 재구축한 것이다. ‘실재했던 것’과 ‘흔적’ 사이의 ‘불가역적인 상실’은 실재와 이미지 간의 오래된 논쟁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성찰하게 해준다. 나아가 ‘상실’이 상처가 되지 않고 늘 화려하고 새로운 이미지들로 바꿔 버리는 뉴미디어 시대에 ‘사라진 것’이 야기한 강렬한 파토스에 의해 이타적인 존재와 만나게 해주는 ‘푼크툼’은 디지털 영상시대에 가장 강력하게 소환되어야 할 체험이다. 따라서 사진의 개별학으로서 『‘푼크툼’의 사진현상학』은 이미 고전이 되어버렸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함께 고심했던 『밝은 방』의 문장들 사이에 녹아있는 바르트의 혜안(慧眼)과 만나게 해 줄 것이다.
‘푼크툼’의 사진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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