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령골 : 대전 골령골 73년간의 진실

골령골 : 대전 골령골 73년간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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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6.25 당시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미정보보고서 인용)' 이승만 정부는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을 산내 골령골로 끌고 와 재판도 없이 처형하였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최소 4천여 명에서 많게는 7천여 명까지 학살돼 묻힌 곳으로 남한지역 내 단일지역 최대 규모이다. 50년 만에 해제된 미정부비밀문서와 영국 데일리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의 기사에 학살당시와 직후의 참상이 담겨 있다. 피해 유가족들은 사건의 진실과 명예를 찾기 위한 20여 년 간의 지난한 여정을 기록 했다.
저자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저자: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1950년6·25한국전쟁전후이승만정권의군인과경찰에의해끌려가집단학살당한희생자유가족들의모임이다.2000년첫모임이후가족을잃은정신적고통과역사왜곡과사회적편견에맞서진실을찾고명예를회복하기위한다양한활동을벌이고있다.

목차


서시|여기에4
서문|희생자들의영전에이책을바칩니다6
프롤로그|인권사회로가는작은마중물이되기를10

제1장드러난반쪽의진실
에드워드중령의보고서사진18
<데일리워커>앨런위닝턴기자보도28
한국내첫보도-대전형무소4천3백명학살사건_노가원44
사건르뽀-1950년7월8일낭월동을기억하라_심규상55
우리는골령골에서전쟁의진실을보았다62

제2장진실을찾아서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의진상규명운동사104
제1부
1999년~2004년발자취156
주요보도자료166
제2부
2005년~2010년발자취242
주요보도자료250
제3부
2011년~2015년발자취286
주요보도자료292
제4부
2016년~2019년발자취372
주요보도자료377
제5부
2020년~2022년발자취402
주요보도자료410

제3장유해발굴현황및매장지
유해발굴현황및매장지512
대전산내민간인학살사건가해체계522

[부록]

대전산내사건희생자명단526
연구논문|한국전쟁기대전의민간인학살과그성격528
주요판결문562
대전산내골령골관련작품들574
대전산내골령골진상규명운동사연대표598
평화공원조감도606

출판사 서평

권사회로가는작은마중물이되기를

대전산내골령골에서대규모학살이일어난지73년이흘렀다.이중55년간은은폐와왜곡의시간이었다.정부는반세기가넘게사건자체를역사에서지우려했다.처음엔빨갱이로매도하고,마땅히죽여야할사람을죽인양당연시했다.시간이지난뒤에는골령골밖으로사실이알려지는걸막았다.경찰은인근마을주민들에게이것저것캐묻고다니면그것이유족일지라도신고하라고했다.미국은학살현장의진실이담긴사진과보고문건을50년간비밀문서로분류해비공개했다.그러면서대전형무소에서비슷한시기있었던북한군에의한민간인학살사건만을문제삼았다.골령골은그렇게버려졌다.희생자유해는돌멩이보다못한취급을받았다.밭을갈다,농사를짓다유골이쏟아져나와도안식처로갈수없었다.중앙정부도,지방정부도,경찰도모두드러난유해의수습마저꺼렸다.그렇게유해는처참하게쪼개지고부서졌다.

나머지20여년은사건의진실을밝히기위한치열한싸움의시간이었다.사실을알리고,진상규명과명예회복,유해발굴,더이상의훼손과왜곡을막기위한싸움이었다.50년만에처음으로골령골유족회가결성됐다.50년만에처음으로희생자를위한공식제사를지냈다.특별법이제정됐고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결성돼정부차원의진실규명작업이시작됐다.수백여골령골유가족들이진실규명을신청했다.일부분이지만유해발굴작업도벌였다.하지만딱거기까지였다.

2010년이후골령골은다시과거로되돌아갔다.사유지라는이유로유해매장지에서일년에한번제사를지내는일마저어려워졌다.지방정부는현장훼손을위한안내판설치마저막았다.대신그자리에쓰레기가쌓였다.다행히지난2020년부터골령골은새로운시기를맞고있다.민간인집단희생자의전국단위추모공원(평화공원)조성을위한대대적인유해발굴작업이정부주도로이루어졌다.이를통해수천구의유해를발굴,‘세상에서가장긴무덤’골령골의실체가드러났다.돌이켜보면‘전국추모공원조성후보지선정’(2016년)은영혼들의도움이라고밖에달리생각할수가없다.만약추모공원조성후보지로선정되지못했다면골령골의유해는쓰레기처럼뒹구는절망의땅에서벗어나지못했을것이다.

2023년부터는추모공원조성공사가본격추진될예정이다.지난2020년출범한2기진실화해위원회는골령골발굴유해에대한일부나마DNA검사를하기로했다.추모공원이조성되면골령골은인권전시관,추모관등을갖춘평화공원으로변모할예정이다.골령골은지명에서부터특별한의미를담고있다.골령골의원래이름은곤룡재였다.산의형국이마치용의모습을닮아붙은이름이다.그러다1950년민간인학살사건으로지명이골령(骨嶺)으로바뀌었다.죽은사람의뼈가산처럼쌓인골짜기라는의미다.그러다다시한자어만뼈의영혼이깃들어있는골짜기란뜻의골령(骨靈)골로변화했다.

골령골은한국전쟁전후남한지역내최대희생지로꼽힌다.1950년6월말부터이듬해초까지최소4000여명,많게는7000여명이희생됐다.희생자도보도연맹원에서부터형무소수감자(제주4·3,여순관련자등),부역혐의자뿐아니라아무관련없는일반재소자들까지범위가매우넓다.지역별로도인근충청지역은물론서울에서제주까지를망라한다.골령골학살은이어서북한군의보복학살을불러왔다.대전을점령한북한군은골령골학살사건의가해자로우익인사와경찰,공무원등을적으로간주해대전형무소에가두고퇴각과정에서살해했다.그희생자만약1500여명에이른다.북한군에의한보복학살은이후남한의군대,경찰,우익단체에의한재보복학살로또다시이어졌다.북한군편에섰거나어쩔수없이협력했던사람들이부역자로갇히거나학살대상이됐다.이런과정을거쳐한반도는극단적인대립사회로변모했다.

이책은골령골73년에대한최초의백서다.73년간어떤과정을거쳤는지를가급적날것그대로기록했다.1950년학살현장의사진에서부터앨런위닝턴기자의당시현장보도기사,국내에서골령골학살사건을첫보도한《월간말》보도(1992년2월)등을찾아원문을수록했다.이자리를빌려미군이찍은골령골학살현장사진을발굴해세상에알린故이도영박사와선명한원본사진을제공해준제주4·3평화재단에감사드린다.그리고대전산내골령골학살의진행과정을유가족의증언을들어기록하고,대전산내유족회와시민사회단체의진상규명과정과타임라인,사건개요를체계적으로정리했다.특히골령골학살사건에대한논문과유해발굴여정을정리기록한임재근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집행위원장에게특별히감사드린다.

박만순오마이뉴스시민기자의희생자와삶과남은가족들의처절한고난을기록한「골령골의기억전쟁」은지역사복원과골령골사건의진실규명에크게기여했다.결과적으로유족회와시민사회의결속된힘이없었다면골령골의진상규명작업과공론화는여기까지미치지못했을것이다.이런점에서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전국유족회,제주4·3희생자유족회대전위원회,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전남지회등유족회를비롯해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외진상조사단,대전형무소산내학살진상규명회,대전산내대책회의,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등시민사회연대기구는역사의진실을찾는사람들로기억될것이다.이과정에서언제나기껍게힘을보탠수많은사람들의이름을다기록하지못하는것이아쉽다.

골령골의동족상잔의역사가어둠을벗고한권의백서로기록되기까지함께해준수많은사람들의노고에경의를표한다.아직진실규명,피해자명예회복,배·보상,가해책임자처리등이숙제로남았다.유족회원은물론시민사회,중앙정부,지방정부등의관심과노력이뒤따를때가능하다.이책이인권사회로가는작은마중물이되기를기대한다.(심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