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백 년간의 잠 (임순만 장편소설)

에곤 실레 백 년간의 잠 (임순만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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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심장을 뒤흔드는 예술가소설의 탄생
에곤 실레 사후 100주년을 2년 앞둔 시점에서 에곤 실레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괄목할 만인 작품이 나왔다. 저자는 20세기 초 세계 지성과 예술의 분출지였던 오스트리아 빈으로 우리를 데려가 에곤 실레를 중심으로 당시의 사회상과 예술사를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클림트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가 떨어졌던 에곤 실레는 이제 세기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그의 예술에 대한 집념과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저자는 평저 형식이 아니라 소설 형식을 통해 내밀한 의식과 감정까지 짚어낸다. 에곤 실레를 이해하기 위한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안내서이자 그의 천재적인 그림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저자

임순만

저자 임순만은
소설가, 언론인
국민일보 편집인, 논설실장, 편집국장, 종교국장 역임

저서
[임순만 기자의 문학이야기]
[상상력의 마술-20세기의 작가를 찾아서] 등

목차

선인장 꽃
유급과 중퇴
비더마이어
자화상의 꿈
감옥
브레겐츠를 아는가
밤의 마차
두 개의 포옹
영원한 아이
아버지들
백년 후에 부는 바람

출판사 서평

-[에곤 실레 백 년간의 잠]은 어렸을 때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의 소녀가 훗날 미술사학자가 되어 실레의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와 그의 그림의 비밀을 밝혀내는 구조로 짜여있다. 소녀는 여덟살 때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구스타프 클림드-에곤 실레 특별전]에서 실레의 기이하고 불쌍한 그림을 보게 된다. 성장하면서 실레 그림의 그늘을 차츰 이해하게 되는 그녀는 ‘세기말 비엔나’를 연구하는 학자가 된다. 세계의 전문가들이 모인 ‘실레 사후 백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그녀가 실레의 삶과 그림에 얽힌 비밀을 풀어내는 이야기가 소설의 정점을 이룬다. 예술은 왜 절망하거나 무기력해진 인간을 새롭게 하는지, 실레의 어떤 힘 때문에 그의 그림이 백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고 살아나는지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뛰어난 예술작품을 진정으로 만난다면 사람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의 문장은 중층적이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겹겹이 숨어있는 이야기들이 나타난다. 또한 디테일이 풍부한 문장은 그 다양하고 일견 화려해 보이는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원형적인 단순함과 소박함을 훼손시키지 않는 점에 있어서 기이할 정도이다. 에곤 실레 예술의 핵심을 파고드는 저자의 정신은 동시에 문장에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으려는 집중력을 보여준다. 매우 공들여 쓴 작품으로, 완독하기까지 독자의 집중력과 노력을 요구하고 있지만 책을 덮을 무렵에는 그 이상의 보상과 감흥이 가슴에 차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저자가 그림을 분석하는 힘도 예사롭지 않다. 화가의 영혼과 정신에 다한 공감능력과 분석 없이는 작품을 총체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상기시킨다. 20세기 유럽 예술사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20세기 초반을 수놓은 비엔나 예술인들이 펼쳐내는 문화풍경을 해설이 아니라 이야기 형태로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보다 생생한 간접체험이 가능하다.

책속으로 추가

-- 제인은 [갈색 배경의 자화상]이라는 그림 앞에 섰다. 불투명 구아슈와 투명 수채를 섞어 바른 그림에서 먼저 제인의 눈길을 끈 것은 화가의 산발한 머리와 짝눈이었다. 오른쪽 눈의 검고 큰 눈동자는 튀어나올 듯 선명한 데 비해, 그 절반 크기밖에 안 되는 왼쪽 눈은 흰자위가 가득했다. 산발한 머리와 이마의 깊은 주름, 강렬하고도 어긋난 눈동자를 가진 청년, 제인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는 듯 살포시 다문 청년의 입술을 보면서 조마조마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배경으로 그린 머리 뒤편의 갈색 사각형이 제인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화가는 왜 짝눈이 되었을까. 어렸을 때 병을 앓았던 것일까. 다음에 제인은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자화상을 보았다. 깨끗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저렇게 예쁜 자신을 화가는 왜 [갈색 배경의 자화상]에서 그토록 기이하게 그린 것일까. 왜 자신을 불쌍하게 그리는 것일까. 제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오다 전시장 마지막 코너에서 거울 앞에 선 실레의 세로 사진을 보고 그림과는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헐렁한 바지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측면으로 서서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은 고작해야 강아지 한 마리의 무게밖에 안 될 정도로 가냘파 보였다.

-- 아이는 어느 날부터 그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에 스케치북 한 장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멈춰지지 않는 간지러움이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이상한 말들이 솟아올랐고, 달려와 그의 창 앞에 선 기차를 볼 때 그는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말하는 새, 춤추는 벌판, 날아가는 꽃, 시시각각 바뀌는 사람들의 표정. 그런 이명과 환각을 경험하면서 그는 그런 것을 땅바닥 위에 손으로 그렸고, 깜짝 놀라 발로 지웠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연필로 종이 위에 그렸고 색을 칠했다. 그리고 그것을 찢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려야만 했다. 에곤은 그것이 어떻게든 표현돼야만 하는 내부의 울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가업을 이어 3대째, 더 나아가 4대나 5대째로 이어가며 기차 엔지니어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없는 행복이었을 것이다. 감람나무와 호두나무가 있는 정원을 가진 3층집, 그 앞에는 작은 냇물이 흐르고 미루나무 아래서 할머니는 물감이 묻은 손자의 손을 씻어주었을 것이다. 아이의 훌륭한 그림 솜씨는 금빛 액자에 끼워져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점으로 두고두고 칭송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집안의 예술성은 그 지점까지 고양되고, 그 지점에서 멈춰야 했다. 그러나 아이는 거기서 멈추지 못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의 고통과 설렘을 사랑했다. 그리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아이는 커서도 그림쟁이가 처한 현실의 불모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시당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빵이나 돈과 바꿔주는 사람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것을 지상최고의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자기모순에 빠져 살았다.

-- 실레는 누드화의 세 번째 욕망은 만들어진 육체를 소유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누드를 그리는 것은 누드를 만져보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욕망이다. 인체를 그리는 자는 보이는 뼈는 물론 감춰진 뼈까지 볼 줄 알고, 늑골과 골반이 심장과 폐를 보호하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사타구니의 촉촉함까지도 다 안다. 그것을 모르는 화가는 옷을 입고 활보하는 인간을 그릴 수 없다. 화가란 얼마나 불순한 야망을 숨기고 있는 존재들이란 말인가. 이런 인체를 그리는 실레는 거기에 표정과 감정을 집어넣고 인간 하나를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하기에 그런 그림을 그려낸 그는 누구보다 잘날 척할 수 있고, 거드름을 궐련처럼 뻐끔뻐끔 피우며 자신이 만들어낸 인간을 화실 깊은 곳에서 양육하거나 시장에 걸어놓고 큰돈을 받기 위해 흥정을 벌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존재라고 믿는다.

-- “에곤, 당신은 그림 그리는 것을 진정으로 사랑하나요?”
“네. 제가 어린 시절부터 계속 들었던 질문입니다.”
“그리는 것을 싫어한 적은 없나요?”
“없어요. 저는 저의 모든 것을 다해서 그림을 사랑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그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신합니다.”
“그러면 됐어요. 사랑하면 된 것입니다.”
“수모를 겪고 망신을 당했어도 말인가요?”
“그럼요. 당신이 그 정도로 그림을 사랑한다면 그 자체로 수모와 불명예를 이긴 것입니다. 문제가 된 그림이 어떤 것이든 당신이 진정으로 그림을 사랑해 그린 것이라면, 그것은 타인이 비난할 수 없는 예술작품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요. 사랑은 나약한 인간을 위대한 인간으로 바꿔줍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선이예요. 진정한 양봉가가 되고 싶다면 벌에 쏘이는 것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수녀님, 사랑하는 것이 그만큼 대단한 것인가요?”
수녀는 실레에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주었다. 역광을 받은 검은 베일이 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반짝거린다.
“그렇습니다. 순수한 사랑이라면 말이죠. 지금까지 당신은 틀렸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인간은 누구나 틀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그림을 사랑한다면 결코 크게 틀리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옳게 될 것입니다. 사랑에는 그런 힘이 있지요.”

-- 떠나가는 발리는 자신의 품속에서 잠을 재웠던 실레를 생각한다. 성숙한 남자였지만 자신의 품에서 신음하며 잠들었던 아이. 그녀는 그 아이를 맡아줄 에디트가 거친 화가의 심부름을 도맡아주고, 콜렉터들과 원만하게 비즈니스를 진척시키고, 화가가 원하는 어떤 포즈로도 자신 있게 단 위에 서고, 그러고도 몸과 마음으로 그를 위로해줘야 하는 고행을 기꺼워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그런 고행은 자신에게는 고통이 아니라 실은 즐거움이었으며, 실레의 거? 또한 어린아이 같은 응석부림의 한 방식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발리는 이어지는 회한을 재빨리 던져버린다. 실레가 준 기념품을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그녀는 무시당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하여 다시는 모델이 되지 않겠다고 각오했고, 가능한 빨리 비엔나를 떠나겠다고 생각한다.

-- 실레가 짧은 삶에서 가장 풍요로운 느낌을 받았던 순간들은 [네 그루의 나무]를 그리던 뮐링에서의 저녁시간이었다. 그의 오두막 뒤에는 구부정한 작은 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퇴근 무렵 참나무 아래로 가면 작은 시냇물의 돌돌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나무 뒤쪽의 별이 솟아오르는 옅은 회청색 공간으로부터 그 너머 해가 사라지는 회적색 공간까지의 절제되고 투명한 색감을 마음에 담으며 나무 아래 누워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떠오르는 별을 보며 자신의 옆에 함께 누워있을 동반자를 그리워했다. 게르티였을까, 발리였을까, 에디트였을까, 아니면 파이스나 모프이기라도 했을까. 아무 얘기도 나누고 있지 않지만 언제든지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누워있는 동반자, 절대적인 고독보다도 더 위대한 친교. 그는 자신을 순전하게 이해해 줄 한 사람이 그리웠다. 해가 지는 지평선으로 흐르는 저녁 안개, 떠오르는 별 몇 개. 밤하늘에 걸린 등불이 하나둘씩 불을 끄고 마침내는 점멸되듯 그렇게 사라진다.

--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각 파트별 연주자마다 유럽 최고의 기량을 갖추도록 연마시킨 황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의 푸른 비엔나의 하늘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또 그 찬란한 하늘을 수놓았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짐머링의 중앙묘지나 히칭거 공동묘지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이런 장소들이 죽은 이들의 품위를 높이는 예술도시 비엔나의 힘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저 궁벽한 오베르 장크 바이트에 묻힌 실레를 얘기할 때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오래된 석비가 허물어져가고 있다고 말할 때는 플로어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에곤 실레의 담백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별다른 유명인사의 묘지를 찾아볼 수 없는 변두리의 쓸쓸한 곳, 천국의 안식을 가져다주거나 지상의 화려한 궁전을 모방한 어떤 조형물도 없는 언덕 위에, 비바람에 부식돼가는 작은 돌비 하나를 벗 삼아 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