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세운 공화국: 9월 학살에서 왕의 처형까지

피로 세운 공화국: 9월 학살에서 왕의 처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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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왕의 피로 액땜하고 불안한 걸음마를 시작한 공화국
프랑스에서 왕조의 연극을 끝낸 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중요한 연극이었다. 그것은 왕이 주인공이던 연극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들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서로 주인공 역할을 맡으려고 노력하는 연극이었다. 그 무대는 파리나 주요 도시의 거리, 정치 클럽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곳은 국회의사당이었다. 처음에는 베르사유 궁에서 시작해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왕이 옮겨갈 때 의원들도 따라가고, 국회가 따라가자 정치 클럽도 함께 따라갔다. 파리의 정치 클럽도 그 나름의 무대였으며, 거기서 주역으로 떠오른 사람이 국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만큼 파리가 모든 연극의 중심이 되었다. 관객은 정치화한 시민들이었다. 구체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이 정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혁명의 계기를 마련한 전국신분회가 소집되는 공고가 나가고, 175년 만에 열리는 전국신분회의 형식을 놓고 토론이 벌어지면서 도시부터 농촌까지 모든 프랑스인은 정치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혁명이라는 연극을 지켜보던 관객이 교육을 받고, 주역이나 도우미가 되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베르사유에서 전국신분회가 국민의회로 바뀌는 과정부터 관객이 지켜보았다. 이제 정치는 관객 앞에서 주인공들이 자기 역할을 다하고 관객을 감동시키는 연극이 되었다. 루이의 편에서 볼 때 그는 주역이었지만, 점점 비중이 커지는 조역들에게 밀려나다가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죽는 역할을 수행했고, 그렇게 해서 천년 이상 발달한 왕정의 연극은 막을 내렸다. “왕은 죽었다, 왕 만세!”의 시대가 끝났다. 왕이 인민의 피로 손을 적시던 시대가 갔다. “왕은 죽었다, 공화국 만세!” 걸음마를 시작한 공화국은 이렇게 왕의 피로 액땜을 했다.
- 본문 중에서
저자

주명철

1987년부터2015년여름까지한국교원대역사교육과교수로학생들을가르쳤으며문화사학회,역사학회,한국서양사학회종신회원,한국서양사학회회장을지냈다.
그동안지은책으로는『대서사의서막』,『1789』,『진정한혁명의시작』,『1790』,『왕의도주』,『헌법의완성』,『제2의혁명』(이상‘프랑스혁명사10부작’중1~7권),『바스티유의금서』(이후『서양금서의문화사』로재출간),『지옥에간작가들』,『파리의치마밑』,『다이아몬드목걸이사건과마리앙투아네트신화』,『계몽과쾌락』,『오늘만나는프랑스혁명』등이있고,앙시앵레짐과프랑스혁명관련책을여러권우리말로옮겼다.현재프랑스혁명사10부작을재미있게저술하여한평생추구한학문을제대로마무리하는데매진하고있다.

목차

시작하면서

제1부공화국선포

1.8월10일의국회
2.탕플에갇힌루이카페
3.파리코뮌
4.파리를지키자
5.9월학살
6.공화국선포
7.공화국은하나다

제2부루이의재판과처형

1.루이의하루
2.루이가죽어야나라가산다
3.루이의비밀금고
4.루이의신문訊問
5.평화냐,전쟁이냐?
6.루이의재판
제1차호명투표?루이카페는범죄를저질렀는가?
제2차호명투표?루이의판결에대해기초의회에서국민의재가를받을것인가?
파리의분위기
제3차호명투표?한때프랑스인의왕이었던루이에게어떤벌을내려야할까?
루이카페의마지막청원
제4차호명투표?루이를당장처형할것인가,미룰것인가?
7.루이의마지막밤
8.루이의마지막길

연표

출판사 서평

◆왕조의연극을끝내고공화국의문을연혁명

루이16세는1792년8월13일탕플탑에갇히기전부터‘루이카페’로불렸다.987년위그카페가왕으로뽑힌뒤1328년까지프랑스에서는장자상속법에따라3세기이상직계자손이왕위를물려받았다.그러다가직계손이없게되자,카페왕조의방계가문에서후계자를찾았고,그렇게해서발루아가문,발루아앙굴렘가문,부르봉가문이차례로왕위를물려받았다.부르봉가문의왕위는앙리4세에서아들루이13세,손자루이14세,5대손루이15세,7대손루이16세로넘어갔다.그런데혁명이일어나고특히왕이폐위된뒤,사람들은그를카페왕조사람이라는뜻으로루이카페라불렀다.파리코뮌은루이카페와그가족을탕플감옥의아성으로옮기고,그들을밤낮없이감시했다.
이런상황에서1792년9월21일,국민공회에처음모인의원들은왕정을폐지하기로합의하고,이튿날프랑스공화국원년을선언했다.그들은공화국헌법을제정하고국내외의반혁명세력에맞서혁명을완수하는일에착수했다.11월13일에그들은본격적으로루이카페를재판하자고논의하기시작했다.12월3일에로베스피에르는“루이가죽어야나라가산다”라는연설로공화국의안정을방해하는반혁명의구심점을제거해야한다고역설했다.8월10일에는파리의혁명코뮌이‘제2의혁명’을일으켜혁명의추진력을높였는데,이번에는국민공회가주도권을쥐고혁명을한단계도약시켜민주주의체제를더욱탄탄하게만들어야한다는뜻이었다.그렇게해서그동안성향의차이를분명히드러내던지롱드파와몽타뉴파가‘왕의사형’을둘러싸고대립했으며,결국몽타뉴파가바라는대로집행유예없이사형을집행했다.‘왕의사형’은국내외정세에따라본격적인권력투쟁과함께의회민주주의가이름뿐인상태로나아가는‘공포정’을예고하는사건이었다.

◆‘9월학살’과왕의처형을둘러싼갈등

1792년당시프랑스는국내외적으로큰혼란에휩싸여있었다.대외적으로는오스트리아와프로이센의연합군과전쟁중이었으며,국내적으로는끊임없는소요사태와봉기뿐아니라파리와인근감옥에서‘9월학살’까지일어난상황이었다.국민공회안에는왕당파가발을붙이지못했지만그들은전국적으로계속반혁명을꾀하며완전히새로운체제를받아들이는데극렬하게저항했다.
8월10일상퀼로트계층이튈르리궁을공격하면서‘제2의혁명’이일어난후,실권을장악한파리코뮌은왕당파를필두로한반혁명분자들을잡아들이는데매진하면서‘인민이심판하는법원’의설립을추진했다.이로써최초의‘혁명법원’이생겼으며신속한‘인민재판’을통해감옥에갇히는사람들의수가날로늘어나기에이르렀다.인권과거리가멀었던구체제를타파하고자유의시대를연혁명기에과거보다훨씬더많은감옥이파리에생긴것은참으로역설적인상황이었다.새질서를세우고적폐를청산하는과정에서죄인이계속늘어났고기존의감옥만으로는모자랐기때문에수많은종교시설을국가가수용해서감옥으로만들었던것이다.아무튼9월2일부터6일까지‘인민재판’을실시한감옥에는모두2,500여명이갇혀있었다.그들가운데모두1,090~1,395명이학살당했는데,이것이바로‘9월학살’이다.
파리에서는학살이끝났지만,인근의베르사유·오를레앙·모·랭스에서도학살사건이일어나모두150명정도가희생되었다.그학살을조직하거나명령하거나실행한사람들을구체적인증거로일일이알아내기란불가능하다.당시에도정치적인투쟁에서지롱드파가몽타뉴파와급진좌파언론인들에게혐의를씌웠지만정확한근거를제시하지는못했다.‘9월학살’은정치판에등장해서세력을얻기시작한상퀼로트의행동을규제할만큼공권력이확고히뿌리내리지못한현실에서일어난사건이었다.
한편왕정폐지를의결한국민공회구성원의비율을보면흥미로운지점을발견할수있다.전체의원749명중47퍼센트가변호사·검찰관·공증인·판사·법률가였고,10퍼센트가과거공직에있거나법률훈련을받은사람들이었다.상업과제조업에서10퍼센트정도,의사와종교인6퍼센트,교육과문화예술과과학분야에서6퍼센트,군인8.5퍼센트,지주6퍼센트였으며,노동계급에서6명,후작과왕족이8명이었다.이들의정치적성향을보면,몽타뉴파(좌파)와이들이정적을숙청한뒤이름붙인지롱드파(우파),이들중간에다수파인평원파가있었다.
프랑스혁명의가장큰의의는귀족과평민의사회적차별을철폐하고입헌군주제를거쳐종국적으로는민주주의를표방한공화정을수립했다는데있을것이다.이과정에서천년이상지속되어온왕정을확실하게뿌리뽑기위해루이16세를처형할것인가,말것인가를둘러싸고국회내에서극심한의견대립으로날마다몸살을앓아야했음은물론이다.이는그만큼민주주의를뿌리내리는일의지난함을웅변하는것이라할수있다.

◆개인의사망으로만끝나지않은루이16세의죽음

베르사유궁에서열쇠를직접만들어방문을열고다니는취미를가졌던루이16세는왕실전속자물쇠공가맹에게열쇠만드는법을배우면서즐거워했으며,그와시간을보내는일도많았다.그러나좋은시절은이미아득한옛일이되어버렸고,탕플감옥에서루이와그의가족은얼마전까지만해도상상하지못하던모욕을날마다견뎌야했다.정원에서일하는일꾼들도가끔연장을들어보이면서그것으로마리앙투아네트의머리를벨수있다고장담했지만,루이의가족은아무런대응도할수없는신세였다.가족이흩어지지않고함께밥을먹을수있는것만해도그나마다행이었다.9월초파리의감옥에서일어난학살사건도그들에게큰두려움을안겨주었다.루이의맏딸은당시를이렇게회고했다.

우리는하루를함께지냈다.아버지는내동생에게지리를가르치고,어머니는역사를가르치고또시를배우도록했다.고모는산수를가르쳤다.아버지는다행히책꽂이를발견하고거기에빠져들었다.어머니는수를놓아장식융단(타피스리)을만들었다.파리코뮌사람들은너무격식을무시했고,아버지를별로존중하지않았다.그리고언제나아버지를감시했다.(160~161쪽)

9월2일,욕설을더많이들었다.우리는무슨일이일어나는지몰랐다.사방의창문으로돌이날아왔다.누군가아버지께던진돌이지만다행히아무도맞지않았다.(163~164쪽)

이렇듯급격한혁명의소용돌이속에서루이의신세는날로외롭고초라해졌으며,모든사람이스스로운명을결정하는원칙위에서공화국을선포한시대에루이는왕좌에서쫓겨나고시민이될기회도얻지못한채마침내‘반혁명’혐의로재판을받기에이르렀다.루이가왕으로서전국신분회를소집해개회식에서엄숙하게왕권을행사하고,또네케르를재무총재에서해임하던1789년부터국민공회에서자신의무죄를호소해야하는1792년말까지겨우3년이지났지만,정치적관계는완전히뒤집혀버린것이다.
주명철교수는사실루이가늘반혁명을꿈꾸었다고말하기란어렵다고밝힌다.그럼에도오랫동안왕을폐위하자고외치던사람들,외적의침입으로위기감이고조되면서처벌의지를불태운사람들은루이가일관성있게반혁명을꾀했다고주장했다.그런상황에서루이가조상대대로저지른잘못까지뒤집어써도어쩔수없는일이었다.
1792년12월11일,루이는국민공회에직접출석해1789년부터혁명을방해한죄를낱낱이지적하는내용을들어야했다.신문은세시간동안진행되었다.이후루이는12월26일9시46분부터12시10분까지변호인의도움을받았다.루이의신문과변론은혁명과반혁명의역사를요약한다.루이는처음부터혁명에협조하는척하면서반혁명만꿈꾸는죄인이었다.단두시간반도못채운변론이그가왕으로서18년동안지은죄,3년동안혁명에협조하지않은죄를지울수는없는노릇이었다.이미로베스피에르는“루이가죽어야나라가산다”고했고,루이도유언장을작성해놓은뒤였으니,루이는살아도산목숨이아닌처지였다.1793년1월,국민공회는왕의재판에대한토론을종결하고4차에걸친호명투표끝에루이의사형을최종의결했다(20일).이에따라루이는이튿날오전에단두대의이슬로사라졌다.

루이16세의죽음은개인의죽음으로끝나지않았다.루이16세가죽자마자탕플감옥에갇힌마리앙투아네트는왕세자를루이17세로예우했지만,그것은최소한의형식일뿐이었다.(중략)루이16세가조상의이름을따서‘루이카페’로불린것은아주상징적인일이라할수있다.메로빙왕조와카롤링왕조의뒤를이어제3왕조라할카페왕조는987년위그카페가왕으로뽑히면서시작되었다.위그는카파capa라는종교인모자를쓰고있었기때문에카페capet라불리게되었다.그러므로카파,카페는머리와관련된낱말이었으며,루이16세를루이카페라고부를때부터머리가잘려나갈운명을암시했다고믿고싶어진다.물론아무것이나연결하고자하는마음이앞서면,이렇게결과에대한원인이나상징을찾고싶은유혹에저항하기어렵다.아무튼루이16세,루이카페가죽은사건은13세기동안이나발전한왕정이공식사망한대사건이었음은분명하다.루이16세가마지막주인공을맡았던왕조의연극이그의죽음과함께끝났다.(344~345쪽)

◆혁명은느린개혁과급격한개혁의변증법

주교수는이시리즈를한창집필하던2016년10월에처음촛불을든이후혹독한겨울추위에도수그러들지않고끝내박근혜대통령을탄핵시킨우리의‘촛불집회’에남다른자부심과큰기대를가지고있으며,역사학자로서독자에게전하는당부도잊지않는다.“‘촛불집회’는18세기말의프랑스에서일어난운동보다,아니21세기까지일어났던어떤정치적운동보다더평화적이었지만,그결과는혁명적이었다”고평가하는저자는그러나“개혁도제대로추진하지못하는실정인데‘혁명’이라고말할수있을까?”라면서조급해하지말자고당부한다.나아가촛불을들고모였던첫날의마음을장기적으로간직하자고호소한다.본디모든혁명은정치혁명이자문화혁명이며,느린변화와급격한변화의변증법속에서완성되는것이므로.

단숨에개혁을바라던사람들이시간이지날수록좌절하고,피로감을호소하는세력에게지는모습을보게된다.적폐를없애는일이만만치않다고생각한사람도자칫하면현실에타협할까봐두렵다.새정부는적폐를청산하고청렴한국가를만들라는국민의명령을수행하고있지만만만치않은저항에부딪치고있다.게다가그동안법을무시하고어긴사람들이민주주의·법치주의의혜택을가장많이누리는모순을본다.입법부가당리당략에따라움직이고다음선거에서자리를보전하는방법을먼저생각하는데,어찌한술뜨고배부르다할수있겠는가?우리는개혁의출발선에서겨우몇걸음떼었을뿐이다.과거로되돌아갈수없을정도로멀리갈수있는날은언제일까?여전히가장우선시해야하는것은100년이상모든곳에뿌리와줄기를뻗은적폐를청산하는일임을명심하고숨이나고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