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사판역사판

이판사판역사판

$17.50
Description
해학과 풍자의 질펀한 놀이판 위에서 종횡무진 펼쳐지는
어느 노교수의 진솔한 삶과 깨달음, 역사에 관한 이야기
알라딘이 등잔을 닦으면 지니가 나타나듯이, 거울을 닦으면 대발과 발바리가 나타난다. 온세상은 그들에게 손가락을 보여준다. 그들도 그를 향해 손가락을 보여준다. 셋은 일지선 놀이에 푹 빠져 생각을 쉰다. 가끔 일지선의 변형도 곁들인다. 남이 보면 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동작이지만, 그들은 빙긋이 웃는다. 그저 웃어넘긴다. 손가락을 보여주는 행위의 선악을 분별하지 않는다. 더욱이 웃는 행위에는 선악이 없다. 울어도 좋지만, 웃는 것이 자연스럽다. 울 때보다 웃을 때 근육이 덜 피로하기 때문에 ‘웃는 놈’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놈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일지선 놀이에 빠진 세 놈을 우연히 본 사람들이 흉내 내면서 일지선이 널리 퍼졌다. 형식이 화려하게 발달하면서 내용도 함께 발달했다. 사람들이 점차 일지선 놀이의 장점을 알게 되면서 슬기로운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널리 권장했다. 놀이에 입문하는 순서가 반드시 깨닫는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장점이다. 온세상·대발·발바리 중 하나가 발명한 놀이가 분명하지만, 그들보다 늦게 놀이에 빠진 사람들 가운데 셋보다 먼저 자성을 찾아 생로병사의 고뇌를 끊고 항상 행복한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놀이인가. (중략) 요즘 사람들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노래한다. “저 언덕에 갔다더니, 어째서 왔느냐? 나를 데려다주러 왔느냐?” 듣는 사람이 화답한다. “생사와 열반이 어우러졌더라.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이니 이판사판역사판理判事判歷史判이로세.”
- 「발문」 중에서
저자

주명철

한국교원대학교역사교육과에서2015년8월까지학생들을가르치면서내가공부한내용을정확하게표현하려고애쓰고,역사교사가될학생들에게도이른바‘꼰대’가되어우리말을정확하게쓰라고닦달했다.아무리좋은뜻으로말해도듣는사람이들을생각이없으면소용없다는사실만계속확인했지만,되도록그런말만하라고나라에서주는월급의무게를이겨내고자비교적성실하게살다가정년퇴임했다.지나온과정을돌이켜볼때,내가만난학생들은반드시가르쳐야알아듣는사람들이아니기에역사적인물과사건에공감하려고노력하되섣불리좋다거나싫다고판단하지않고당대의공동선에비추어판단하려고애쓰리라믿으며안심한다.그러나늘사실과진실이무엇인지생각하고,개인의경험을되살려타인의경험을재체험하고공감하는교육자가되라고분명히말해주지못한것을후회한다.
내가퇴임한후에급변한정치상황과그에적응하는과정에서일어나는갈등을수많은매체가날마다‘팩트’라고전한다.과연진실성을믿을만한‘사실’이몇개나될까?따분하고화나는현실에마음공부를하자고결심하고불가의고승들이모든물질과생각에얽매이지않는태도를본받고자노력했다.그러나‘모든판단은역사적판단’이라는점이새록새록떠올랐다.현실세계에서는물질과정신이인연에따라얽히고설켜있지만,역사적판단으로대상의본질을이해하고곁가지를하나하나떼어내는작업은세상의본모습에다가서는유일한길임을잊지않는다.게다가글쓰기는몸이기억하는직업병이다.그래서‘이판사판역사판’을마음에새기면서,진실·사실·팩트가뒤섞이고과거·현재·미래가뒤얽힌글을자유롭게쓰고자했다.

목차

머리말_혼자노는방법을찾아서

골동품능화경
흰둥이이름은검둥이
발바리의변신
온교수의허허실실
대발을그리며
갈등
본대로들은대로생각나는대로믿는대로
국뽕이나주어라
바람을분다
아카시꽃향기에하늘을보다
달을가리키는손가락
옛거울깨뜨리고새거울갖기
무슨거울을봐도마찬가지
숨쉴자유

발문_‘웃는놈’의본성

출판사 서평

◆진실ㆍ사실ㆍ팩트가뒤섞이고과거ㆍ현재ㆍ미래가자유롭게녹아든독특한에세이

『이판사판역사판』은프랑스사학자주명철한국교원대명예교수가2015년부터2020년에걸쳐‘프랑스혁명사10부작’시리즈라는대작을펴낸이후지나온삶을성찰,회고하면서신명나게써내려간에세이다.‘이판사판’은조선시대에생겨난불교용어로교리공부와참선에힘쓰는‘이판승’과절의살림을맡아보는‘사판승’을아울러이르며막다른지경에이른상황을비유하는말이다.여기에다한국전쟁기에태어나지금은상상조차하기어려운엄혹한군사독재시절에청춘을보낸후30여년간수많은역사교사를양성해온저자의폭넓고깊이있는직간접체험이녹아든‘역사판’을덧붙여탄생한제목이바로‘이판사판역사판’이다.한편부제에들어가있는‘일지선놀이’역시예로부터선승들이손가락하나를들어보이는단순한행위를통해깨달음을얻은것에착안해서책의주인공들이개발한놀이를지칭한다.달을가리키는손가락(허상)에집착하지말고본질인달(진상)을보는것이얼마나중요한지를기발한놀이문화를통해자연스럽게전달하고있다.
저자는왜이런글을쓰게되었을까?한평생‘사실’에충실한글만써오느라스스로에게는물론숱한제자들에게도엄격한잣대를들이댈수밖에없었던한계에서과감히벗어나그어느것에도얽매이지않는자유로운글을쓰고싶었던갈증때문이다.그결과이책은과거ㆍ현재ㆍ미래를종횡무진내달리면서거침없는몽상ㆍ환상ㆍ상상ㆍ회상ㆍ명상의세계를넘나들며직조해낸시대적ㆍ역사적진실과사실,깨달음의단편이흡인력있는에피소드들속에녹아있는,소설같기도하고회고록같기도한에세이의성격을갖게되었다.그래서이책에는일흔넘은노교수가스스로를‘꼰대’라고인정하면서도젊은세대의독자들에게절절하게전하고픈메시지들이차고도넘친다.그렇다고곳곳에따분한잔소리가매복해있을거라고지레짐작한다면큰오산이다.저자가지금까지써온글들과는다른결의흥미로움이가득하며해학과풍자,진솔한성찰의격조있는즐거움속에서독서의진짜효용을절감하게될테니까말이다.

◆페르소나의,페르소나에의한,페르소나를위한‘방구석여행기’

이책의7쪽에서11쪽까지는「머리말」이다.그「머리말」에달린제목은“혼자노는방법을찾아서”인데맨끝에는“2021년좋은날기다리며/온세상ㆍ대발ㆍ발발쓰다”라는문구가달려있다.‘온세상ㆍ대발ㆍ발발이라고?저자주명철의신작에세이라며?뭔가좀이상하네,딴건몰라도여느에세이와는분명히다른데’라고느낄개연성이초반부터농후하다.
이책의주인공은머리말에분명히나와있듯셋이다.온세상교수,대발,발발.‘온교수’는저자의페르소나이며대발과발발은온교수의페르소나다.대발은궁극의깨달음을얻고자선수행에정진하는스님이며그의제자발발은두어발자국걸은뒤에반드시뒤를돌아보는습성을지닌‘발跋’이라는동물을닮으라는의미로그가지어준이름인데대개는‘발바리’로불린다.그런데저자는왜굳이자신의페르소나와그페르소나의또다른페르소나를내세웠을까?무려10권이나되는대작을세상에내놓고나니또다시심심해진차에새로운글감을찾던중“어느새벽에이불속에서유튜브를검색하다종범스님의법문을듣게되었고,비몽사몽간에스님이‘발跋’이라는동물의습성에대해하는말씀을듣고이책의실마리를찾았다”고한다.살아온날들과비례한추억의가지가마구뻗어나가기시작했고그의식의흐름이저속하든고급지든상관없이재미있게따라가다보니현실과꿈,상상의경계마저흐릿해지는경지에이르렀다.저자자신의체험과지인들의체험이한데어우러지고,현실에서겪었던일들중일부는웃음과진지함이넘치는강의실풍경과옛시절을손에잡힐듯묘사하는한편,어떤이들과의인연은꿈의형태로증폭되어주인공을숨막히게만들기도한다.그러나읽는이는함께웃으면그뿐,괴로워할필요가없다.우리는그저이독특한주인공들이전해주는시대상과역사적사건에대한올바른판단,가치관,숱한체험,인생에대한깨달음등등을접하며세상을보는눈을확장해가는고차원의즐거움을느끼면된다.그리고자연스럽게따라오는온갖‘잡념’과더불어노닐며자신만의세계로들어가는입구를발견하기만하면된다.

◆‘온세상’교수는누구인가?

주인공온세상교수는꽤나까칠한인물이다.원칙주의자이자뼛속깊이민주주의자이기때문에제자들이맞닥뜨린안타까운사정을너그럽게헤아려주기보다원칙에어긋났을때는가차없이‘F’학점을발사하는쪽을택한다.이는자신의학과에소속된제자들도예외가없다.한편그동안놀랄정도로근대화ㆍ민주화되었는데도여전히시대착오적인식민지근성을떨치지못한자들을몹시경멸하며,무분별한일본어투남용이나우리말의잘못된쓰임에대해서는그냥넘어가는법이없다.또불합리한조치앞에서는위아래를불문하고이의를제기해서원칙대로돌려놓아야직성이풀리는성격이다.학생들의답안지를채점할때는늘빨간펜으로신랄하게지적을해서학생들을주눅들게만든다.외부에서사람들과어울리는시간을최대한아껴귀가하자마자클래식을듣는그는‘붙박이장’이라는별명으로통한다.
그런반면온교수는강의준비를하다잠드는것을가장행복하게여기고학생들에게새로운지식을전수할때가제일기쁘다고말할만큼강의에온힘을쏟으며해마다꼬박꼬박논문을써내는성실한학자다.강의실에서는학생들의주의를집중시키기위해유머를최대한활용하는한편,학생들이반드시깨쳐야하는진실에대해서는누구보다진지하게열정적으로설명한다.원칙을지키느라제자들의사정을봐주지못한것이내심안타까워자주악몽을꾸기도하고불행한일을당한제자들을떠올리며절절하게가슴아파하는따뜻한인물이다.정년퇴임후에도“늘사실과진실이무엇인지생각하고,개인의경험을되살려타인의경험을재체험하고공감하는교육자가되라고분명히말해주지못한것을후회”하는스승이다.그런그가제자들과‘착한침입자’인독자들에게틈날때마다강조하는것이있으니,바로“신화를깨야역사가산다”는점과근대화의여러성격중에서가장중요한것은‘민주주의’라는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근대화를산업화와같은것으로오해하는사람이많다.근대화를너무잘못알고있다.산업화와함께노동자의인권과삶의질도향상시켜서민주주의를확실히정착시킬때근대화를이뤘다고평가할수있다.”(36쪽)

“중세에서근대로나아가는문화적변화과정을요약하면,정교분리·산업화·합리주의·민주주의발전을근대화의중요한성격으로규정할수있다.이네요소가운데무엇이먼저인지굳이구별할필요는없다.그러나가장중요한것이무엇인지말하라면민주주의를내세워야한다.”(171쪽)

“사람들은신화를창조하고쉽게믿는경향이있다.좋아하는사람에게서긍정적인면만보고,싫어하는사람에게서부정적인면만본다.교훈을강조하고싶은역사는미화하고,그반대의역사는저주한다.신화를깨야역사가산다.아니면역사를올바로연구해서신화를깨야한다.”(267~2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