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혁명(큰글씨책) (입법의회와 전쟁, 왕의 폐위)

제2의 혁명(큰글씨책) (입법의회와 전쟁, 왕의 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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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물리적 충돌과 유혈사태로 개헌을 촉발한 ‘제2의 혁명’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성문헌법을 적용해서 민주적 선거로 뽑은 입법의회는 1791년 10월 1일부터 법을 만들면서 국내외의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종교인들은 헌법에서 공무원의 지위를 얻었으며, 헌법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해야 했지만 거부하거나 철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주의자들은 단원제 국회를 영국식 양원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종교인과 귀족주의자들은 나라 안팎에서 헌정을 파괴할 목적으로 군대를 모으고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내전을 부추기는 동시에 외국으로 망명한 왕족들과 내통하고 외국 군주들의 지원을 얻어 대외전쟁까지 부추겼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는 1792년 4월 20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개전 초기부터 고전하면서 국내의 불만세력이 국회와 왕을 더욱 압박했다. 결국 왕과 그 지지자들의 비협조적인 처신에 불만을 품은 상퀼로트 계층이 1792년 8월 10일에 왕의 폐위를 부르짖으면서 봉기했다. 왕은 가족과 함께 튈르리 궁에서 나와 입법의회로 피신했다. 입법의회는 상황을 보면서 개각을 단행했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제2의 혁명’이 일어났다.

문화혁명을 이룰 여건과 가능성은 이미 나타났다. 우리는 1792년에 프랑스에서 ‘제2의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냉전체제의 사고방식에 젖은 사람들이 남북분단을 고착화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틈만 나면 국민을 억압하고 정권을 잡아 연장할 궁리만 하기 때문이다. 국군과 정보기관들을 이용해 민간인과 정치인들의 약점을 캐고, 여론을 조작하고, 선거에 개입하고, 국민의 세금을 정권안보와 사리사욕을 위해 마구 남용한 사례가 지난 1년 동안 하나둘씩 드러났다. (……) 신상필벌의 원칙을 제대로 적용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촛불혁명’을 ‘문화혁명’으로 정착시킬 수 있다.
저자

주명철

1987년부터2015년여름까지한국교원대역사교육과교수로학생들을가르쳤으며문화사학회,역사학회,한국서양사학회종신회원,한국서양사학회회장을지냈다.그동안지은책으로는『대서사의서막』,『1789』,『진정한혁명의시작』,『1790』,『왕의도주』,『헌법의완성』(이상‘프랑스혁명사10부작중1~6권),『바스티유의금서』(이후『서양금서의문화사』로재출간),『지옥에간작가들』,『파리의치마밑』,『다이아몬드목걸이사건과마리앙투아네트신화』,『계몽과쾌락』,『오늘만나는프랑스혁명』등이있고,앙시앵레짐과프랑스혁명관련책을여러권우리말로옮겼다.현재프랑스혁명사10부작을재미있게저술하여한평생추구한학문을제대로마무리하는데매진하고있다.

목차

시작하면서

제1부입법의회
1.입법의회개원과초기활동
2.망명자들에관한법
3.비선서사제들
4.국가안전과방어를위한대책
의용국방군/국립헌병대
5.바이이와라파예트의사임과선거
6.1791년말의정세
7.전쟁에대한토론

제2부전쟁과‘제2의혁명’
1.민중협회들의활동
2.여성도창을들게하라
3.루이종이냐,기요틴이냐?
4.새로운내각
5.평화냐,전쟁이냐?
6.샤토비외병사들을위한잔치
7.선전포고
8.튈르리궁침입
9.“조국이위험하다”
라파예트의파리출현/조국이위험하다1/라무레트의포옹/페티옹의직무정지/
조국이위험하다2/페티옹의복권/제3회전국연맹제
10.‘제2의혁명’
포병들의잔치/전방소식/파리시정부가국가비상사태를선포하다/
루이16세를폐위하라/샹젤리제사건/브룬스비크공의선언/
라파예트혐의없음/‘제2의혁명’

연표

출판사 서평

◆새로운국면으로도약한혁명

2015년12월,‘프랑스혁명사10부작’1,2권출간을시작으로매해두권씩시리즈를이어온주명철교수의성실함이빛을발하는제7권이출간되었다.이책은마침30년만에맞이한개헌의기회를허무하게날려버린채6월13일지방선거를앞둔우리의사회상황과절묘하게겹치는이야기들이담겨있다.
전세계혁명의맏형격이자근대민주주의의초석을다진프랑스혁명에서가장중요한점은헌법을기초로정치체제,사회구조,문화의근간을뿌리부터바꾼데있다.오랜세월절대왕정을이어온프랑스가제헌의회와입법의회를거치며끊임없는논란과갈등속에서도‘인간과시민의권리선언(인권선언)’의정신을바탕으로헌법의기초를마련하고,이에따라정치사회시스템을바꿔나가는과정에서물리적충돌과유혈사태가빚어진것은모두에게불행한일이었다.혁명세력과반혁명세력의갈등은좌파와우파의대립을더욱격화시켰고,민중의삶이여전히어려운상황에서대외전쟁에까지휩쓸리게되자국회안에서는날마다전쟁찬성론자와반대론자사이에격론이벌어졌다.
한편사회적으로도급격한변화의바람이불어닥쳤다.자유를맛보며점차정치의식이깨이기시작한여성들이정치무대전면에나서서자신들에게도남성과동등한권리를달라고당당히요구하는단계까지나아갔다.그러나그절실한요구는남성의원들의야유속에묻혀버리고이후로도오랫동안‘시민의아내나딸’로만살아갈것을강요받게된다.또한죄인의사형마저신분에따라차등하는관행을개선하기위해등장한처단기계‘루이종Louison’(의사루이의이름을딴것)이인도주의를강조한의사기요탱의이름에서비롯된‘기요틴’이라는이름으로정착되고혁명이급진화하는과정에서더욱자주쓰이게되었다.
그런가하면혁명의확산에가장크게기여한것으로입소문과함께인쇄물을꼽을수있는데,당시에도‘가짜뉴스’가어마어마하게판을쳤으며이를규제하는일은거의불가능했다.또붉은색프리기아모자가혁명의상징으로굳어지고급기야1972년6월20일에상퀼로트계층(민중)이무기를들고튈르리궁으로몰려가왕의처소문을도끼로내려친뒤왕에게그모자를씌우고함께포도주를나눠마시며형제애를확인했지만원하던결과를얻지못해불만이더욱고조되었다.그결과8월10일에왕정을폐지하기위한피비린내나는사건이벌어졌고,이는한달뒤에있을‘공화국선포’의첫단추를꿰는날이자앞으로벌어질더큰학살의예고편이었다.그날상퀼로트계급이폭력을휘둘러혁명의적들에게죽음의공포를안겨주었고,이로써혁명은새로운국면으로도약했다.

◆밀실에서광장으로

광장은본디실내에서탄생했다.서구계몽주의시대에실내에서신분을뛰어넘은인간관계가‘대화의광장’을만들었고,그광장을외부로끌고나왔다.엄혹한독재권력시절,최인훈의대표작『광장』이우리사회에던져준묵직한화두가생생히되살아난21세기대한민국서울의시청앞광장과광화문광장이차벽으로막힌‘밀실’이던때가엊그제였지만2016년가을부터촛불의물결이넘실대는진정한광장이되었음을보면서,1792년프랑스샹드마르스광장의의미를생각해볼필요가있다.
1789년7월14일샹드마르스광장에는왕이소집한군대가주둔했다.1년뒤에는거기서국민화합의대잔치인전국연맹제를열었다(제3권참조).다시1년뒤에는학살사건이일어나기도했지만(제6권참조),1792년봄에는민중의힘으로화합의잔치를열게되었다.광장의진화가곧민주주의의발전과궤를같이함을잘알수있다.

예로부터광장은권력자들이자신을돋보이게만들기위해백성에게주는공간이었다.왕은광장을조성하고한가운데자기의기마상을세웠다.자기가직접나가지않아도기마상이대신백성을굽어살피고왕국의질서를유지했다.교회나시청앞에도광장이있었지만오롯이권력자의것이었다.그러나자유를찾은시민들이광장을만들었다.바스티유요새를정복하고허문뒤에생긴광장은자유시민들이만든것이다.오랫동안권력을유지하는도구로쓰던샹드마르스광장도새세상을만든시민들이중요한잔치를벌이는곳으로바뀌었다.(중략)
이러한광장을하버마스J.Habermas는“부르주아적공론영역”이라규정했다.(1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