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터널 속에서 쓴 이야기
지난 몇 년간 권민경 시인은 터널 속에 있었다. 무기력과 우울의 나날들. 하지만 터널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는 행복한 것에서보다는 슬픈 것에 더 자극받는 타입이고, 슬픈 것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글을 쓰면서 긴 터널을 지났다. 그리고 이제 새드엔딩에 대한 한 권의 책을 마주한다. 터널을 지나 마주한 볕을 짜릿하게 감각한다.
새드엔딩에 관한 이야기
이 책에서 시인 권민경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아우르며 새드엔딩을 이야기한다. 새드엔딩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왜 새드엔딩이 다른 어떤 결말보다 더 나았는지를 이야기한다.
주인공 강백호의 일본 이름인 사쿠라기 하나미치란 이름이 찰나에 꽃을 피우고 화려하게 퇴장하는 강백호의 선수 생활을 의미하든 않든, 시인은 만화 ‘슬램덩크’를 보며 자신의 ‘영광의 시절’이라 부를만한 시기를 떠올린다. 그다지 행복했던 기억이 없었기에, 역으로 그때가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는 것을 직감했던 어느 봄날의 풍경, 꽃잎이 흩날리는 밤을 떠올린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영광의 시절이 있다고, 영광의 순간은 찰나처럼 지나가지만 또 다른 영광의 시절이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열광적인 사랑을 받는 ‘슬램덩크’처럼.
게임의 마지막에서, 함께했던 캐릭터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임 〈다키스트 던전〉은 필연적으로 새드엔딩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광명이기 때문이다. 이 비참한 모험에서 우리는 정신 붕괴를 일으킬 수도, 아님 영웅적으로 각성할 수도 있다. 그는 어쨌든 이 새드엔딩 속에서 한 가지를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긴다. 내 동료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슬픈 엔딩을 지켜본 자의 의무라 생각한다.
코난 도일은 독자들의 끈질긴 요구에, 죽었던 홈즈를 되살린다. 홈즈는 되살아났지만 소설 《명탐정 홈즈》에 대한 평가는 이전만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때로 원치 않은 새드엔딩이라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던 작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새드엔딩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마치 인생의 비극을 받아들이는 태도 같기도 한 것이다.
새드엔딩 그러나
시인은 ‘피터 팬’을 볼 때마다 어른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슬픈 이유는 모험을 떠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대체할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가 감정이입했던 웬디는 대체되었다. 첫사랑이 유일한 만큼, 자신도 유일하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여행은 언젠가 끝난다. 이제 어른이 된 그는 그것을 안다.
이렇게 이야기는 ‘새드엔딩’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고, 되어야 한다.
시 〈낚시질〉을 읽는 시인은 물고기같이 우는 화자의 눈물에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 이후엔 우리 모두 각자만의 삶을 만들어 갈 것이라 말한다. 남의 슬픔을 섭취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소화시키는 것, 그것이 새드엔딩을 읽는 의미일 터다. 우리 모두 ‘울고 나서 다시 만나’자. 이것이 이 ‘새드엔딩 이야기’의 엔딩이다.
중요한 건 ‘엔딩’이다-두 가지 ‘엔딩’ 이야기
우리는 영화를 본다. 드라마도 본다. 노래를 듣고, 소설을 읽고, 시를 읽는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림도 본다. 그러면서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 울고 웃는다. 대체로 이야기의 ‘끝’이 슬프면 울고, 행복하면 웃는다. 이야기가 시작할 때, 이야기가 전개될 때, 주인공이 행복하거나 불행한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끝’이 좋으면 모두 좋고 ‘끝’이 나쁘면 모두 나쁘다. 이렇게 이야기에서는 끝이, ‘엔딩’이 중요하다.
그리고 ‘엔딩’은 이렇게 행복하거나 슬프다. (종종 열린 결말, 이런 것도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런 엔딩은 엔딩이 아니다.) 해피엔딩 혹은 새드엔딩.
이 책은 두 가지 ‘엔딩’ 중 새드‘엔딩’에 대한 이야기이며, 해피‘엔딩’에 대한 이야기와 동시에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새드엔딩에 관한 이야기
이 책에서 시인 권민경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아우르며 새드엔딩을 이야기한다. 새드엔딩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왜 새드엔딩이 다른 어떤 결말보다 더 나았는지를 이야기한다.
주인공 강백호의 일본 이름인 사쿠라기 하나미치란 이름이 찰나에 꽃을 피우고 화려하게 퇴장하는 강백호의 선수 생활을 의미하든 않든, 시인은 만화 ‘슬램덩크’를 보며 자신의 ‘영광의 시절’이라 부를만한 시기를 떠올린다. 그다지 행복했던 기억이 없었기에, 역으로 그때가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는 것을 직감했던 어느 봄날의 풍경, 꽃잎이 흩날리는 밤을 떠올린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영광의 시절이 있다고, 영광의 순간은 찰나처럼 지나가지만 또 다른 영광의 시절이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열광적인 사랑을 받는 ‘슬램덩크’처럼.
게임의 마지막에서, 함께했던 캐릭터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임 〈다키스트 던전〉은 필연적으로 새드엔딩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광명이기 때문이다. 이 비참한 모험에서 우리는 정신 붕괴를 일으킬 수도, 아님 영웅적으로 각성할 수도 있다. 그는 어쨌든 이 새드엔딩 속에서 한 가지를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긴다. 내 동료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슬픈 엔딩을 지켜본 자의 의무라 생각한다.
코난 도일은 독자들의 끈질긴 요구에, 죽었던 홈즈를 되살린다. 홈즈는 되살아났지만 소설 《명탐정 홈즈》에 대한 평가는 이전만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때로 원치 않은 새드엔딩이라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던 작품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새드엔딩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마치 인생의 비극을 받아들이는 태도 같기도 한 것이다.
새드엔딩 그러나
시인은 ‘피터 팬’을 볼 때마다 어른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슬픈 이유는 모험을 떠나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대체할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가 감정이입했던 웬디는 대체되었다. 첫사랑이 유일한 만큼, 자신도 유일하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여행은 언젠가 끝난다. 이제 어른이 된 그는 그것을 안다.
이렇게 이야기는 ‘새드엔딩’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고, 되어야 한다.
시 〈낚시질〉을 읽는 시인은 물고기같이 우는 화자의 눈물에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 이후엔 우리 모두 각자만의 삶을 만들어 갈 것이라 말한다. 남의 슬픔을 섭취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소화시키는 것, 그것이 새드엔딩을 읽는 의미일 터다. 우리 모두 ‘울고 나서 다시 만나’자. 이것이 이 ‘새드엔딩 이야기’의 엔딩이다.
중요한 건 ‘엔딩’이다-두 가지 ‘엔딩’ 이야기
우리는 영화를 본다. 드라마도 본다. 노래를 듣고, 소설을 읽고, 시를 읽는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림도 본다. 그러면서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 울고 웃는다. 대체로 이야기의 ‘끝’이 슬프면 울고, 행복하면 웃는다. 이야기가 시작할 때, 이야기가 전개될 때, 주인공이 행복하거나 불행한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끝’이 좋으면 모두 좋고 ‘끝’이 나쁘면 모두 나쁘다. 이렇게 이야기에서는 끝이, ‘엔딩’이 중요하다.
그리고 ‘엔딩’은 이렇게 행복하거나 슬프다. (종종 열린 결말, 이런 것도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런 엔딩은 엔딩이 아니다.) 해피엔딩 혹은 새드엔딩.
이 책은 두 가지 ‘엔딩’ 중 새드‘엔딩’에 대한 이야기이며, 해피‘엔딩’에 대한 이야기와 동시에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울고 나서 다시 만나 : 새드‘엔딩’ 이야기
$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