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호조판서 권이진

조선 최고의 호조판서 권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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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조선 붕당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흥미로운 혼맥!
노론 영수 송시열, 소론 영수 윤증, ‘사문난적’으로 처형된 남인 대표 윤휴는 남인의 대표 산림 권시를 중심으로 맺어진 인척이었다
격심한 당쟁 속에서 의연히 실사구시 관인의 길을 가며 최고의 재정 행정가(호조판서)가 된 권이진의 삶을 발굴 복원하다
부록: 〈열하일기〉보다 56년 앞선 〈연행일기〉

저자

권선준

저자:권선준
대전에서태어나대전고등학교와성균관대학교경제학과를졸업했다.20대에학생운동과노동운동에참여했으며그후국회,청와대,21세기리서치,언론진흥재단등에서일했다.대학에서한국사를가르친부친의영향으로줄곧역사를통해정체성을확인하고인생의목표를찾는삶을살아왔으며전통의가치를현재의시각으로되살리는데관심이많다.

목차


머리말

1.당파를넘어애민의길로

옹주의은주발은아니되옵니다
탄방동과권득기,권시부자
효심과우애로가꾼무수동
당파의굴레를넘은놀라운인연
중심을잡게해준가학의전통
노론의집요한발목잡기
순탄치않은벼슬길
추천도되기전에반대부터
왕보다당파의이익을우선하는붕당정치
탄옹권시와기해예송
구시(求是)와직(直),그리고무실(務實)
외조부송시열과고모부이자스승윤증
담백하고강직한성품
민생을우선하는실무관인

2.조선최고의호조판서

반드시권판서와같기를바라오
재정안정을위한불가피한선택
왕실납품상인들의독점이익을깨다
상업의성장과특권상인의등장
낭비를줄이기위한외로운싸움
공납비리에맞서다
정경유착의숨은핵경아전
근대적재정원칙을수립하다
백성들의일곱가지고통
일곱가지폐해에대한민생개혁안
조운(漕運)개혁안을내다
억울한아낙의한을풀어주다
호족의토지겸병방지와애민정책
유능한목민관
백성의억울한옥사를구제하다

3.자주외교,국방을위해

대일무역의질서를잡다
왜관에서발생한간통사건
전략적외교의성과‘신묘약조’
왜인들의왜관난출을제압하다
대일관계의‘제변지계(制邊之計)’
성공적실무관인
열번이나오가며수립한금정산성계획
성안으로읍을옮겨야
영호남연안의방어책강화
충렬별사를세우다
〈동래부순절도〉와화기(畵記)
평안감사권이진
대청무역의적폐
위태로운북변방어책
힘겨운마지막벼슬길

4.의인권이진의아름다운인연

명당실기(明堂室記)
하거원기(何去園記)
부친권유에대한회한
삼태사향사(享祀)와족보판각
만회집판각과만회의왕도정치론
실학의선성(先聲)
벼슬길에도식지않은학구열
동경잡기간오(東京雜記刊誤)
경종과의인연
최석정과의교류
제주판관남구명을전송하며
영조의치제문

부록

연행일기

출판사 서평

조선붕당사를다시써야할만큼흥미로운혼맥!
노론영수송시열,소론영수윤증,‘사문난적’으로처형된남인대표윤휴는남인의대표산림권시를중심으로맺어진인척이었다
격심한당쟁속에서의연히실사구시관인의길을가며최고의재정행정가(호조판서)가된권이진의삶을발굴복원하다
부록:〈열하일기〉보다56년앞선〈연행일기〉

오늘우리역사에서귀감이될새로운인물을발굴소개한다.조선영조때호조판서를지낸유회당권이진이다.
원광대유명종교수는“성호이익이묘지명을짓고번암채제공이시장을올린것으로보아그의학통과사상이유학사상사전회(轉回)의한기틀을마련한것으로생각된다”며유학자로서권이진을높이평가하였다.하지만그가더욱주목되는점은뛰어난행정가,실사구시관인으로서의면모다.
권이진은2년밖에안되는짧은재임기간에도불구하고나라의곳간을가득채우는성과를이뤄냄으로써훗날영조도그를최고의호조판서로평가하였다.임진왜란,병자호란양란과기후재해로황폐화되었던경제가점차회복되고는있었지만지속되는비리와부실한재정관리로인해당시국가재정은파탄직전이었다.권이진이얼마나재정건실화에노력했는지는영조가사랑스런옹주에게은주발을선물하려한것까지명분없는지출이라며완강히반대한에피소드에서일단을엿볼수있다.권이진은세금을더거두어들이는방식이아니라근대적이고합리적인재정원칙을수립하고,낭비를줄이고,비리를척결함으로써개혁의성과를이루어냈다.
훗날정조의개혁정치를보좌하며최고의영의정으로칭송된채제공은자신이호조판서를맡게되자조정의경대부들이서로“그대가반드시권판서와같기를바라오”라고했다며“공께서40여년전에호조판서를지냈는데도불구하고다스린법과시행했던일들이혁혁하게많은사람들의입에오르내렸다”고회고하였다.《조선왕조실록》에도흥미로운기록이실려있다.탐관오리의비리를징치한것으로유명한어사박문수가호조판서를맡았을때좋은평판을받았으나‘권이진이호조에있으면서재화를잘다스린것으로최고의칭예를얻은것에는미치지못하였다’는대목이다.
권이진의정책을면밀히연구한역사학자들도이러한평가에동의하고있다.충남대성봉현교수는〈유회당권이진의호조재정확보책〉이라는논문에서‘권이진을조선최고의호조판서로평가’하였으며,김준석연세대교수도권이진이‘그시기재정운용의최고능력가라는평판’을얻었다고평했다.
노론이주도하던당시정치구도속에서권이진은극소수파인남인출신이었다.그럼에도불구하고그가호조판서로전격발탁된데는무엇보다그의탁월한능력과정파에휘둘리지않고실사구시적올곧음을추구하던사람됨이영조의눈에띄었기때문일것이다.
권이진집안의혼맥및그에서파생한인간관계는조선붕당사를통틀어가장흥미로운대목이기도하다.그의외조부는노론의영수인우암송시열이고,고모부이자스승윤증은소론의영수이다.사문난적으로처형된남인대표윤휴의아들윤의제역시고모부였다.권이진의할아버지권시를중심으로당시붕당의대표인물들을망라하는놀라운인연이형성된것이다.
권이진은송시열과윤증에게서학문을배웠다.다채로운배경속에서숙명적으로다양한학문적세례를받을수밖에없었다.하지만그를더욱탄탄히붙들어세운것은증조부권득기와조부권시가확립하고전수한가학의전통이었다.‘매사에반드시옳음을추구한다’는구시(求是)의정신이그것이다.그리하여권이진은당파에기울어지지않으면서‘구시’의정신을바탕으로민생정치와현실적인경세문제를실현하기위해힘썼다.
격심한당쟁의세상에서실사구시관인의길을간권이진의삶은참으로독특하다.그는호조참판,호조판서등을맡아탁월한재정전문가로서의면모를보였을뿐아니라,힘없는백성들의부담을경감하고그들의목소리에귀기울이는애민적목민관으로서도큰사랑을받았다.또한동래부사를맡아자주적대일외교의기틀을마련하고남해안연안의방어책마련에획기적인개혁안을제시하였다.평안감사를맡았을때는일일이변방을순회하며대청무역의적폐청산및북변방어책확충에노심초사하였다.하나같이‘구시’를바탕으로한실천적행정가의면모라할수있다.
조선역사상행정가로서이같은삶을살고성과를낸사람은거의없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더욱이권이진같은재정행정가는전무하다.이책의집필은권이진이남긴문집《유회당집》이중심바탕을이루고있으며,그밖에《조선왕조실록》과당대문인들이남긴기록이전거로활용되었다.
권이진은1668년(현종9년)대전시탄방동(당시공주목유성현천내면탄방리)에서태어났다.권이진은할아버지권시가그곳에입향후호서(湖西)사람의일원으로활동함에따라자연히그영향을받으며성장하였고1707년대전보문산남쪽의무수동으로이사해정착하게된다.만년에는부모님묘소아래재실을짓고“날이새도록뒤척이면서두분이그리워잠못이루네(明發不寐有懷二人)”라는뜻으로‘유회당(有懷堂)’이라이름지었다.이후유회당은그의호가되었다.그는이곳을가꾸고일군과정을명당실기(明堂室記)와하거원기(何去園記)에남겼다.현재무수동에는유회당과삼근정사,거업재,장판각,여경암등이대전시유형문화재로지정되어보존되고있다.권이진은호조판서와평안감사를마친후고향무수동으로돌아와머물다가1734년67세를일기로생을마감하게된다.영조는치제문을지어그가이룬성과를칭송하며죽음을아쉬워한다.그의묘소는대전시중구어남동에조성되었다.
한편이책의미덕에추가해야할것이하나더있다.그것은권이진이1723년연경에사은사부사로가면서남긴〈연행일기〉이다.연암박지원의〈열하일기〉보다56년이나앞선기록이다.두글을비교해읽는다면조선시대연행사신의세계에대해보다깊이이해할수있을것이다.역사적기록으로서의가치가큰만큼전문을부록으로수록해독자의요구에부응하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