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 감추어둔 말들 (최명순 시집)

물속에 감추어둔 말들 (최명순 시집)

$10.00
Description
“강물처럼 세상을 적시는 순정한 시어!”
“가슴 깊이 간직했던 절절한 삶의 시편!”
생활의 언어로 담아낸 사연들
최명순 시인은 오래 전부터 문학의 길로 들어서고 싶었다. 그러나 교사와 화가의 아내로 살면서 그 꿈을 미루어야만 했다. 그렇게 세상의 굽이굽이를 한참이나 돌아온 끝에 가슴 속 깊이 감추어두었던 삶의 내력을 한 권의 시집으로 풀어놓았다.
『물속에 감두어둔 말들』에는 최명순 시인이 딸이자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아온 지난날들이 순정한 생활의 언어로 담겨 있다. 이 시집 속에는 한 여인의 전 생애가 구절양장 험한 고개처럼 앞을 가로막고 굽이마다 사연이 똬리를 틀고 있다.

서운하고 분하다고 서분이였을까
넷째 딸 ‘끝자’가 두 살에 죽고
뒤따라 태어난 서분이
툇마루에 앉아 아버지는 담배만 피우고
어머니는 핏덩이를 돌돌 말아 윗목에 밀쳐놓고

서운이 서북이 제멋대로 불리다
초등학교 입학 즈음
밝고 순하게 살라 개명했지만
서분이는 질질 그림자를 끌고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서분이」 전문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지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어려서 죽은 손위 언니의 이름도 심상치 않다. “끝자”는 이제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선언에 동원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높은 빈도로 딸 부잣집 여식의 이름으로 선택되었다. 딸그만, 끝순, 한자로 바꾸어 종희, 그리고 차남, 후남, 남경 등은 딸을 그만 낳고 아들을 낳으라는 주술적인 바람이 들어간 이름들이다. “서운하고 분하다고 서분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는 것을 단지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어린 마음은 큰 상처를 입는다.
저자

최명순

최명순시인은전북대학교영어영문학과를졸업하고중학교와고등학교교사로일했다.
『물속에감추어둔말들』은오랫동안문학을꿈꾸어왔던그의첫시집이다.

목차

1부아름다운이름
봄비/산길/비로소나를찾아/새벽별/옛편지/꿈길/시계/이별후/아름다운이름/자화상/서분이/능소화/물속에감추어둔말들/깊은슬픔/이사가는날/빈집/산북에서/겨울산

2부밤마다꿈마다
밤마다꿈마다/아버지의구두/또다른이름/딸에게/고향집/어머니/큰언니/부부1/열무김치/부부2/어머니의가을/탯줄로묶인인연/부부3/그리운당신/김장하는날/길/결혼기념일/일기

3부꿈과사연을찾아
연필/시1/밥/귀가/모닥불/시2/병상에서/꿈과사연을찾아/세월/시3/기도1/장례식장/기도2/툰레샵호수/기도3/병실풍경/동행/기도4

4부화가의아내
화가의아내1/화가의아내2/화가의아내3/화가의아내4/화가의아내5/화가의아내6/화가의아내7/화가의아내10/화가의아내11/화가의아내12/화가의아내13/화가의아내14/화가의아내15/화가의아내16/화가의아내17

발문「덕분에마음은봄날」ㆍ정철성

출판사 서평

그리운이름들을호명하다
시집『물속에감두어둔말들』의화자는부모에게무조건순종하는딸이아니라,하고싶은일은여하튼하고마는성격의소유자이다.아버지가일찍돌아가신덕분에서분이가주로갈등하는대상은어머니였다.

나의어머니는곰보였습니다
그흉터가무에그리부끄러웠는지
길에서마주쳐도나는딴청만부렸습니다
어머니아래로열하나를낳아열은돌안에잃고
마지막외삼촌하나만건진외할머니는
딸이라서글을가르치지않았답니다
그래도어머니는
버스도잘타고셈도아주잘하는여장부였습니다
일찍청상이되어큰살림을꾸리며
항상문칸방에는멸치장사소쿠리장사들을
재워주고먹여주었습니다
그때는그게왜그리도싫었던지
…(중략)…
큰언니가첫아들을낳았을때
그리고내가선생이되었을때
어머니는환하게웃으셨습니다
평생좋다나쁘다별말이없던어머니였는데
그런어머니에게따뜻한밥상한번차려드리지못한게
내내억울하고속이상합니다
내나이스물여섯에돌아가셨으니철도들었으련만
-「어머니」부분

부모의흠을드러내는것은한국사회에서여전히금기에가깝다.그런데화자는천연두를앓고난후어머니의얼굴에남았던상처를언급한다.어린시절의화자는어머니가부끄러웠다.장애가놀림의대상이되었던시절이라고해도용서받지못할행동이었다는자책을면할수가없다.

큰언니는내게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항상먼발치에서있고
씻기고재우고업어준것은큰언니였지요
아버지얼굴도모르는막내가
언가슴에생손앓이로
열여섯살차이이니딸같다했습니다
아이에서소녀로처녀로너울너울날아갈때마다
큰언니는내허물을벗겨주고
은빛금빛새날개를달아주었지요

나시집간이듬해어머니돌아가시고
삼년후딸을낳자큰언니는외할머니였습니다
나를키우듯여전히딸에게빵도구워주고
인형도사주고옷도책도사주었습니다
그런큰언니가나를몰라봅니다
뉘시오,어디사시오묻습니다
-「큰언니」부분

아버지가돌아가시자생계를짊어진어머니는막내까지보살필겨를이없었다.그때어머니의자리를대신한것이큰언니였다.큰언니의손에서막내는아이,소녀,처녀를거쳐성장했고결혼도했다.막내가딸아이를낳자큰언니는이모가아니라외할머니의역할을스스로차지했다.그런큰언니가사람을몰라보는치매에걸렸다.“그런큰언니가나를몰라봅니다”라는말은서글프다.“뉘시오,어디사시오”라고묻는말은더욱쓰라리다.

화가의아내로살아온나날
‘화가의아내’연작은최명순시인이감내해야했던또다른삶의모습을보여준다.“팔자순하라고수수팥떡”을생일마다잊지않고챙겨주었는데딸이데려온신랑감은화가였다.어머니는“많고많은사람중에/하필이면가난한그림쟁이냐고/내내푸념하셨”(「화가의아내1」)다는대목에서화가아내의삶도순탄치않았음을짐작할수있다.

그림이전혀돈이될수없던시절엔
변변한저녁한끼살수없는그가야속하기도했다
그런데그림이돈이되어쌀도사고술도사오는날
왜나는가슴이저릴까
-「화가의아내2」부분

돈이될수없던시절은길었다.그래서야속했다.그런데돈이가져온것에는무엇인가빠져있다.그래서가슴이저린다.우리는둘다가질수없다.“남루한줄만알았던내인생이화려했음”과“쓸쓸하기만한줄알았던내인생이따뜻했음”을알면족하지않은가?(「화가의아내14」)이정도의만족이라면충분히쓸쓸함을면할수있을것이다.
일상이우울하고막막할때최명순시인은“시라는것에기대어/나를다독이고쓰다듬는다”.(「시2」)이시집을통해비로소누군가의아내이자생활인의자리에서문학의길로들어선최명순시인의다음행보가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