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오고 사람이 온다

꽃이 오고 사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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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나희덕

1966년충남논산에서태어나연세대국문과와동대학원박사과정을졸업했다.1989년중앙일보신춘문예에시「뿌리에게」가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현재서울과학기술대학교문예창작학과교수로재직중이다.김수영문학상,오늘의젊은예술가상,현대문학상,이산문학상,소월시문학상,임화예술문학상,미당문학상등을수상했다.

시집으로『뿌리에게』,『그말이잎을물들였다』,『그곳이멀지않다』,...

출판사 서평

“시의힘으로시대와시간을넘어”
‘시힘’동인의신작시집이나왔다.‘시힘’동인은1984년고운기시인의제안으로갓등단한20대의젊은시인들로결성되었다.1985년첫동인지『그렇게아프고아름답다』를출간한이후『아름다운불륜』까지열권의동인지를펴냈다.
초창기에는고운기,고형렬,김경미,김백겸,나희덕,박철,안도현,양애경,정일근,최영철등을중심으로활동하던‘시힘’은그동안김성규,김수영,문태준,박형준,이대흠,이병률,이윤학,휘민등새로운시인을동인으로영입했다.그렇게30년넘게이어져오면서‘시힘’은한국을대표하는문학동인이되었고,‘시힘’의시인들은중견시인으로성장했다.
이번에경북예천에서새롭게출범한‘몰개’출판사가첫책으로펴낸『꽃이오고사람이온다』는‘시힘’창단40주년을앞두고열여섯동인들의신작시와산문을묶은열한번째동인지이다.
1985년에발간된‘시힘’의첫동인지『그렇게아프고아름답다』의서문에는다음과같은내용이등장한다.

첫째,“우리는건강한삶에기반을두겠으며,시의서정성이바탕색에짙게깔리도록노력할것이다.”
둘째,“우리들의시가각각의목소리를지니고있으면서결코어긋나지않고조화를이룬다는점을자각하고충분히존중해줄것이다.”
셋째,“무엇보다나아닌남에대한진정한이해속에서분열과대립을극복하는문학이얻어질것이라믿는다.”

‘시힘’동인지의창간호서문은결코전투적이거나비장하지않지만힘이있다.‘삶에기반을둔서정성’,‘각각의목소리의가치와조화,그리고상호존중’,‘남에대한진정한이해속에서분열과대립을극복하는문학의지향’등은1990년대이후한국문학의다양성속에서그진가를발휘해왔다.‘시의힘’이시대와시간을넘어선것이다.

“한시대를관통해온시힘의자리”
한국근대문학초창기의동인지시대부터동인지는동인간의상호인정과다른문학적집단과의인정투쟁을태생적으로지닐수밖에없었다.대부분의동인지창간서문은인정투쟁을위한비장한각오와함께기성문단의나태함과척박한문학환경을무릅쓰고문학에헌신하겠다는순교의식이과장된형태로선언되었다.
이런선언주의는동인지활동을단명시키는주원인으로작용하기도했다.선언은종종‘다름’에대한관용을차단하는아집으로바뀌거나변화하는시대환경에대한적응과변화를방해하기때문이다.
대부분의동인은시간이지나면서신진으로서의패기가진정될즈음,스스로동인의시대적사명과역할이그의미를다마쳤다는또다른선언과함께활동을종료하거나저절로해체된다.동인을결속시켰던문학적신념이시간이지남에따라그결속력을잃게되면,동인은더이상지속적인활동을할이유와의미를찾을수없기때문이다.
이런측면에서보면,37년째동인활동을유지하면서동인시집을발간하고있는‘시힘’은동인이상의어떤특별함을지니고있다.이러한예외성은,대부분의문학동인이표방했던공통된문학적이념이나강한결속을‘시힘’은애초에지니고있지않았다는점에서기인한다.1980년대에결성된동인이‘시대’,‘이념’,‘강한결속’이없이37년간유지되었다는사실은역설적이다.더구나‘시힘’동인대부분이한시대를관통하며문학적자리를굳건히지키고자신의시적위치를확실히다져온시인들이라는점에서더욱그렇다.

“깨지지않고버티면서지켜나가기”

흰모란꽃위에바위를얹었지요

그바위가삭아주저앉기를기다리면서요

모란꽃흰접시는천년이지나도록깨지지않았어요

한번도눈내리는마을을보지못했다는모란꽃

꽃대를잘라창틀을짜고꽃잎으로통유리를달았지요

눈발이창턱에눈썹을걸어두고가더니

흰모란꽃이피었어요

흰모란꽃에눈맞추다가눈이멀어버린나비처럼
-안도현,「모란꽃」전문

「모란꽃」에는안도현시인의시적자의식과시이력에대한상징적인압축이포함되어있다.“모란꽃위에바위를얹는일”,이런표현은그자체로시창작의알레고리로읽힌다.‘시대의고통’,‘건강한삶의추구’,‘민중’등시가짊어져야할것들은태산같은바위이다.그리고그태산의무게가결국은모란꽃위에서삵아주저앉고만다.
어쩌면시가할일은그바위를무너뜨리는게아니라그무게를견디고그것이삵아주저앉기를기다리는일인지도모른다.시의힘이란,물리적인것이아니다.모란꽃의흰접시가깨지지않고천년을버티듯이,시나예술의힘은깨지지않고버티며스스로를지키는일이다.
이런식으로아름다운것들의일은불가능한것이가능해지는상상속에서미의세계를스스로구축하는일이다.“눈발과흰모란꽃과나비”가서로를호명하고눈맞추고조응하듯이,조용히‘눈이멀어버리는’일이다.
시인으로늙어가는일과조용히눈멀어버리는일은모두무엇엔가깊이매혹되어버린자들의숙명같은것은아닐까.모란꽃접시가천년을버텼다면,그긴시간은어쩌면길고긴망각의시간,세상의풍파속에서조용히침잠하면서눈멀고귀머는,그렇게자신을세상에던지면서삭히는시간이다.

“잔잔한슬픔과연륜이깃든시세계”
이번시집에실린동인들의작품에서굳이연륜을읽는다면,그것은단순한세월이아니라바위가삭아주저앉듯이스스로를비우고지우는시간들이만든나이테같은것이다.

바위같이살라지만
조상들저안에다있지
흙이야잠시머무는간이역쯤

강가를밟으며조약돌하나주워
생각느니이돌도예서서너세월만가면
부서지고닳아지고잊어버리면서
무정한바다에닿겠구나
모래가되어야무진대로조금은더반짝이다가
결국은짠물에절여지겠지
그러다떠올라구름속에세탁도좀하고
영혼은푸르게비가되어돌아오겠네
몸은강가를다시오가겠네

바위처럼살라지만
거기서나와잠깐거닐다가는
잰걸음길아닌가
-박철,「조약돌」전문

박철시인의「조약돌」에도이런특징은잘드러난다.다만박철시인의‘세월’은기다림이나견딤보다는어차피거기서거기인인생의허탈과무상을매순간되새기는잔잔한슬픔을주로보여준다.동인들마다각자의개성이고유하듯이,세월의풍파를건너고연륜을만드는방법도조금씩다른것이다.“부서지고닳아지고잊어버리면서”결국“무정한바다”에닿는것.그것이인생이라면,어차피흐르고지나가는시간들은모두잠시이고잠깐의연속일뿐인것이다.


“미래에대한희망을꿈꾸는사람”
‘시힘’이라는동인의이름은,한때는추상적이고모호하며지향점이뚜렷하지않은허약한것이었지만결국37년의시간을버텨왔다.이37년의시간은그들의문학적연대기라고할수있다.어쨌든그들은대략37년동안꾸준히시를써온것이다.그래서이번동인시집은‘시힘’동인의문학적이력에대한스스로의‘헌사(獻辭)’로도읽힌다.또세기말과세기초,냉전시대를지나세계화시대의비인간적일상속에서도열심히살아가고있는한때‘시힘’의독자였고시의독자였던사람들에게바치는‘헌정시집’이기도하다.
애초에‘시의힘’이‘삶,인간,상호존중’이라는가치에대한신념에있었던것처럼,‘시힘’의원천은,아직도여전히건강한삶을갈망하고미래에대한희망을꿈꾸는사람들에게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