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三命通會』는 명리학 최고 최대의 분량과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5대 명서(命書) 중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관찬(官撰)이라는 영예를 지닌 자료이다.
이 책 『삼명통회』의 지은이는 ‘육오(育吾) 만민영(萬民英)’으로 알려져 있다. 원서(原 書)의 판본인 사고전서(四庫全書)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형태로, 명대(明代)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자료를 청대(淸代)에 와서 다시금 총망라한 거대한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진 ‘흠정(欽定)’이란 말은 천자의 일 또는 황제의 명에 의해 이루어진 작업을 의미하며, 이는 임금의 명에 의해 관에서 직접 그 작업을 총괄했다는 ‘관찬’의 뜻이 부가된 것이다.
역자가 원본으로 삼은 자료는 대만 국립중앙도서관 장본으로, 대북 시의 육림(育林) 출판사에서 영인한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삼명통회 전체 원문 뒤에 [명학칠종(命學七種)]이라 하여 ‘예술전 565권 성명부휘고1, 옥조신응진경(玉照神應眞經)-총단’을 필두로 계속해서 ‘566권 휘고 2, 천원수기무함경(天元秀氣巫咸經)’, ‘587권 휘고 23 벽오경(壁奧經)-120격, 망두경(望斗經)1-상’을, 다음으로 ‘588권 휘고 24 망두경 2-중·하편’ 그리고 계속해서 ‘589권 휘고 25, 금당보천경구(琴堂步天警句)-총론·금당오성회론(琴堂 五星會論)-부귀 69 격’, ‘590권 휘고 26, 금당지금가(琴堂指金歌)’를, 이어서 ‘591권 휘고 27, 마준부(磨?賦)-총론, 난대묘선(蘭臺妙選) 1-상’을, 마지막으로 ‘592권 휘고 28로, 난 대묘선2-중·하편’의 책들을 수록했다는 점에 있다.
명대(明代)에는 영락대전(永樂大全)을 필두로 자료들을 수집하고, 청대(淸代)의 사고전서(四庫全書)는 다시 이를 재편하면서 통치 수단의 하나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금도서집성은 ‘제요’가 기록된 건륭제의 시기보다 앞서는 강희제(康熙帝) 때 이미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여기에 수록된 ‘제요’의 글은 좀 더 뒤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런 불확실함 속에서도 『삼명통회』를 만민영(萬民英)의 소작으로 판단하는 것은 삼명통회의 전체 글 가운데서 나의 사주는 이러하다는 몇 군데의 글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함 속에서도 『삼명통회』를 만민영(萬民英)의 소작으로 판단하는 것은 삼명통회의 전체 글 가운데 나의 사주는 이러하다는 몇 군데의 글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책은 여러 명서(命書) 가운데 그 작자가 알려진 몇 안 되는 자료 중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만민영은 명(明)대 하북성(河北省) 사람으로 자(字)는 여호(汝豪), 호(號)는 육오(育吾)이다. 명나라 세종(世宗) 때인 경술(庚戌) 1550년에 진사(進士)로 벼슬길에 올랐고, 그 후 하남성(河南省)에서 도어사(都御使), 복건성(福建省)의 포정사(布政司)에서는 참의(參議)하였다. 이는 지금의 차관보(次官補)에 해당한다. 그리고 1578년에 『삼명통회』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삼명통회』는 원전의 분량상 쉽게 엄두를 내기 힘들 만큼의 방대한 내용을 자랑한다. 물론 꼭 필요한 것만 추려낸다면 확 줄일 수도 있는 그런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문이란 어떤 것인가. 취사선택은 후대의 공부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요, 원전은 원 전대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삼명통회』는 5대 명서의 다른 자료들과 달리 원문 자체에서 간명(看命)과 관법(觀法) 에 따른 이론적 근거를 더 많이, 그리고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어 《적천수(適天髓)》나 《궁통보감(窮通寶鑑)》의 경우라면, 원래의 원문은 간명의 방식과 판단을 밝힐 뿐 그에 따른 세세한 해설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원문의 분량 자체도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이후 많은 강호의 학자 제현께서 주석과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방대한 내용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 책 『삼명통회』의 지은이는 ‘육오(育吾) 만민영(萬民英)’으로 알려져 있다. 원서(原 書)의 판본인 사고전서(四庫全書)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형태로, 명대(明代)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자료를 청대(淸代)에 와서 다시금 총망라한 거대한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진 ‘흠정(欽定)’이란 말은 천자의 일 또는 황제의 명에 의해 이루어진 작업을 의미하며, 이는 임금의 명에 의해 관에서 직접 그 작업을 총괄했다는 ‘관찬’의 뜻이 부가된 것이다.
역자가 원본으로 삼은 자료는 대만 국립중앙도서관 장본으로, 대북 시의 육림(育林) 출판사에서 영인한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삼명통회 전체 원문 뒤에 [명학칠종(命學七種)]이라 하여 ‘예술전 565권 성명부휘고1, 옥조신응진경(玉照神應眞經)-총단’을 필두로 계속해서 ‘566권 휘고 2, 천원수기무함경(天元秀氣巫咸經)’, ‘587권 휘고 23 벽오경(壁奧經)-120격, 망두경(望斗經)1-상’을, 다음으로 ‘588권 휘고 24 망두경 2-중·하편’ 그리고 계속해서 ‘589권 휘고 25, 금당보천경구(琴堂步天警句)-총론·금당오성회론(琴堂 五星會論)-부귀 69 격’, ‘590권 휘고 26, 금당지금가(琴堂指金歌)’를, 이어서 ‘591권 휘고 27, 마준부(磨?賦)-총론, 난대묘선(蘭臺妙選) 1-상’을, 마지막으로 ‘592권 휘고 28로, 난 대묘선2-중·하편’의 책들을 수록했다는 점에 있다.
명대(明代)에는 영락대전(永樂大全)을 필두로 자료들을 수집하고, 청대(淸代)의 사고전서(四庫全書)는 다시 이를 재편하면서 통치 수단의 하나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금도서집성은 ‘제요’가 기록된 건륭제의 시기보다 앞서는 강희제(康熙帝) 때 이미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여기에 수록된 ‘제요’의 글은 좀 더 뒤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런 불확실함 속에서도 『삼명통회』를 만민영(萬民英)의 소작으로 판단하는 것은 삼명통회의 전체 글 가운데서 나의 사주는 이러하다는 몇 군데의 글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확실함 속에서도 『삼명통회』를 만민영(萬民英)의 소작으로 판단하는 것은 삼명통회의 전체 글 가운데 나의 사주는 이러하다는 몇 군데의 글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책은 여러 명서(命書) 가운데 그 작자가 알려진 몇 안 되는 자료 중의 하나가 되는 셈이다.
만민영은 명(明)대 하북성(河北省) 사람으로 자(字)는 여호(汝豪), 호(號)는 육오(育吾)이다. 명나라 세종(世宗) 때인 경술(庚戌) 1550년에 진사(進士)로 벼슬길에 올랐고, 그 후 하남성(河南省)에서 도어사(都御使), 복건성(福建省)의 포정사(布政司)에서는 참의(參議)하였다. 이는 지금의 차관보(次官補)에 해당한다. 그리고 1578년에 『삼명통회』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삼명통회』는 원전의 분량상 쉽게 엄두를 내기 힘들 만큼의 방대한 내용을 자랑한다. 물론 꼭 필요한 것만 추려낸다면 확 줄일 수도 있는 그런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문이란 어떤 것인가. 취사선택은 후대의 공부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요, 원전은 원 전대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삼명통회』는 5대 명서의 다른 자료들과 달리 원문 자체에서 간명(看命)과 관법(觀法) 에 따른 이론적 근거를 더 많이, 그리고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어 《적천수(適天髓)》나 《궁통보감(窮通寶鑑)》의 경우라면, 원래의 원문은 간명의 방식과 판단을 밝힐 뿐 그에 따른 세세한 해설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원문의 분량 자체도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이후 많은 강호의 학자 제현께서 주석과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방대한 내용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신 삼명통회(하) (양장본 Hardcover)
$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