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었고, 길의 끝에는 언제나 또 다른 길이 이어졌다.
젊은 날 설악산에서 시작된 산과의 인연은 히말라야의 높은 길을 지나 남미의 안데스와 파타고니아까지 이어졌다.
멀리 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찾아 나선 것은 낯선 풍경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힘겨운 오르막에서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았고, 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속에서 내가 살아온 날들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수많은 산과 길을 지나 돌아온 자리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었고, 평범해서 미처 수중한 줄 몰랐던 나의 하루가 있었다.
산 너머에 또 산이 있듯이, 삶 너머에도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처음부터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사진 한 장 남기고, 그날의 느낌을 짧게 메모하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을 거듭할수록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풍경은 희미해지고,, 사진 속 장소의 이름도 잊게 되지만, 그 길에서 느꼈던 마음만은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히말라야 산길에서 마주한 새벽 공기를 적고, 어떤 날은 남미의 낯선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를 적었다. 때로는 기대와 설렘을, 때로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적었다. 그렇게 한 줄씩 써 내려간 기록은 어느새 여행의 메모를 넘어 내 삶을 돌아보는 일기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 책은 여행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 삶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여행 작가도 아니고, 전문 산악인도 아니다. 평생 작은 사업을 하며 가족과 함께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특별한 성공담도 없고, 남들이 흉내낼 만한 모험담도 없을 것이다.
대신 평범한 한 사람이 늦은 나이에 새로운 길을 걸으며 조금씩 변해 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쓰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억 때문이다. 언젠가는 나도 이 여행의 세세한 풍경을 잊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글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내가 걸었던 길과 그 길에서 품었던 생각,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조금씩 달라져 간 내 모습을 글로 남겨 두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 책이 훗날 내 가족에게 작은 선물이 되었으면 한다. 아이들과 손주들이 언젠가 이 책을 펼쳤을 때, ‘우리 아버지는, 우리 할아버지는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걸었구나’ 하고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책은 충분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세상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 삶을 향한 고백이다. 그리고 그 고백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길을 시작할 용기가 되기를 조용히 소망해 본다.
나는 그곳에서 자연을 배웠고, 계절을 배웠으며, 사람의 정을 배웠다. 아마도 훗날 높은 히말라야 산길에서 야크 무리들이 풀을 뜯는 모습에 발길을 멈추고, 남미의 광활한 대자연 앞에서 오래도록 말을 잊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아온 곳을 떠날 수는 있어도, 그곳에서 받은 기억까지 떠날 수는 없다.
지금도 나는 여행길에 오를 때면 마음 한편에서 부암동 인왕산 자락의 바람을 떠올린다. 내가 세상 어디를 걷든, 내 삶의 첫걸음은 언제나 그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여행은 내게 한 가지 소중한 선물을 안겨 주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겠다.’
그 믿음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마음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만족보다, 무언가를 남겨 두고 온 듯한 아쉬움이 더 컸다.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보며, 조금 더 오래 히말라야의 품 안에 머물러 보고 싶었다. 그 아쉬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선명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안나푸르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여행은 내게 히말라야를 보여 준 것이 아니라, 다시 히말라야를 찾게 만들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마음이 훗날 나를 다시 히말라야로 이끌고, 더 높은 길을 홀로 걷게 만들며, 남미와 또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긴 여행의 출발점이 될 줄은….
그 길은 조금 더 험하고, 조금 더 외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꼭 걸어 보고 싶었다. 그때 나는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낯선 자연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조금 더 오래 머물며, 그 길 위에서 나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 나를 다시 그 길 위로 불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말라야가 그랬고, 남미도 그랬다. 한 번의 여행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아쉬움은 언제나 다음 여행의 이유가 되고, 다음 여행은 또 다른 꿈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이 책은 처음 다녀온 히말라야와 남미의 기록이 아니다. 그 여행들이 내 마음속에 남겨놓은 아쉬움이 어떻게 또 다른 길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