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미술관

아무튼, 미술관

$12.00
Description
“마침내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이 된다”
‘아무튼 시리즈’ 여든 번째 책.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기울어진 미술관』 등으로 독자들과 소통하며 미술의 대중화에 앞장서 온 이유리 작가의 신작 에세이로, 오랜 시간 미술관을 오가며 보고 느낀 마음들을 솔직한 언어로 풀어냈다. 그의 전작들이 주로 화가와 작품을 둘러싼 권력 구조 및 불평등에 관한 문제의식을 짚어내는 데 집중했다면, 『아무튼, 미술관』은 보다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선사한 잊지 못할 순간들을 복기하는 동시에 그 안에서 어떻게 위로받고 성장했는지를 내밀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려낸 명화를 스크랩해 ‘나만의 미술관’을 만들던 유년의 기억에서 출발해 문턱이 닳도록 갤러리를 드나들었던 런던 어학연수 시절을 거쳐 천경자의 그림 앞에 서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먹은 순간까지, 책 속에는 인생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늘 마주쳤던 미술관에 관한 이야기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또한, 누구보다 미술관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액자와 굿즈, ‘무제’라는 제목을 단 작품에 얽힌 뒷이야기 등 우리가 미술관에서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작은 것들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도 놓치지 않는다.

“이름 모를 독자와 둘이서 미술관을 거니는 듯한 마음으로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 고요한 미술관 내부를 그와 함께 소요하다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저자

이유리

저자:이유리
미술교과서와신문에서마음에드는그림들을발견하면오려모으던아이였다.영국으로어학연수를떠났다가런던의많은미술관과갤러리를원없이누볐고,그결과영어실력대신나만의미술이야기를한가득품고돌아왔다.『한겨레』『오마이뉴스』등에미술칼럼을연재했으며여성의시선으로본예술사,을의편에선예술가등을주제로인문학강의도하고있다.앞으로도글쓰기와강의를통해,그림이펼쳐보이는세계를더많은이와나누고싶다.지은책으로『왜유명한거야,이그림?』『나는그림을보며어른이되었다』『기울어진미술관』『캔버스를찢고나온여자들』『화가의마지막그림』등이있다.


목차

첫만남
일단미술관으로돌진하기
기다림의자세
불편한예술
공간의힘,로스코
뒷모습
스탕달신드롬
미술관에가는여자들은위험하다
장롱을여는일
미술관에가면왜다리가아플까
화이트큐브
무제
액자
굿즈
지구에해로운미술관?
대안으로서의미술관
미술관으로변신한공간들
조금더다정한미술관
일상에서아름다움을발견하는연습
삶의마지막페이지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19~20p
그렇게자주그림을보다보면어느순간시야가트인다.대부분의미술관에서는비슷한시대의작품을모아서전시한다.작가는달라도주제나소재가비슷해어느순간공통의패턴이눈에들어오고,그림이전하려는메시지를자연스레감지하게되는것이다.예컨대,나는스틸라이프(StillLife)라는단어가‘정물화’를뜻한다는사실조차몰랐다.그런데16~17세기네덜란드·플랑드르전시관에가니해골과꽃,촛대가나오는작품이끊임없이등장하는게아닌가.그림속촛불은꺼지고,꽃은시들고,과일은썩어들어가고있었다.누구도내게설명해주지않았지만,비슷한작품을줄곧보다보니자연스레그림들이내뿜는허무함을감지할수있었다.나중에야그것들이라틴어로공허,가치없음을뜻하는‘바니타스(Vanitas)’정물화라는것을알았다.아무리아름다워도,아무리많은부와명예를갖고있더라도,우리모두는언젠가는죽을수밖에없는존재라는진실.메멘토모리(MementoMori),즉‘네가죽는다는사실을기억하라’는교훈을주는그림장르가바로스틸라이프,정물화였다.

38~39p
불편하고도진실한예술은그런것이다.비겁한나를향해득달같이달려와마음깊숙한곳에자리잡은편견의머리채를잡고뿌리까지사정없이뜯어내는,바로그런존재.미술관은그래서때때로성찰의장소가된다.예술작품을보러들어갔지만,끝내나자신과맞닥뜨리고나오는곳.

51~52p
그러고보면미술관과뮤지엄같은공간은참묘하다.이곳에들어서면관람객은공간이주는‘힘’에의해스스로작품이되는새로운경험을하게된다.사람뿐이랴.이공간에들어온사물들도마찬가지다.예컨대미술관구석에놓인의자는사실전시지킴이의휴식용의자일뿐이다.하지만왠지작품같아서멀찌감치서서봤던적이한번쯤은있지않은가?

72p
그림을본다는것은자신혹은타인과대화를나누는행위와다름없다.혼자전시를본여성들은눈앞의작품을곱씹으며질문하고,생각했다.그질문은기존질서에대한의문을낳았고,그의문은독자적이고주체적인세계상을키웠다.이때여성들의머릿속에싹튼세계상은가부장제가강요해온‘전통적인모습’과단연코일치하지않았다.미술관은그녀들의상상력에날개를달아줬고,상상력은여성이가부장제의일렬종대에서벗어나“문턱너머저편”(시인에이드리언리치의표현)으로날아가는데에힘을보탰다.문턱너머저편엔무엇이있을까.아무도몰랐다.심지어여성자신조차도.

84p
세시간동안실내에서걷기만했을뿐인데,왜국토종주라도한듯진이빠지고발바닥에서불이나는걸까.머리는멍해져어느덧‘저것은노랑이요저것은빨강인가?’수준이된다.알고보니이증상에는이름이있었다.바로‘뮤지엄레그(MuseumLeg)’.나만의독특한문제가아니라많은이가겪는현상이었던것이다.그런데루브르같은대형미술관뿐만아니라작은미술관을돌아본뒤에도우리는종종‘뮤지엄레그’에시달린다.도대체왜그럴까?

107p
미술관을거닐다보면그림만큼이나자주마주치는것이바로액자다.그림을돋보이게해주는조연이지만,때로는이액자자체가눈길을사로잡을때가있다.어느날문득그림과한몸처럼붙어있는액자를보며이런생각이들었다.‘액자는내게‘닻’이자‘돛’이면서‘덫’이로구나.’

118~119p
알랭드보통에따르면,미술관관람의진정한핵심은예술가의눈을통해세상을보고그들이사랑했던것을세심하게들여다보는것이다.그렇기에중요한것은그예술가가좋아했을법한물건,그의작품세계와통하는물건(굿즈!)을손에넣는데있다.곰곰이생각해보면맞는말이다.우리가미술관에서길어올린교훈들,즉아름다움의의미,정신의확장같은것들은미술관을나오는순간,대개허무하게사라지고만다.하지만기념품은미술관에서느꼈던감동을오랫동안우리마음속에머물게하고,일상과부드럽게이어주는다리역할을한다.그래서기념품숍이야말로현대사회에서예술을보급하고이해시키는전초기지라할수있다.

135~136p
그렇다.이것이바로미술관의태생적한계다.‘이제막터져나온저항정신’도미술관문턱을넘는순간,그본래의날카로움을잃기십상이다.미술관은작품을보호하고관리하는제도적틀이기에그곳에서공인된예술은관람객과편안하게만난다.하지만그만큼도발적메시지가중화될위험도크다.때로는예술가들이미술관과손을잡는것이‘파우스트적거래’처럼보일때도있다.미술관의권위속에서작가의불온한목소리가약화되거나중립적인시각으로해석될위험이있기때문이다.그렇게나뾰족했던〈올랭피아〉도오르세에입성하자완전히무장해제되었고,뱅크시의날카로운조롱역시미술관이라는‘청정지대’에들어서는순간체제가부여한권위에흡수되었듯이말이다.오죽하면‘미술관이예술가를사랑하는방식은박제사가사슴을사랑하는방식과같다’는우스갯소리가생겨났을까.

145~146p
어쩌면누구나자기만의미술관을마음속에품고살아가는지도모르겠다.유년시절의꿈,첫실패의기억,사랑과상실의흔적까지그모든삶의파편이차곡차곡전시되어있는내면의공간.때론먼지만쌓인채오랫동안닫혀있던그방을우리는스스로들여다보지않을때가많다.하지만어떤계기만생긴다면,그방은다시열릴수있다.

149p
미술관과박물관에갈때마다의도치않게나자신의무식함(?)을새삼확인하곤한다.전시된작품의제목을보는순간부터자괴감이덮친다.예를들어국립중앙박물관에소장된국보제170호백자청화매조죽문유개호(白磁靑畵梅鳥竹文有蓋壺)를보자.분명히한글로읽었는데,무슨말인지도통아리송할뿐이다.어디서끊어읽어야할지도헷갈린다.한자를기계적으로한글로만바꿔놓았기때문이다.내당혹감은병기되어있는영어제목을보고서야풀렸다.WhitePorcelainLiddedJarwithPlum,BirdandBambooDesigninUnderglazeCobaltBlue.‘아,코발트블루빛깔의매화·새·대나무그림이그려진,뚜껑달린백자항아리구나!’영어제목이더쉽고명쾌하다니,이게무슨일인가싶다.여기는미국이아니라대한민국인데.

167p
미술관에는이미인생의마지막페이지를넘기고뒤표지까지닫은예술가들의작품이걸려있다.하지만우리가접하는건대개그들의생애말기에그려진소수의작품만이아니다.아직답을찾지못한채인생이라는망망대해에서표류하던순간에작가가남긴수많은흔적도함께전시된다.나는그앞에서서어떤미래가닥칠지모르는채붓을쥐고있는순진무구한눈빛의그들을상상해보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