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소진시켜줘.이세상끝으로데려가줘.”
우리가사랑하는생,사랑할생,사랑했던생이뒤섞여파도처럼부서진다!
버지니아울프문학의정점으로꼽히는소설『파도』(TheWaves,1931)가희곡으로출간되었다.연극과뮤지컬을오가며활발히활동하고있는연출가김민정이원작소설을직접번역하고재구성한작품이다.
“희곡―시아이디어;인간의생각만이아니라배,밤등모든것이함께흐르는어떤연속적인흐름의아이디어”.버지니아울프가자신의일기장에남긴이구절은소설『파도』의본질을가장정확히관통한다.소설『파도』는전통적인소설문법을거부한다.작품속인물들은시간에따라변화하는각자의내면을발화할뿐이다.그독백들은은유와상징으로가득한시적문장속에서뒤섞이고겹쳐지며어느순간누구의목소리인지,마치파도가밀려왔다부서지듯경계가흐려진다.이들의삶도파도위를흐른다.생의충만함과소멸,연대와고독,삶과죽음이파도의리듬으로반복된다.
김민정은이방대한내면독백의흐름을꼼꼼히짚어,원작의시적감수성을훼손하지않으면서새로운희곡의언어로압축했다.소설이독자에게“누가하는말인지방향을잃게”만드는것처럼,희곡역시경계의흐릿함을의도적으로보존한다.다만희곡이라는형식의미덕을살려독자에게소리와리듬의감각을전하면서소설에가닿는또다른문을열어준다.
형식이곧주제―여섯명의배우가여섯개의배역을모두살아내다
소설의구조는하루동안태양이뜨고지는자연풍경을묘사하는‘간주’와,여섯인물의내면독백으로이루어진‘장면’이교대로배치된다.파도가끊임없이밀려왔다부서지듯,인물들의삶도그리듬을따른다.생의충만함과소멸,연대와고독,삶과죽음이파도처럼반복되며겹쳐진다.울프가모더니즘문학의극한에서빚어낸이소설이난해하다는평을피할수없는이유가여기에있다.잠자리날개처럼얇은감각의언어,의식과독백의연속적인흐름,읽다보면점점흐릿해지는인물들의경계.울프는이를의도적으로설계했다.“나는단순한하나가아니고복잡다단한여럿이라는사실이확실해져”라는소설속문장처럼,개인의자아는고정된것이아니라타인과뒤섞이며움직인다.
김민정은각색을통해원작의아홉개간주와장면을일곱개로재구성하면서,방대한내면독백을희곡의언어로압축했다.인생의각시기마다인물별로문장을발췌해분류하고,인물내면의의식흐름은최대한유지하는방식을택했다.그는‘각색노트’에서“인물별대사는각장면의출발점이되며,원문을훼손하지않는범위안에서변주되었다”고밝혔다.
이희곡에서가장대담한선택은배역구성방식이다.여섯명의배우는매장면마다다른인물을맡으며,마지막장면에서는모두서술자버나드가된다.각색자는이를“한인물에내재한수많은타자를형상화하는가장명확한방식”이라고설명한다.특히마지막장면에서버나드가다섯친구를한명씩회상할때,각배우는앞선장면에서가장감각적으로각인된인물의대사를발화한다.예를들어,4장에서루이스의연기로각인된배우가마지막장면에서는버나드로서루이스를회상하는대사를말한다.이로써몸안에서‘말하는자(버나드)’와‘말해지는자(루이스)’가겹친다.발화의주체가동시에그객체가되는것이다.그는이다중경험이“원작의핵심과정확하게닿아있다”고말한다.결국한인물은여러인물이지닌빛을담은다면체가되어불꽃을일으키기때문이다.
한국어어미의독자성으로살린‘의식의흐름’
각색의또다른미덕은언어적으로도발휘된다.희곡전반에서어미는의도적으로통일되지않는다.존댓말과반말,독백체와서술체가한인물의대사안에서뒤섞이고,문장중간에결이바뀐다.울프의‘의식의흐름’기법을각색언어의층위에서도살리려는의도적선택이다.관계와내면의거리에따라미묘하게변하는한국어어미의독자성은,영어원작이가진감각을한국어로구현하는데효과적인도구가되었다.
소설에서길게이어지는중문·복문형태의문장은희곡의말맛이살아나도록리듬감있게다시썼다.원작에없거나각색의도를밝혀둘필요가있는대목에는각주를달아,번역과각색의과정자체를투명하게기록했다.원작소설의특정어휘를희곡언어에맞게조정한근거,배우의제안으로구체화된대사,공연을구현하는과정에서추가된설정등이각주로남아있어,이책은읽는희곡이자공연텍스트이면서동시에각색과정의기록물이기도하다.
작가은유는이책의리뷰에서원작을“머리로이해하려는이들에게리듬타는법을가르쳐주는든든한가이드북”인동시에“그자체로도감각적인말맛을선사하는언어의보물창고이자소설과는다른압축미와완결성을갖춘단단한작품”이라평하며,“『파도』를읽다보면삶의맷집이조금은탄탄해지고영혼은자유로워질것”이라고덧붙였다.
각색의말
독자여러분께도문장이말이되고,감각이되어몸을통과하던그진동이온전히전달되기를바랍니다.이희곡을읽으신뒤버지니아울프의원작소설로이어지거나,원작소설을읽으신뒤희곡으로이어져,또다른흐름이생길수있다면좋겠습니다.―김민정
추천사
좋은작품에는인생의조망권이들어있다.독자를정체성고민과죽음에대한사유의‘파도풀’에데려다놓는다.한치앞도모른채살아가야하는인간에게문학이주는처방이다.내면에쉴틈없이이는감정의잔물결부터숨을삼켜버리는거대한물살까지한흐름으로담아내는희곡『파도』를읽다보면삶의맷집이조금은탄탄해지고영혼은자유로워질것이다.―은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