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그리고 십대를 마음속에 여전히 품고 사는 젊은 독자를 위한 제철소 YA 문학 시리즈 [트:럭]의 첫 번째 책. 젊은 극작가 서동민의 데뷔작으로, 여성이 되고 싶은 오빠 규빈과 지금껏 오빠에게 많은 걸 양보해온 여동생 은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희곡은 퀴어 서사와 가족 서사를 나란히 교차시키며 ‘정상가족’이라는 허울에 가려진 것―며느리와 손녀의 돌봄 노동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집, 장손에게 애정과 기회를 몰아주는 규범, 재개발과 아파트 배당권을 둘러싼 가족의 민낯 등―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2024년 초연 이후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 서울예술상 심사위원 특별상 등을 수상하며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재수생 은빈의 목표는 오직 하나, 지방대 치대에 붙어 이 집을 떠나는 것이다. 재개발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할머니, 남편이 죽고 난 뒤로 아들에 집착하는 엄마, 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오빠라는 인간까지, 그 어디에도 은빈의 편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은빈은 자신의 복숭아향 립스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오빠 규빈을 의심한다. 엄청난 비밀 앞에서 가족의 위태로운 평화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과연 은빈은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희곡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은 ‘가족에게 커밍아웃하기’라는 미션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빠의 비밀을 알아챈 은빈은 말로는 “다 이해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 이해는 <섹스 앤드 더 시티>나 <퀴어 애즈 포크> 같은 미드에서 본 ‘선진국의 상식’에 가깝다. 은빈에게 규빈의 커밍아웃은 ‘집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자신의 계획을 송두리째 흔드는 변수로 계산될 뿐이다. 퀴어를 향한 지지와 연대가 각자의 생존 문제와 얼마나 팽팽하게 얽혀 있는지 드러나는 지점이다. 규빈이 원하는 것도 거창하지 않다. 엄마와 은빈이 쓰는 여성용 로션을 바르거나 올리브영 색조 코너 앞에서 눈치 보지 않고 립스틱을 발색해보는 것. 작품은 정체성을 ‘선언’의 문제가 아니라 립스틱 하나 사려고 다른 동네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했던 ‘일상’의 문제로 끌어내리고, “법 위의 상식”이 피해와 가해의 자리를 뒤바꾸는 우리 사회의 모순까지 예리하게 들춰낸다.
규빈으로 대표되는 퀴어 서사와 나란히 놓인 것은 복자, 미희, 은빈으로 이어지는 여성 삼대의 이야기다. 시집살이의 기억을 가부장의 규율로 되돌려주는 복자, 25년을 며느리로 살며 돌봄과 감정노동으로 가정을 지켜온 미희, 가부장제가 원하는 ‘착한 딸’이기를 거부하고 독립을 계획하는 은빈. 집은 여성들의 노동으로 굴러가지만, 그 집의 이름은 ‘장손’에게로 이어진다. 미희가 은빈에게 오빠의 기분도 살피고 기운도 불어넣어달라며 부탁할 때, 우리는 가족 안의 소수자를 돌보는 일마저 딸의 몫으로 떠넘겨지는 구조와 마주한다. 은빈은 ‘아들’의 자리를, 규빈은 정확히 그 반대의 자리를 선망했지만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작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그토록 선망한 것이 “어떤 뚜렷한 성별 지위”인지 “어떤 종류의 구속에서도 벗어나 홀로 나답게 사는 독립”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이 집이 ‘정상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온 것은 무엇일까. 부재하는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 참붕어를 손에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그는 일하러 나갔다 죽은 가장으로 기억되지만 그 죽음 너머의 진실은 은폐되고, 남은 이들은 사망보험금과 재개발 배당권 위에 가족의 체면을 쌓는다. 가장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남은 가족끼리 똘똘 뭉쳐야 한다’는 윤리적 규범이며, 그 규범은 한 채냐 두 채냐를 두고 벌이는 협상처럼 거래의 언어로 작동한다. ‘상한 것은 잘라내야 뿌리가 산다’는 말로 가족을 지키려는 이들 앞에서, 작품은 정상가족이 오래전부터 결핍과 침묵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음을 폭로한다.
그러나 작가는 한 가족의 붕괴를 그저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누군가는 집을 지키고 누군가는 구제받는 희생의 문법 대신, 가장 따뜻했던 시절의 기억 속에 서로를 간직해온 두 사람이 함께 세상으로 나가는 쪽을 택한다. 이 책의 리뷰를 쓴 작가 송희지의 말처럼 “가족의 와해가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내는 몸 바꿈이 되었듯이” 이들은 “희미한 빛을 따라서 얼마든지 몸을 바꾸어”갈 것이다. 작은 연대와 환대가 한 사람을 구한다는 작가의 굳은 믿음은 이 희곡의 결말을 낙관이 아닌 희망으로 만든다.
추천사
우리가 그들의 떠남에서 희망을, 섬광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얼까. 우리가 삶 속에서 아주 작은 연대의 힘이, 평범하고 사소한 환대의 경험이 한 사람을 구하고 살려내기도 한다는 것을 이미 배웠기 때문은 아닐까. “밤하늘 저 멀리서/빛나고 있는/꿈결 같은/우리의 사랑”을 나누어 부르는 규빈과 은빈의 호흡에서, 끝끝내 맞잡은 손의 온기에서 그 사실을 새삼 다시 발견했기 때문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확실한 점은 그들이 필히 변신하리라는 것이다. 그들 가족의 와해가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내는 몸 바꿈이 되었듯이, 달빛 아래 반짝이는 세일러문의 안광처럼 희미한 빛을 따라서 얼마든지 몸을 바꾸어가리라는 사실이다. _송희지(작가)
책 속에서
은빈 (혼잣말처럼) 내 성적 알면, 집 가까운 간호대나 유아교육과 가라고 하셨을 테니까.
선혜 거봐. 네가 생각해도 말이 안 통할 거 같으니까 그런 거잖아.
은빈 (사이, 고개를 저으며) 일단 붙으면 무조건 나갈 거야. 그땐 집에서 허락 안 해줘도, 갈 데가 있으니까.
선혜 그러니까. 결과 나오기 전까진 다른 변수가 없어야지. 게이면 숨기고 살 수가 있잖아. 근데 트랜스젠더면?
은빈 어?
선혜 너희 오빠가 여자 되겠다고, 수술하겠다 나서면? 집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어느 날부터 머리도 더 기르고 가슴 수술도 하고 그러면?
은빈 (사이) 그건 숨길 수가 없겠네.
선혜 너희 집 서로 엔간히 미워해도 끈질기게 붙어 있는다며. 너희 할머닌 미친 사디스튼데,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면서 아야, 아파요, 나 좀 호― 해주세요, 니 오빠를 거의 연하의 애인처럼 대한다며. 거기서 니 오빠가 자기 행복 찾겠답시고 슉 빠지면? 그래도 네가 독립할 수 있을까?
사이
은빈 남규빈 커밍아웃은 내 선에서 막아야겠네.
_3장에서
은빈 실은 나도 재밌기는 했어. 동생 생긴 것 같아서. 나 동생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규빈 내가 너보다 네 살이 많은데, 그래도 동생은 아니지.
은빈 어어?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알려줬는데? 화장부터 코디까지 다 내 손으로 해줬는데?
규빈 어렸을 때도 해줬었잖아, 화장. 그 콩순이랑 미미 인형도……. 옷 입히기 놀이 하면서.
은빈 (박수 짝, 치고) 그랬네. 나는 다른 집 오빠들이랑 다르게 나랑 참 잘 놀아준다고만 생각했는데.
규빈 (끄덕이며) 실은 내가 좋아서 한 거지. 축구나 레슬링보다 그게 더 끌렸으니까. 우리 맨날 저녁이면 ‘세일러문’ 같이 봤잖아. 그거 막 오프닝 노래도, 하, 뭐였더라.
은빈 뭐였더라, 뭐였더라.
규빈 아무튼 그거 진짜 재밌었는데. 왜, 어렸을 때 너랑 저녁 시간이면 맨날 만화영화 기다리고. 난 그때가 제일 좋았던 거 같아. 왜 그랬잖아. 그쯤에 아빠도 돌아가시고, 엄마도 혀 깨물고 죽을 만큼 힘들었다 하고. 근데 난 너무 어려서 그런가, 이런 좋은 기억만 있네. 학교에서 내가 여자애들이랑만 어울려 놀아도 선생님들이 뭐라 하지도 않았고. 근데 커가면서 남자 교복 입게 되고, 엄마가 주는 아저씨 냄새 나는 스킨로션도 바르게 되고. 그거, 엄마 딴에는 나한테 비싼 거, 좋은 거 준 거잖아. 그래서 더 말을 못 했어. 엄마, 내가 착한 아들인 거에 엄청 뿌듯해하니까. 별로 상관없기도 했지. 뭐랄까, 어차피 남성용 화장품이나 신발 자체는 내가 원하는 카테고리가 아니니까. 그 안에선 뭘 어떻게 입어도 상관이 없었달까?
_7장에서
은빈 여기 오느라 예식장 알바도 갑자기 뺐어. 그니까 사장이 더 나올 필요 없다더라? 시급 다 계산해놓고 다니던 자린데. 그거 하나 틀어지면 내가, 얼마나 많은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데.
규빈 그건 미안해. 내가 사정을 잘 말해서…….
은빈 별로 심각한 일 아닌 거 같지? 그렇겠지.
규빈 은빈아.
은빈 너야 재수든 삼수든 필요하면 집에서 다 시켜줬을 테니까.
규빈 너도 재수하고 있잖아. 너도 조금만 더 하면 원하는 학교 갈 수 있다며.
은빈 너 말 진짜 쉽게 한다. 너 알바 하면서 공부해봤어? 너 지금 휴학해서도 아무것도 안 하잖아. 너 군대 갔을 때, 나 정말 끔찍했어. 보고 싶어서? 아니야. 규빈이는 이 집에 없는데 나는 계속 규빈이네 가족이랑 살고 있었으니까. 너는 매끼 국에 반찬에, 꼭 티브이에 나오는 거 같은 집밥이 당연한 줄 알지? 우린 아녔어. 너 면회 가는 주에만 온갖 진수성찬을 몰아 먹고, 평소엔 정말 수준 이하였어. 그냥 반찬 투정 아니야. 나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학교 급식이 너무 부실해서 뭐든 따끈한 국물이 먹고 싶었는데. 근데 안 해주잖아. 그냥 사 먹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엄마는 나한테 그런 걸 해주는 사람이 아니잖아. 엄마는, 나한텐 부탁만 하니까. 뭐든 챙겨주고 싶은 자식은, 내가 아니라 너니까.
_11장에서
미희 (고개 저으며) 어쩐지 이상했어. 언제부턴가 입술 주름에 립스틱이 끼어 있고. 난 혹시 여자친구가 생겼나, 그쪽으로만 걱정했는데. 엄마도 인터넷 계속 찾아봤어. 너는 확인만 해주면 돼.
은빈 뭘 확인해?
미희 니 오빠 말이야, 그거 맞지? 너한텐 얘기했니?
은빈 도대체 무슨 얘긴지…….
미희 동성연애자 말이야.
짧은 사이
은빈 난 몰라. 모르니까 엄마 마음대로 생각해.
은빈, 그대로 반대편으로 걸어간다.
미희 너 나가 살게 해줄게.
은빈, 걸음을 멈추고 미희를 돌아본다.
미희 너 이 집에서 얼른 나가고 싶잖아. 시험공부 끝나면 나가서 자취해. 내가 방도 잡아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