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하나님은 추억을 회복하셨다.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되 또 그의 아내는 아담의 갈빗대로 지으셨다. 그들로 하여금 에덴동산 그 낙원에서 각종 과일과 맑은 물을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게 하셨다. 아담 부부가 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죽게 되었으나 당장 죽이지 아니 하셨다. 에덴에서 추방 시키셨고 측은히 여기셔서 나갈 때는 아담 부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 에덴에서 나가서 930년을 살기까지 두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에덴에서 함께 지내던 추억을 이렇게 되살리시고자 하셨다. 그 뿐인가. 아니다. 아담의 후손에게서라도 대를 이어 이 땅에 살도록 배려하셨다.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 한 번 잘 지내고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아벨 대신에 또 셋을 주셔서 대를 잇게 하셨다.
결국 예수님도 셋의 후예 노아에게서 난 셈족에서 아브라함,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은 부활하고 영생하시어 잃어버린 아담을 회복시키사 에덴에 두셨다는 것이다. 이름까지 첫 사람 아담,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다.
(고전15:45-49)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지옥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아니 하신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원리를 바로 알지 못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불쌍해서 눈물을 머금고 보내시면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기까지 하셨다.
사람의 법으로 말하면 재판장은 죄인이 미워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법에 따라서 판단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아담이 미워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어서 자신이 말씀하신 법대로 심판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옛날 그 아담이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던 모습을 추억하시면서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은 마음에서 아담의 후손들, 더럽고 악한 것들을 살리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자들은 모두가 에덴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사실을 체험하고 살아 가는 우리들이 어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요일4:8, 16)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 할 수만 있으면 사람을 살리시는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허용하셨다. 문제는 인간, 곧 아담의 후손은 어쩔 수 없는 죄인들이라서 그 죄가 죄인을 끌고 다니기에 망한다.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으므로 가인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정죄하여 천하에 어디를 가도 누구에게 맞아 죽을 것 같아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사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칠배라고 하셨을 정도이다.
(창4:14, 15)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지은 죄를 어떻게 하든지 갚으신다는 그런 인정도 사정도 없는 그러한 냉정한 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망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죄가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에덴에 대한 추억, 아담과 다정하게 지내셨던 때를 다시 한번 더 돌아보자.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8, 9).
이 때 죄를 알지도 못했던 아담이 숨었다는 것은 죄라는 것이 죄인을 망하게 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죽이려고 찾아 내시는 것이 아니었다.
집안 정원에서 아버지가 귀여운 자녀들과 지내는 장면이 아닌가. 다만 아담이 죄를 지어 죄를 알게 되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애닯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에덴을 추억하시면서 되찾으실려고 하나뿐인 아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을(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죄많은 세상에 보내사 이 수 많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고 부활하셔서 에덴을 다시 회복하셨으니 하나님께 얼마나 큰 영광이요 기쁨이겠는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4, 5).
하나님의 사랑은 그야말로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이 옳다. 아담 하와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후손 억조 창생을 에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하시려고 외아들을 희생시키신 은혜는 놀랍고도 귀하다.
하나님은 홀로 사시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과 그를 통하여 구속함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과 새 에덴,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추억을 되살리는 우주적인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니 이 새 에덴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계획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온 세상에 살고 있는 구원 받은 억조 창생도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추억을 먹고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도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시고, 그 이후에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으니 자녀가 얼마나 많았겠느냐. 그러나 그 많은 자녀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셋에서 노아까지 족보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셋의 자손들은 모두가 거의 천년을 살았다.
아담도 죄를 범했으나 930세를 살았으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을 장수하게 하고픈 마음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담과 에덴에서의 추억 그것을 포기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니까 놓치고 싶지 않아서 오래 오래 살게 하시다가 점점 사람의 생명이 짧아지게 되었다.
노아 홍수 이후에는 하나님이 노아의 후손들에게도 옛날 아담에게 주셨던 복,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시고(창9:1-3; 참고:창1:28,29). 동물도 식용으로 사용하라고 허용 하셨다(창9:3). 동물성 식품을 먹어서 사람의 생명이 짧아졌다고 하나, 하여튼 이때부터 삼사백년 이백년 이렇게 줄어 들었다.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되 또 그의 아내는 아담의 갈빗대로 지으셨다. 그들로 하여금 에덴동산 그 낙원에서 각종 과일과 맑은 물을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게 하셨다. 아담 부부가 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죽게 되었으나 당장 죽이지 아니 하셨다. 에덴에서 추방 시키셨고 측은히 여기셔서 나갈 때는 아담 부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 에덴에서 나가서 930년을 살기까지 두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에덴에서 함께 지내던 추억을 이렇게 되살리시고자 하셨다. 그 뿐인가. 아니다. 아담의 후손에게서라도 대를 이어 이 땅에 살도록 배려하셨다.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 한 번 잘 지내고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아벨 대신에 또 셋을 주셔서 대를 잇게 하셨다.
결국 예수님도 셋의 후예 노아에게서 난 셈족에서 아브라함,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은 부활하고 영생하시어 잃어버린 아담을 회복시키사 에덴에 두셨다는 것이다. 이름까지 첫 사람 아담,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다.
(고전15:45-49) “45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지옥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아니 하신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원리를 바로 알지 못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불쌍해서 눈물을 머금고 보내시면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기까지 하셨다.
사람의 법으로 말하면 재판장은 죄인이 미워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법에 따라서 판단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아담이 미워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어서 자신이 말씀하신 법대로 심판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옛날 그 아담이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던 모습을 추억하시면서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은 마음에서 아담의 후손들, 더럽고 악한 것들을 살리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자들은 모두가 에덴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사실을 체험하고 살아 가는 우리들이 어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요일4:8, 16)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 할 수만 있으면 사람을 살리시는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허용하셨다. 문제는 인간, 곧 아담의 후손은 어쩔 수 없는 죄인들이라서 그 죄가 죄인을 끌고 다니기에 망한다.
아담의 첫 아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으므로 가인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정죄하여 천하에 어디를 가도 누구에게 맞아 죽을 것 같아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사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칠배라고 하셨을 정도이다.
(창4:14, 15)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지은 죄를 어떻게 하든지 갚으신다는 그런 인정도 사정도 없는 그러한 냉정한 분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망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죄가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에덴에 대한 추억, 아담과 다정하게 지내셨던 때를 다시 한번 더 돌아보자.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8, 9).
이 때 죄를 알지도 못했던 아담이 숨었다는 것은 죄라는 것이 죄인을 망하게 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죽이려고 찾아 내시는 것이 아니었다.
집안 정원에서 아버지가 귀여운 자녀들과 지내는 장면이 아닌가. 다만 아담이 죄를 지어 죄를 알게 되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애닯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에덴을 추억하시면서 되찾으실려고 하나뿐인 아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을(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죄많은 세상에 보내사 이 수 많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고 부활하셔서 에덴을 다시 회복하셨으니 하나님께 얼마나 큰 영광이요 기쁨이겠는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4, 5).
하나님의 사랑은 그야말로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이 옳다. 아담 하와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후손 억조 창생을 에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하시려고 외아들을 희생시키신 은혜는 놀랍고도 귀하다.
하나님은 홀로 사시기를 원치 아니하신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과 그를 통하여 구속함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과 새 에덴,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기를 원하신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추억을 되살리는 우주적인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니 이 새 에덴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 계획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온 세상에 살고 있는 구원 받은 억조 창생도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추억을 먹고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도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시고, 그 이후에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고 했으니 자녀가 얼마나 많았겠느냐. 그러나 그 많은 자녀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셋에서 노아까지 족보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셋의 자손들은 모두가 거의 천년을 살았다.
아담도 죄를 범했으나 930세를 살았으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을 장수하게 하고픈 마음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담과 에덴에서의 추억 그것을 포기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니까 놓치고 싶지 않아서 오래 오래 살게 하시다가 점점 사람의 생명이 짧아지게 되었다.
노아 홍수 이후에는 하나님이 노아의 후손들에게도 옛날 아담에게 주셨던 복,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시고(창9:1-3; 참고:창1:28,29). 동물도 식용으로 사용하라고 허용 하셨다(창9:3). 동물성 식품을 먹어서 사람의 생명이 짧아졌다고 하나, 하여튼 이때부터 삼사백년 이백년 이렇게 줄어 들었다.
추억을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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