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 아파트 - 정암총서 13 (증보한정판)
Description
한 번 더 추적한 경성의 아파트
2021년 4월 출간되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경성의 아트》 증보한정판이다.
책이 출간된 후에도 저자들은 경성의 아파트 관련 자료를 찾고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박철수 교수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새로 확인한 내용을 트위터에 올려 독자들과 공유했다. 이 내용과 더불어 새로 발굴한 염천교의 오타아파트 도면을 포함한 아파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365쪽), 오타아파트 경영자인 오타 마사스케의 전모(210쪽), 어디에 있었다는 정보만 있거나 이름만 알려져 있던 아파트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발굴해 추가(433쪽)했다. 또한 책에 소개된 아파트 가운데 정확한 위치와 도면을 확인할 수 있는 아파트들의 입지를 분석(501쪽)했다. 어느 동네, 어떤 자리에 어떤 유형의 아파트가 있었는지, 저층부는 어떻게 활용했는지 등을 살핌으로써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경성의 도시 모습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1929년 회사를 설립하기 전인 1924년 7월 오타는 경성부윤에게 현재의 염천교 인근 국유지에 아파트 건설 허가원을 내고 10년이라는 한시적 토지 사용 허가를 받았다. 공무원 시절의 인맥을 최대한 이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1933년 12월까지 아파트는 짓지 못했다. 또 다시 20년간 연장해달라는 토지이용허가를 신청, 10년간 사용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결국 1935년에야 ‘오타상회 데파트’라 불리는 1층은 점포, 2층은 아파트 및 임대 사무소인 3동의 건물을 지었다. 오타상회 사무소도 아파트 건물 내에 자리를 잡았다. 오타상회 데파트는 꽤 번성하고 유명했는지 일대를 ‘오타마치’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_211쪽에서

창성정아파트는 조선총독부 대용 관사로 지어져 해방 후 국회의원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1958년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당시 의원용 아파트는 삼청동, 창성동, 청운동 3곳에 있었다고 한다. 의원용 아파트가 관리가 잘되지 않고, 정작 의원들이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의원 관계자들이 입주하여 왔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폐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_446쪽에서

1930년대에 건립된 근대식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아파트는 대부분 청계천 이남, 식민지배층의 거류지인 남촌을 중심을 분포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있던 경복궁 근처의 적선정역 인근에는 적선하우스와 꽤 큰 규모로 지어진 내자동 미쿠니아파트가, 통의정역에서 체신이원양성소를 바로 지나서는 창성정아파트가 있었다.
_501쪽에서

아파트의 시대

때론 ‘연애의 시대’요, ‘잡지의 시대’라고도 호명하는 1930년대 식민지 대도시 경성은 다른 한편으로는 아파트가 넘쳐나던 곳이었으니 ‘아파트의 시대’라 불러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_9쪽에서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의 자료에 의하면 2019년 현재 서울시민의 42.2%가 아파트에 거주한다. 단독주택 32.1%, 다세대주택 9.4%, 연립주택 2.2%이고 주택 이외의 거처 거주자가 4.6%이다. 전국으로 확장하면 50.1%가 아파트에 거주한다. 2018년 서울시의 아파트는 1,591,430호인데 99.0㎡(30평)가 가장 많은 414,456호이고 다음으로 많은 호수를 차지한 게 273,390호인 82.5㎡(25평)와 211,176호인 66.0㎡(20평)이다. 그러니까 서울시민의 절반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 56%가 20~30평형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다. 굳이 이런 통계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매일 쏟아지는 아파트 관련 뉴스만으로도 ‘아파트 시대’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대를 ‘아트 시대’로 명명해도 어색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책이 나왔다. 주거문화사, 아파트 설계, 아파트단지와 건축 공간이라는 각기 다른 주제를 주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4명이 공동 집필한 《경성의 아트》이다.
경성 어디에 얼마나 많은 아파트가 지어졌을까? 어느 곳에 많이 있었을까? 당시 사람들은 아파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무슨 일을 하는 어떤 사람이 아파트에 살았을까? 경영 주체는 누구였을까?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
《경성의 아트》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경성의 아파트에 관한 질문의 답을 찾는 여정이자 결과물이다. 당시 발행된 신문과 잡지는 물론 건축물에 관한 정보를 비교적 상세하게 다룬 건축잡지 《조선과건축》에 소개된 아파트 관련 자료 분석, 《대경성사진첩》, 〈대경성부대관〉과 같은 이미지 자료와 지도,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등 당시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갖춘 각종 온라인 페이지, 일본의 국립도서관, 미국문서관리보관소 등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관련 자료를 샅샅이 찾아 읽고 분석했다.
분석 결과는 1936년 ‘지번구획입대 경성정밀지도’에 아파트 위치를 찍어 아파트 분포를 살피는 자료가 되었으며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아파트의 변화 과정 추적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신문 기사가 전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 아파트를 만든 법령, 당시 아파트가 풍기문란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이유, 거주했던 사람의 면면 등 당시 아파트의 이모저모를 분석하기 위한 기초 자료였다. 저자들은 일제강점기의 아파트 분석에만 머물지 않았다. 해방 후 아파트는 어떤 변화를 거쳤고 주 사용자는 누구였는지 현재까지 남아 있다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추적했다. 경성에서 현재 서울로 이어지는 도시의 역사를 채우는 작업 역시 놓치지 않았다.
기존에 ‘회현동 미쿠니아파트’로 알려져 있던 남산동 미쿠니상회아파트의 정확한 주소를 확인하고 지금도 여전히 공동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했는가 하면 우리나라 1호 법학박사인 황산덕과 수화 김환기가 현재의 충정아파트인 도요타아파트에 머문 적이 있다는 것 등 경성의 아파트와 관련한 다양한 사실을 담았다. 무엇보다 저자들은 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아파트를 70여 곳이나 찾아내 지도에 표시, 개별 아파트의 주요 특징을 정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의 각 연도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도이 세이치 개인회사였던 미쿠니상회가 주식회사 형태로 법인격을 전환하고, 회사 설립 목적을 ‘석탄 기타의 연료 금속 여러 광물의 판매 및 그에 부대하는 업무 일체 및 부동산에 관련한 일체의 사업경영’으로 삼은 것은 1934년 6월 7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회사 소재지는 경성부 남대문통(南大門通, 현 남대문로) 1정목 25였으며, 13명의 주주 가운데 아파트 낙성식에서 감사 인사를 전한 사주 도이 세이치는 4,430주를 보유한 제1주주였다.
_272쪽에서

1936년 8월에 만들어진 〈지번구획입대경성정밀도〉에는 동사헌정 38번지가 여러 개의 블록으로 나뉘어 있다. 따라서 이 아파트의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서는 폐쇄지적도와 폐쇄토지대장을 확인해야 했다. 폐쇄토지대장에 따르면 ‘본정 5정목 25번지’에 거주했던 우에하라 나오이치가 1927년 12월 9일 ‘광희정 2정목 217-2’의 219평에 해당하는 땅(垈)을 구입했고 당시 땅값은 657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소유권은 그대로인 채 1934년 12월 4일 소유자인 우에하라 나오이치의 주소가 변경됐는데, 새로 변경한 주소가 마침 동사헌정 38번지다. 이곳은 앞서 언급한 《대경성사진첩》에 등장하는 채운장아파트 위치와 동일하다.
_384쪽에서

아파-트멘트, 아파-아트, 아파-트, 아트, 아파트

“아파-트멘트(apartment) 영어. 일종의 여관 또는 하숙이다. 한 빌딩 안에 방을 여러 개 만들어놓고, 세를 놓는 집이니, 역시 현대적 도시의 산물로 미국에 가장 크게 발달되었다. 간혹 부부생활을 아파-트멘트에서 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개는 독신 샐러리맨이 많다. 일본에서는 줄여서 그냥 「아파트」라고 쓴다.”고 했다. 식민권력에 의해 근대도시, 소비도시로 모습을 바꾼 경성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에 대한 궁금증을 친절하게 풀이해 준 것인데, 당시 누구나 궁금하게 여겼을 법한 외래어였기 때문이다.
_11쪽에서

일제강점기 국내로 유입된 많은 외래문물이 그랬던 것처럼 아파트 역시 통일된 표기가 없어 쓰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어떤 이는 일본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미국식 표기를 따르기도 했다. 화재 기사를 다룬 한 신문은 기사 제목으로 아파트를 붙이면서 괄호하고 “세놋는집=줄행랑”이라는 추가 설명을 하기도 했다.
당시 아파트는 요즘의 아파트와는 약간 달랐다. 살림집 형태를 갖춘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독신자가 생활할 수 있는 1칸 방이었다. 이렇게 독신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이라는 인식 때문에 풍기문란의 대명사로 지목되기도 했다.
당시 아파트는 대개 교통 여건이 좋은 도심에 4층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지어졌으며 1층에는 오락장, 공동식당과 같은 공동시설을 두고 아파트 거주자는 물론 거주하지 않는 일반인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복합용도의 도시건축’이었다. ‘근대풍경의 요체’로 불린 평양 동정의 동아파트는 1층에 마켓이 있다는 것과 옥상테라스, 옥상전망대를 갖춘 최신식 시설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성의 아트》는 당시 사람들의 아파트 인식, 주 이용자와 경영자의 면면, 아파트 시설과 규모 등 아파트와 관련된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담았다.

경성에서의 상량식 소식 역시 일본어로 발행한 《조선신문》이 전했다. 〈대경성부대관〉에도 등장하는 취산아파트와 내자동 미쿠니아파트 신관 상량식 소식이 1936년 7월과 8월에 연이어 실린 것이다. 욱정 2정목에 자리한 취산아파트는 약 800평에 이르는 4층 철근콘크리트(混凝土) 건축물로 공사비는 15만 5천원이 들었는데 1936년 10월 준공을 하면 최신식 문화시설을 완비한 100실을 임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곳은 45가족을 수용하는 모던아파트가 될 것인데 남으로는 빼곡한 소나무밭을 배경으로 두고 북으로는 대경성을 아래로 굽어볼 수 있어 가히 선경지(仙境地) 별장이 될 것이라고 도 했다.
_285쪽에서

굴뚝 꼭대기에 달린 풍차를 보고 ‘구라파 농촌으로 미리 짐작하지 말라며 서울의 풍경을 바꿀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곳에 댄스홀까지 들어서면 “아파트는 한층 더 탕남음녀들의 마굴”이 될 것이 걱정’된다는 내용이다.
_341쪽에서
네 권의 전화번호부

1920년대에 이미 경성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영업을 하려면 전화기는 필수였다. 상점 간판에 전화번호를 표기했느냐 유무는 신용과 직결된 사항이었다. 나아가 상점들은 기존의 박리다매식 상업전술보다 전용 포장지에 상호, 주소, 영업종목, 그리고 ‘전화번호’를 표기해 원거리 손님에게도 광고하고 전화로 주문을 받으며 물건을 팔 수 있는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상업도시로 변모하는 경성에서 전화기는 시간과 거리를 압축하는 필수불가결한 문명의 이기였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여전히 일본인에게 집중적으로 편재되어 있었다는 점은 당시 전화번호부를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_43쪽에서

1930년에 발간된 《경성·인천 전화번호부》에는 ‘아파트’가 등장하지 않는다. 1934년 《경성·인천 전화번호부》에서 비로소 3곳의 아파트가 등장하게 된다. 1939년에 발간된 《경성·영등포 전화번호부》에서는 21곳에 이르는 아파트를 찾아볼 수 있다. 1945년에 발행된 《경성·영등포 전화번호부》에는 1939년 전화번호부에 등장했던 아파트 가운데 한 곳을 뺀 나머지는 사라져 11곳으로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_48쪽에서

경성의 아파트를 추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각종 자료 가운데 눈여겨볼 자료가 있다. 바로 당시에 출간된 전화번호부이다.
당시 전화번호부는 매년 4월과 10월을 기준으로 두 차례씩 발행되었다. 전화번호부에는 전화번호, 상호와 주소, 업종이 표기되어 있으며 페이지 전면 혹은 각 페이지의 위나 아래 여유 공간을 마련해 광고를 넣었다. 1990년대까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현대의 전화번호부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명의 저자는 어렵게 1930년대에 발행된 네 권의 전화번호부를 찾아 ‘아파트 업’으로 분류된 곳의 전화번호와 주소, 경영자 정보를 꼼꼼히 분석했다. 업종 분류에서 아파트 업과 함께 비슷한 성격을 가진 임대업 또는 대실업도 같이 살폈는데 호텔, 여관, 여관하숙, 하숙여관, 하숙, 대가(貸家) 등의 다양한 임대업 종류를 확인하고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 임대업 혹은 대실업의 분포를 파악했다.
1930년, 1934년, 1939년, 1945년에 발행된 전화번호부에서 주소가 같거나 경영자 이름이 같은 곳, 업체 이름이 같은 곳을 일일이 찾아 각 시기별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석했는데 아파트였던 곳이 호텔이 되기도 하고 여관이었던 곳이 아파트가 되기도 했으며 사라진 아파트나 호텔, 여관 등도 여러 곳임을 밝혀냈다. 이처럼 전화번호부를 연구 기반으로 삼아 아파트를 포함한 임대업 혹은 대가업의 면면을 분석했는데 전화번호부의 정보만으로 이런 분석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저자들은 전화번호부와 함께 당시 상류층의 오락거리였던 골프회원의 명부도 살폈다. 경성골프구락부에 이름을 올린 유력 인사를 찾아 직업은 무엇인지, 사업을 하는 이라면 어떤 사업체를 운영하는지, 어디에 거주하는지 등 당시 상류층으로 볼 수 있는 이들의 면면도 함께 살폈다. 미쿠니상회의 운영자였던 도이 세이치를 포함 상당수의 유력 인사가 내자동 미쿠니아파트, 당시 가장 모던한 건축물로 꼽히던 채운장아파트에 주소를 두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전문학교 학생이나 기생, 카페 여급 혹은 회사원과 같은 독신남녀가 대개 아파트에 기거했다는 기존의 통설이 꼭 맞는 것은 아님을 확인했다.
저자

박철수,권이철,오오세루미코,황세원

저자:박철수

서울시립대학교건축학부에서학생들과더불어‘주거론’과‘주거문화사’를중심으로공부하고있다.《한국공동주택계획의역사》(공저,세진사,1999),《일본의현대하우징》(공저,시공문화사,2002),《아파트의문화사》(살림,2006),《아파트와바꾼집》(공저,동녘,2011),《건축가가지은집108》(공동기획,도서출판집,2014),《아파트:공적냉소와사적정열이지배하는사회》(마티,2013),《근현대서울의집》(서울역사편찬원,2017),《박철수의거주박물지》(도서출판집,2017),《한국의의식주생활사전:주생활①,②》(국립민속박물관,2020),《한국주택유전자I,II》(마티,2021)등50권에달하는건축과주거문화에관한책을펴냈다.지금은“경성상류사회”,“경성전화번호부해제”,“소설로읽는한국주거사”,“박철수의거주박물지2”등을집필중이다.



저자:권이철

갓고다건축사사무소를운영하며도시와마을,집과공간을만들고가꾸어나가는일을하고있다.해안건축에서아파트설계를하며아파트와특별한인연을맺었고,한강맨션과여의도시범아파트,반포주공1단지아파트를살핀〈중산층아파트의특성에관한연구〉논문을썼다.이논문이기회가되어서울역사박물관에서발간한《반포본동:남서울에서구반포로》(서울역사박물관,2018)연구진에참여했다.



저자:오오세루미코

일본요코하마에서나고자랐다.서울에살면서한국관광정보사이트기자로일했던경험과개인적취미를바탕으로한국의여러곳을답사하는자유기고가로활동하고있다.일본잡지사아키서방(亞紀書房)웹사이트에칼럼을연재했고,2020년4월에는도시답사가두명과더불어〈도·시·록:도시의시간을기록하다〉전시에참여했다.1920~1950년대에지어진건축물에관한블로그(http://liumeiuru.hacca.jp/)도운영한다.



저자:황세원

중앙대학교건축학부에서건축과도시설계의접점공간을중심으로학생들과공부하고있으며,이를바탕으로한국의아파트단지와건축공간에대한문제의식을탐구하고있다.특히서울을중심으로하는주거지의파편화현상과단지화로인한도시블록의공간구조

특성에주목하고있다.주거지공간조직과도시형태,일상공간에대한관심을바탕으로《반포본동:남서울에서구반포로》(서울역사박물관,2018)연구진에참여했다.

목차

책을펴내며

박철수교수님을기억하며

모던경성,착란의교향악
경성,1935년|근대도시경성의꼴불견|지나친가벼움과지나친무거움|
아파트도시경성|아파트,아파트|39곳의경성아파트|경성의‘아파트’시대

전화번호부로본1930년대경성의아파트
전화의도입|네권의전화번호부와아파트의등장|1930년대경성의주택난과주거임대업태|1930년대숙박임대업태변화|서양식고급숙소,호텔의번성|천차만별우후죽순,일본식여관과조선식여관|도시곳곳,속속늘어난하숙과대가|전화번호부를통해살펴본경성의아파트|해방이후호텔로변모한경성의아파트

도쿄에서경성으로전해진아파트
아파트멘트|아파트멘트하우스와도시주택|‘아파트의날’그리고아파트멘트의출현|
간토대지진과도준카이아파트|아파트이미지의차용|경성의아파트건설붐|《성대문학》과《경성잡필》에등장한경성의아파트|당시신문이전한외국의아파트|미국유학생의아파트경험|기이한풍경으로소개된아파트|명랑한세계도시민의생활

경성의아파트는어떤모습이었을까
“「아파트」(세놋는집=줄행랑)”|과연어떤모습이었을까:남산동미쿠니아파트,내자동미쿠니아파트,취산아파트,식산은행독신자아파트

경성의아파트에는누가살았을까
삼화원주택지광고에등장한‘아파트’광고|아파트멘트잡담|가족아파트등장|
경성최고상류층인경성골프구락부회원의거처|화가김환기,법학자황산덕과도요타아파트|과연경성의아파트엔누가살았을까

경성의아파트집세
일본인과조선인의생활상|경성의셋방살이비용|집없이도사는경성인!|1930년대일본아파트집세|경성의아파트집세는얼마였을까|교활하게올려받는아파트집세

아파트임대사업경영자,건축청부업
아파트를경영한일본인들|호쾌하게놀며사업을전개한사업가,미쿠니상회대표이사도이세이치|”조선재계를등에업고일어나는일은나말고는누구도못한다.”사업가사이토히사타로|14년의공무원생활을마치고사업가로대성공한오타마사스케|전당포사장우에하라나오이치와모리타쓰오|정계진출과부동산회사의경영자,요시무라겐지와아오키마사루|1930년대일본인토목건축청부업자|1930년대조선인청부업자

아파트취체:아파트를만든법령과제도
경성의건축법령|건폐율,건축선,건축물의높이,도로사선|아파트규모를결정하는법령|일본에서제정된아파트건축규칙


지대가임통제령과부영아파트
식민지의나른함뒤에도사린중일전쟁과국가총동원법|지대가임통제령발동전후의움직임|주택대책위원회의경성부주택대책과기존아파트의호텔전업|식민지배권력의아파트인식,경성과평양|도면을통해확인한부영아파트,청진과대구

경성과평양,그리고부산의아파트낙성식과전람회
식민지조선의7대도시|경성:요란했던옥상전망대낙성식,내자동미쿠니아파트|두동을먼저준공한내자동미쿠니아파트|사진으로읽는내자동미쿠니아파트|경성의아파트공사장중계와상량식전파|평양:순수하고아름다운근대건축의정수,동정의동아파트|평양흥업(주)과평양무진(주)그리고동아파트(주)|추적,동아파트|부산:두곳의청풍장아파트와전람회|부평정청풍장아파트|남빈청풍장아파트|옥상정원과아파트|아파트생산주체와상황변동

풍기문란과아파트:오락실과빌리어드그리고댄스홀
몰락한왕실과순종임금의당구대|유행병처럼번진오락,당구|내자동미쿠니아파트오락실|퇴폐와중독의온상으로변한마작과당구|빌리어드걸과명랑,그리고베이비골프|부영아파트오락장과댄스홀

아파트에서벌어진사건과사고
아파트의사건·사고:신문기사로역추적한1930년대아파트|근대식공동숙소에서빈번하게발생한전염병과화재|아파트로숨는도둑,아파트에사는도둑|아파트거주자의고단한삶이투영된실업,횡령그리고자살사건|아파트를배경으로펼쳐진비극적사랑|일제강점기말통제의대상으로변모한대규모아파트

염천교의데파트,오타아파트
염천교의데파트,오타아파트|데파트와룸펜들이시체로발견되는노동자숙소사이|도로점용허가를받고아파트를건설하다|오타아파트설계도면|현재염천교수제화거리의건축물이오타아파트였을까

조선인이경영한덕수아파트
1930년《경성·인천전화번호부》|조선인본위의문화「아파-트」|조옥현에서다시조옥현으로|덕수아파트-덕수여관·덕수호텔-덕수빌딩

추적!경성의아파트:채운장아파트,욱아파트,중앙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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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2!경성의아파트:공립빌딩(아파트),창성정아파트,혜화아파트
공립빌딩(아파트)와경성공립무진합자회사|조선주택영단이설계,감리한최초의아파트‘혜화아파트’|총독부대용관사‘창성정아파트’|창성정아파트의형태

한번쯤스쳐지났을경성의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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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시간을거슬러경성시절에주목한까닭
1930년대전반기와후반기경성의아파트|일제패망에따른아파트의변모|도시건축유형으로서의지속과변용|마치며

부록
경성어디에,얼마나많은아파트가있었을까|경성의아파트의입지특성|아파트목록읽기|지도에서아파트읽기

출판사 서평

아파트의시대

때론‘연애의시대’요,‘잡지의시대’라고도호명하는1930년대식민지대도시경성은다른한편으로는아파트가넘쳐나던곳이었으니‘아파트의시대’라불러도그리어색하지않다.
_9쪽에서

통계청국가통계포털의자료에의하면2019년현재서울시민의42.2%가아파트에거주한다.단독주택32.1%,다세대주택9.4%,연립주택2.2%이고주택이외의거처거주자가4.6%이다.전국으로확장하면50.1%가아파트에거주한다.2018년서울시의아파트는1,591,430호인데99.0㎡(30평)가가장많은414,456호이고다음으로많은호수를차지한게273,390호인82.5㎡(25평)와211,176호인66.0㎡(20평)이다.그러니까서울시민의절반은아파트에살고있으며그가운데56%가20~30평형의아파트에서생활하고있다.굳이이런통계를들여다보지않아도매일쏟아지는아파트관련뉴스만으로도‘아파트시대’에살고있음을알수있다.
1930년대를‘아파트시대’로명명해도어색하지않겠다는내용을담은책이나왔다.주거문화사,아파트설계,아파트단지와건축공간이라는각기다른주제를주연구대상으로삼고있는4명이공동집필한《경성의아파트》이다.
경성어디에얼마나많은아파트가지어졌을까?어느곳에많이있었을까?당시사람들은아파트를어떻게생각했을까?무슨일을하는어떤사람이아파트에살았을까?경영주체는누구였을까?어느정도규모였을까?…
《경성의아파트》는꼬리에꼬리를물고나오는경성의아파트에관한질문의답을찾는여정이자결과물이다.당시발행된신문과잡지는물론건축물에관한정보를비교적상세하게다룬건축잡지《조선과건축》에소개된아파트관련자료분석,《대경성사진첩》,〈대경성부대관〉과같은이미지자료와지도,국가기록원,국사편찬위원회등당시시대를읽을수있는다양한자료를갖춘각종온라인페이지,일본의국립도서관,미국문서관리보관소등국내외에산재해있는관련자료를샅샅이찾아읽고분석했다.
분석결과는1936년‘지번구획입대경성정밀지도’에아파트위치를찍어아파트분포를살피는자료가되었으며1930년대부터현재까지아파트의변화과정추적의실마리가되기도했다.신문기사가전한아파트에서벌어진사건사고,아파트를만든법령,당시아파트가풍기문란의대명사로일컬어진이유,거주했던사람의면면등당시아파트의이모저모를분석하기위한기초자료였다.저자들은일제강점기의아파트분석에만머물지않았다.해방후아파트는어떤변화를거쳤고주사용자는누구였는지현재까지남아있다면어떻게사용되고있는지추적했다.경성에서현재서울로이어지는도시의역사를채우는작업역시놓치지않았다.
기존에‘회현동미쿠니아파트’로알려져있던남산동미쿠니상회아파트의정확한주소를확인하고지금도여전히공동주택으로사용되고있음을확인했는가하면우리나라1호법학박사인황산덕과수화김환기가현재의충정아파트인도요타아파트에머문적이있다는것등경성의아파트와관련한다양한사실을담았다.무엇보다저자들은주소를확인할수있는아파트를70여곳이나찾아내지도에표시,개별아파트의주요특징을정리하는수고를아끼지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가제공하는《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의각연도내용을중심으로살펴보면,도이세이치개인회사였던미쿠니상회가주식회사형태로법인격을전환하고,회사설립목적을‘석탄기타의연료금속여러광물의판매및그에부대하는업무일체및부동산에관련한일체의사업경영’으로삼은것은1934년6월7일이었음을확인할수있다.회사소재지는경성부남대문통(南大門通,현남대문로)1정목25였으며,13명의주주가운데아파트낙성식에서감사인사를전한사주도이세이치는4,430주를보유한제1주주였다.
_272쪽에서

1936년8월에만들어진〈지번구획입대경성정밀도〉에는동사헌정38번지가여러개의블록으로나뉘어있다.따라서이아파트의위치를특정하기위해서는폐쇄지적도와폐쇄토지대장을확인해야했다.폐쇄토지대장에따르면‘본정5정목25번지’에거주했던우에하라나오이치가1927년12월9일‘광희정2정목217-2’의219평에해당하는땅(垈)을구입했고당시땅값은657원이었음을확인할수있다.이어서소유권은그대로인채1934년12월4일소유자인우에하라나오이치의주소가변경됐는데,새로변경한주소가마침동사헌정38번지다.이곳은앞서언급한《대경성사진첩》에등장하는채운장아파트위치와동일하다.
_384쪽에서

아파-트멘트,아파-아트,아파-트,아파트,아파트

“아파-트멘트(apartment)영어.일종의여관또는하숙이다.한빌딩안에방을여러개만들어놓고,세를놓는집이니,역시현대적도시의산물로미국에가장크게발달되었다.간혹부부생활을아파-트멘트에서하는경우가있지만대개는독신샐러리맨이많다.일본에서는줄여서그냥「아파트」라고쓴다.”고했다.식민권력에의해근대도시,소비도시로모습을바꾼경성곳곳에들어선아파트에대한궁금증을친절하게풀이해준것인데,당시누구나궁금하게여겼을법한외래어였기때문이다.
_11쪽에서

일제강점기국내로유입된많은외래문물이그랬던것처럼아파트역시통일된표기가없어쓰는사람에따라달랐다.어떤이는일본의표기를그대로옮기기도했고또어떤이는미국식표기를따르기도했다.화재기사를다룬한신문은기사제목으로아파트를붙이면서괄호하고“세놋는집=줄행랑”이라는추가설명을하기도했다.
당시아파트는요즘의아파트와는약간달랐다.살림집형태를갖춘곳도있었지만대부분독신자가생활할수있는1칸방이었다.이렇게독신생활을하는사람들이주로이용하는시설이라는인식때문에풍기문란의대명사로지목되기도했다.
당시아파트는대개교통여건이좋은도심에4층규모의철근콘크리트구조로지어졌으며1층에는오락장,공동식당과같은공동시설을두고아파트거주자는물론거주하지않는일반인도자유롭게드나들수있는‘복합용도의도시건축’이었다.‘근대풍경의요체’로불린평양동정의동아파트는1층에마켓이있다는것과옥상테라스,옥상전망대를갖춘최신식시설임을강조하기도했다.이처럼《경성의아파트》는당시사람들의아파트인식,주이용자와경영자의면면,아파트시설과규모등아파트와관련된거의모든이야기를담았다.

경성에서의상량식소식역시일본어로발행한《조선신문》이전했다.〈대경성부대관〉에도등장하는취산아파트와내자동미쿠니아파트신관상량식소식이1936년7월과8월에연이어실린것이다.욱정2정목에자리한취산아파트는약800평에이르는4층철근콘크리트(混凝土)건축물로공사비는15만5천원이들었는데1936년10월준공을하면최신식문화시설을완비한100실을임대할수있다는것이다.특히이곳은45가족을수용하는모던아파트가될것인데남으로는빼곡한소나무밭을배경으로두고북으로는대경성을아래로굽어볼수있어가히선경지(仙境地)별장이될것이라고도했다.
_285쪽에서

굴뚝꼭대기에달린풍차를보고‘구라파농촌으로미리짐작하지말라며서울의풍경을바꿀고층아파트가들어서게되는데이곳에댄스홀까지들어서면“아파트는한층더탕남음녀들의마굴”이될것이걱정’된다는내용이다.
_341쪽에서

네권의전화번호부

1920년대에이미경성을비롯한대도시에서영업을하려면전화기는필수였다.상점간판에전화번호를표기했느냐유무는신용과직결된사항이었다.나아가상점들은기존의박리다매식상업전술보다전용포장지에상호,주소,영업종목,그리고‘전화번호’를표기해원거리손님에게도광고하고전화로주문을받으며물건을팔수있는전략을구사하기시작했다.상업도시로변모하는경성에서전화기는시간과거리를압축하는필수불가결한문명의이기였지만일제강점기에는여전히일본인에게집중적으로편재되어있었다는점은당시전화번호부를통해다시금확인할수있다.
_43쪽에서

1930년에발간된《경성·인천전화번호부》에는‘아파트’가등장하지않는다.1934년《경성·인천전화번호부》에서비로소3곳의아파트가등장하게된다.1939년에발간된《경성·영등포전화번호부》에서는21곳에이르는아파트를찾아볼수있다.1945년에발행된《경성·영등포전화번호부》에는1939년전화번호부에등장했던아파트가운데한곳을뺀나머지는사라져11곳으로줄어든것을알수있다.
_48쪽에서

경성의아파트를추적하는데많은도움을준각종자료가운데눈여겨볼자료가있다.바로당시에출간된전화번호부이다.
당시전화번호부는매년4월과10월을기준으로두차례씩발행되었다.전화번호부에는전화번호,상호와주소,업종이표기되어있으며페이지전면혹은각페이지의위나아래여유공간을마련해광고를넣었다.1990년대까지우리주변에서흔히볼수있던현대의전화번호부형태와크게다르지않았다.4명의저자는어렵게1930년대에발행된네권의전화번호부를찾아‘아파트업’으로분류된곳의전화번호와주소,경영자정보를꼼꼼히분석했다.업종분류에서아파트업과함께비슷한성격을가진임대업또는대실업도같이살폈는데호텔,여관,여관하숙,하숙여관,하숙,대가(貸家)등의다양한임대업종류를확인하고지도에위치를표시해임대업혹은대실업의분포를파악했다.
1930년,1934년,1939년,1945년에발행된전화번호부에서주소가같거나경영자이름이같은곳,업체이름이같은곳을일일이찾아각시기별로어떤변화가있었는지분석했는데아파트였던곳이호텔이되기도하고여관이었던곳이아파트가되기도했으며사라진아파트나호텔,여관등도여러곳임을밝혀냈다.이처럼전화번호부를연구기반으로삼아아파트를포함한임대업혹은대가업의면면을분석했는데전화번호부의정보만으로이런분석을하는경우는흔치않다.
저자들은전화번호부와함께당시상류층의오락거리였던골프회원의명부도살폈다.경성골프구락부에이름을올린유력인사를찾아직업은무엇인지,사업을하는이라면어떤사업체를운영하는지,어디에거주하는지등당시상류층으로볼수있는이들의면면도함께살폈다.미쿠니상회의운영자였던도이세이치를포함상당수의유력인사가내자동미쿠니아파트,당시가장모던한건축물로꼽히던채운장아파트에주소를두고있었음을확인했다.이를통해전문학교학생이나기생,카페여급혹은회사원과같은독신남녀가대개아파트에기거했다는기존의통설이꼭맞는것은아님을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