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군위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군위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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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그리스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말이다. 지금도 사람을 평가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지침이다. 성향이나 수준이 다르면 친구로 지내기 힘들다. 친구가 한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낸다는 말은 정확하다.
사람은 모든 것의 척도가 된다.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훌륭한 조상을 둔 후손은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 중에 악당은 드물다. 지역도 사람으로 판단된다. 얼마나 훌륭한 인물을 배출했는가, 혹은 어떤 사람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는가가 지역의 명성과 아우라를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외국인들이 BTS 멤버를 배출한 부산과 대구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음악적인 도시라고 여기듯이.
지역마다 자기 지역을 자랑할 때 여러 가지 요소를 내세운다. 대개 지리적 특징이나 역사, 문화유적, 산업시설, 오락거리 등을 언급한다. 혹은 지하철, 스타벅스, 백화점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지역을 가장 실감 나게 느끼도록 하는 요소는 사람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핵심이다. 그들의 삶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떻게 흘러왔고, 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가 곧 그 지역에 대한 가장 실감나는 소개이자 설명인 것이다.
군위 사람들을 통해 군위를 소개하는 것이 집필 목표였다. 군위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산은 산, 물은 물’쯤으로 여겨지던 지역 풍경에 생동감을 불어넣고자 했다. 독자들에게 왕건, 김유신 등의 설화와 일연 스님의 행적으로만 인식되던 고장이 드디어 자기만의 색깔과 생동감을 지닌 도시로 다가올 것으로 믿는다.
요컨대, 군위는 곧 군위 사람이다. 지금 군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곧 군위다.
저자

김광원

20년차 현직 기자다.
‘불후의 광대 나훈아’, ‘가요 따라 가요’ 등을 썼다.
경북교통방송에서 9년 동안 ‘역사평행이론’을 진행했다.

목차

서문

이윤희 군위읍명예읍장 & 재부대구·경북시도민회 회장
“콩 한 쪽도 나눠 먹어라”
아버지 고향 군위에 1억5000만원 기부한 기업인 - 12

[나의 아버지] 6.25 참전용사 아버지에게 바치는 사부곡
“백 년 세월 한결같이” 아버지의 ‘나침반 인생’(글 김대봉) - 22

‘군위 오이의 아버지’ 고정근 어르신
“오이 덕분에 소작농 마을 굴레 벗고 군위 ‘최고 부촌’ 됐죠” - 30

홍성일 농업명장
“기후 변화 직격탄 사과 농가, ‘골든볼’이 골든벨 울릴 겁니다” - 36

이진호 군위문인협회 회장
“신화학자 이윤기 고향 군위에 ‘이윤기 신화 길’ 만들고 싶습니다” - 40
삼국유사의 고장 이윤기의 고장 (글 이광렬) - 44

손동찬 ㈜대호종합건설 대표
‘의장님 아들’에서 산업포장 기업인으로
“아버지 삶에서 경영 배웠어요” - 52

김봉수 대구군위초등학교 교장
IB 승부수로 100년 준비
“신공항 시대, 군위의 미래는 학교에 달렸죠” - 56

박희원 나효1리 주민대표
“대기업 은퇴 후 고향에서 ‘새마을 운동’합니다” - 62

군위군 먹거리사업단
“팔아줘서 고맙다”는 소비자들…
군위 로컬푸드, 대구 밥상 파고들었다 - 68

군위 문화해설사 류미옥
“‘삼국유사’를 더 열심히 알리고 싶어요” - 72

군위군 문화해설사 조옥자
“박물관을 만드는 열정으로 해설 자료 모았죠” - 78

대구 군위군 ‘삼부자 밴드’
“군위에서 자라는 기타 소리, 가족 밴드의 실험” - 84

김경민 문화기획자
“군위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기획 작품’ 만들어보고 싶어요” - 90

대구시 군위군 김민진 씨 가족
필리핀 출신 이주여성 김민진씨
“자녀들 통해 코리안 드림 완성하고 싶어요” - 96

30대에 귀촌한 김태현·신수빈 부부
대기업 그만두고 귀촌 “대한민국 최고 힐링 명소 만들었어요” - 100

조현욱 군위군공동체활성화지원센터 사무국장
그때 그 새마을처럼 “함께 손잡자 마을이 변했어요” - 106

강지연 군위청년정책참여단 단원
“젊은 도시 군위, 군위 청년들이 앞장설래요!” - 112

20대 시골 버스 기사 박혜서
버스 기사 된 개그 꿈나무 웃음 만발 일상 - 118

김수정 군위고등학교 졸업생
시골 소녀의 약대 도전기 “환경을 핑계 삼지 않았죠” - 124

이다경 군위고등학교 졸업생
긴 겨울 끝에 만난 봄, 시골 소녀의 의대 합격기 - 128

군위군 ‘테니스 신동’
군위군 앙팡 테리블 “테니스계의 손흥민·김연아 기대하세요” - 132

출판사 서평

[추천사]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현장감’이다.
저자는 현직 기자답게 등장 인물 한 명 한 명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여실하게 길어 올린 만큼 해당 지역(군위)의 주민으로 편입되는 느낌까지 든다.
군위로 귀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군위 설명서’로 추천해도 될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전원 풍경이 달라 보인다. 그저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 아니다.
고즈넉한 전원 풍경 안에서 도시 못잖은 활력으로 다이내믹하게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터뷰 한 편]


“백 년 세월 한결같이” 아버지의 ‘나침반 인생’


6·25전쟁 속 목숨을 구한 나침반
100세 삶을 지탱한 원칙과 인내


글 - 아들 김대봉

“이게 내 생명을 구했다.”
생명을 구했다는 그 ‘보물’은 군용 나침반이었다. 나는 그즈음 군대에서 막 제대했던 즈음이라 나침반이 군에서 쓰는 물건이란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나의 아버지 김동수(100) 선생은 “그 나침반 덕분에 6.25전쟁에서 인민군을 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 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원리’와 ‘원칙’
아버지는 1950년 10월 16일 입대해 한 달 동안 훈련을 받았다. 부대에 편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의 진격으로 부대가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경기도 가평에서 경북 예천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아버지의 손에 나침반이 하나 들려 있었다. 두 명의 전우가 피난길을 함께했는데 그들은 나침반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남쪽을 향해 걸었고 그들은 ‘감’을 믿고 반대로 향했다.
당신은 “그 두 사람이 간 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는지 총성이 들렸다. 아마 전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천 용궁초등학교에서 드디어 한국군을 만나 다시 부대에 편성됐다.
아버지는 나침반을 따른 것처럼 기본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마인드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훈련소에서 배운 후퇴 요령을 마음에 새기며 나침반 바늘이 가리키는 대로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그때 아버지가 속으로 주문처럼 되뇌었던 후퇴 요령은 이것이었다.

첫째, 낮은 데로 가라.
둘째,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찾은 뒤 이동하라.

길에서 내려와 개울가를 걸었다. 늘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등 뒤에서 총알이 날아온 적도 있었으나 한 발도 몸을 관통하거나 스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키는 대로 하니까 정말 총알을 안 맞더라고. 너무 신기하더라고!”

# 꾸준함의 비결은 ‘인내’
이후의 삶에서도 아버지는 나침반과 조교들이 가르쳐준 규칙을 지켜 목숨을 구했던 그때처럼 늘 기본과 원칙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다. 아버지는 중사로 제대한 이후 경찰 제복을 입고 국가에 봉사했다. 이 또한 공동체의 원칙과 규범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평생 늘 일정한 시간에 세 끼 식사를 했고, 하루에 2~3km씩 걷기 운동을 했다. ‘기본’과 ‘원칙’을 유지했다. 당신은 그 꾸준함의 비결로 ‘인내’를 꼽았다.
“매일 제시간에 식사하고 운동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아프거나 피곤할 때는 건너뛰고 싶지. 그러나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지는 거야. 성공하는 인생을 못 사는 것이다.”
젊은 친구들에게도 늘 그런 말씀을 하셨다.
“피곤해서 직장을 하루 쉬어야지 생각하지만, 사람은 일을 하지 않으면 더 피곤해진다. ‘참을 인’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는데, 성공하는 사람들도 ‘참을 인’ 자 속에서 길을 찾은 이들이다.”
규칙적인 삶의 유익은 건강뿐만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식사와 운동을 꾸준히 하시는 것처럼 성격도 ‘한결같다’”고 말한다. 유공자회 사무실 직원들은 “지회장님을 10년 20년 지켜본 직원들이 많은데, 한번도 화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일상처럼 생각과 감정도 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시는 분이다”라고 평가한다.

# 5형제 맏이로, 6남매의 아버지로
지역 사회에서는 늘 존경받는 리더셨지만 나에게 완벽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는 왠지 모르게 서먹서먹했다. 그도 그럴 것이 6.25에 참전해 중사로 제대하기까지 6년 넘게 집을 비웠다. 어린 시절 내내 ‘부재 중’이셨던 것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자녀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부자간의 은근한 정이 있기 마련이지만 나는 그마저도 먼 나라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나만 그랬던 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어린 시절에만 쌓을 수 있는 부자의 정을 모르고 성장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도 기어 다니는 모습만 보다가 갑자기 훌쩍 자라 뛰어다니는 자식이 얼마나 낯설게 다가왔을까. 전쟁이 남긴 폐해 중의 하나라도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아버지는 강직한 삶의 태도로 일관하신 분이었다. 남들에게는 심지가 굳고 성실한 분이었지만, 아들인 나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집안의 맏이였다. 밑으로 네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우리네 전통적인 관념에서 큰형은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동생들에게 아버지 이상으로 집안의 기둥이 되어주어야 했다. 게다가 당신의 자녀도 6남매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네 명의 남동생에 4남매까지. 그야말로 당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짐이 너무 컸다. 한 시도 긴장을 놓칠 수 없는 형편이었던 것이었다. 사형제 맏이와 6남매의 아버지로 집안을 건사하기까지 ‘군인’ 이상의 강렬한 정신과 성실한 삶의 태도가 필요했을 것이었다.

# “충성!” 경례로 인사 나누는 90대 노병들
나는 아버지의 삶을 지탱한 마음가짐 중의 하나가 ‘군인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여름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 옛 전우들이 병문안을 왔는데 여든을 넘어 아흔에 가까운 어르신들이 하나같이 병상 앞에서 경례를 붙였다.
“충성!”
말로만 충성이 아니었다. 치료 및 간병 등과 관련해 지원을 받으려고 신청서를 쓰겠다고 했더니 극구 말렸다.
“하지 마라. 내가 나라의 덕을 이만큼 보고 있는데.”
100세 나이에도 혹시나 나라 곳간을 축낼까 봐 완강하게 혜택을 거부하신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식 된 도리로 멈출 수는 없었다. 결국 등급을 받아 신청서를 넣었다. 지금은 읍내에 나가서 보훈처에서 파견한 도우미의 도움으로 일상을 이어가고 계신다. 한동안 거실을 오가며 걷기 운동을 하시다가 지금은 읍내 나들이를 하실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침반을 떠올리게 된다. 언제나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당신도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 덕에 5형제 맏이로서, 6남매의 아버지로서 한 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떤 어려운 일도 꾸준함과 이를 유지하는 인내만 있으면 다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 그대로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아버지의 삶이 후손 대대로 큰 교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