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 :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 : 고려왕조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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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고려왕조의 400년 수도 개경,
그 당당하고도 활기찬 모습을 되살려내다
개경의 기원과 주변의 자연환경부터, 궁궐과 성곽처럼 수도로서 필요했던 시설들은 물론 주거와 상업 등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과 관련한 내용까지 충실히 담아 고려의 당당한 도읍이자 활기찬 도시였던 당대 개경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하는 책. 한국역사연구회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등에서 활동하며 개경을 연구해 온 저자 박종진 교수가 수차례 개경을 직접 답사하며 찍은 사진들,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고려시기 개경 안팎의 주요 시설들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다량 수록되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

박종진

저자:박종진
1956년4월서울에서태어나서울대학교국사학과를졸업하고(1980년학사,1983년석사,1993년박사),울산대학교사학과와숙명여자대학교역사문화학과에서근무하였고,지금은숙명여자대학교명예교수이다.한국역사연구회,한국중세사연구회,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활동하였다.그동안고려사를공부하여개인저서로『고려시기재정운영과조세제도』(2000,서울대학교출판부),『고려시기지방제도연구』(2017,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박종진선생님과함께하는두근두근개성답사』(2018,청년사)를펴냈고,1996년부터한국역사연구회개경사연구반에참여하여『고려의황도개경』(2002,창비),『고려500년서울개경의생활사』(2007,휴머니스트),『역주조선시대개성유람기』(2021,혜안)를공동으로출판하였다.

목차

책을내면서

1개성의자연
개성주변의산과산줄기
개성주변의강과물줄기
「고려세계」에보이는개성주변의자연

2고려건국과개경천도
고려건국의기반,송악군
개경천도의배경과의미

3성곽
개성의성곽들
나성:고려의도성
황성:황제의성을의미하였나?
내성:조선시기의성
대흥산성:고려때부터있었나?

4궁궐
고려궁궐연구의어려움
고려시기궁궐의운영과변화
송악산남쪽의고려본궐
개경의대표이궁,수창궁과연경궁

5정치제도의운영과개경의관청
정치제도운영의특징
주요관청의위치

6태묘와사직
태묘와사직의설치와변화
태묘의구성과운영
사직단의구조와사직제례

7국자감과성균관
고려전기국자감의설치와정비
고려후기국자감의변화와유교교육의진흥
고려말성균관의중영과구조

8경제제도운영과개경
경제운영의특징과재정관서
조세제도의운영과개경
구휼제도의운영과개경

9시장
시장의설치와관리
시장의종류
시장의위치와형태

10도시문제와주거
주거

화재
치안

11절
개경절의기능
개경절의창건과위치
불교문화재

12왕릉
고려왕릉의위치와구조
고려왕릉의관리와조사
고려왕릉의현황

13고려의경기,개성부의설치와변화
왕도개경을지원하는특별구역,경기(개성부)
919년(태조2)개주의설치와범위
995년(성종14)개성부의설치와적현·기현
1018년(현종9)경기의성립과특징
1062년(문종16)지개성부사의설치
1308년(충선왕복위)개성부의개편과의미
경기(개성부)설치의명분과현실

14개경의지리적범위와행정체제
개경의지리적범위(경기·4교·개경)
5부방리제의시행과운영
4교의범위와기능

15강화천도와개경
강화천도논의와천도과정
강화천도시기의개경
개경환도과정과환도후의개경

16고려말조선초개경의위상
고려말천도의추진과의미
고려말경기의확대
조선건국과개경위상의변화

17개경의특징과위상
개경의조영과정과그특징
개경의특징과위상

개성관련주요자료
참고문헌
연표로읽는개성의역사

출판사 서평

개경을알기위해필요한단한권의책
서울에서60km도채떨어지지않은곳에개성(개경)이있다.태조왕건이919년에수도로정한뒤400년이넘도록고려의수도였던곳이다.조선이건국된뒤한양(서울)에수도의자리는내주었지만,조선시기에도줄곧가장중요한지방도시중하나로서특별한지위를누렸다.개성은이렇게우리역사에서큰비중을차지했던도시임에도휴전선이북에있다는한계탓에그간제대로된연구가제대로이루어지지못했다.그러다1990년대부터고려사연구가진전되고,특히2000년이후남북교류가활성화되면서많은연구성과가쌓였으나이를알기쉽게정리한책은찾기힘들었던것이현실이다.『개경-고려왕조의수도』는한국역사연구회와남북역사학자협의회등에서활동하며개경을연구해온박종진교수가고려시기개경을다방면에서조명한책이다.개경의기원과주변의자연환경부터,궁궐과성곽처럼수도로서필요했던시설들은물론주거와상업등그곳에살던사람들의생활과관련한내용까지충실히담아고려의당당한도읍이자활기찬도시였던당대개경의풍경을생생하게전한다.저자가수차례개경을직접답사하며찍은사진들,다양한자료를바탕으로고려시기개경안팎의주요시설들의위치를표시한지도가다량수록되어독자들의이해를돕는다.

개경은어떻게고려의수도가되었는가
고려는본래철원에서건국되었다.하지만바로다음해인919년에송악,후일의개경으로천도한다.여기에는여러가지이유가있다.먼저,태봉의수도였던철원에서왕건이역성혁명에반발하는수차례의반란에직면했기때문이다.이러한반발을억누르기위해왕건은자기가문의본거지였던개경을새로운수도로택하였다.또한개경은궁예가철원으로옮기기전까지3년간수도로삼았던곳이니만큼바로활용할수있는기반시설들이이미갖춰져있기도했다.여기에더해개경은고려영토의중심에해당했고예성강과임진강,한강과가까워수운에도유리한입지였다.한양으로천도한조선역시고려때의조운로를거의그대로이용했다는데서그지리적이점을알수있다.왕건은고구려의뒤를이어받는다는명분을내세워한때서경(평양)으로천도하려고도했으나현실적인이유로포기할수밖에없었고,이렇게고려의수도가된개경은몽골의침입을피해강화도로천도했던30여년을제외하고는쭉그위상을지켰다.

송악산남쪽의고려본궐,그전모를살피다
궁궐은왕조국가에서임금의권위를나타내는대표적인건축물이다.조선의수도인한양에경복궁과창덕궁과같은궁궐들이있었듯,고려의수도인개경에도당연히궁궐이있었다.송악산남쪽만월대가바로고려의본궐이있던자리이다.하지만막상고려의본궐은그전모가제대로밝혀지지않은상태였다.고려시기에도수차례변란을겪으면서파괴되고재건하기를반복했고,고려가망하고조선이한양으로천도한뒤에는폐허가되어그흔적또한땅에묻히고말았기때문이다.하지만조선시기때부터이미현장답사와문헌기록을통해고려궁궐의구조를밝히려는시도가있었으며북한에서도만월대에대한발굴조사를꾸준히진행해왔다.특히2007년부터는개성만월대남북공동발굴조사가시작되어2018년12월까지8차례에걸쳐만월대서부건축군에대한발굴을진행하였다.이책에서는이러한최신연구성과들을반영하여고려궁궐의전각배치와그특징을정리하였다.

나라의정신적지주,태묘와사직
『개경-고려왕조의수도』는『고려도경』과『고려사』등의문헌기록을바탕으로개경의태묘(종묘)와사직그리고중요관청들의위치와역할을소개하고있다.태묘와사직은나라의정신적인기반이되는시설로『주례』에따르면‘좌조우사’,즉태묘는궁성의왼쪽에사직은오른쪽에위치하는것이원칙이다.고려의태묘와사직또한크게는그원칙에따라배치되었다.하지만궁성바로앞에좌우대칭으로태묘와사직을배치했던중국과달리개경에서태묘와사직은궁성에서꽤떨어진곳에배치되었다.고려의태묘는지금은흔적도없이사라졌으나,조선의종묘가고려후기태묘의형태를이어받았다고전하여그모습을떠올려볼수는있다.

왕도개경을감싼삼중성벽
개경의성곽은궁성-황성-나성의삼중구조로이루어져있었다.궁성은가장안쪽에서본궐과그인근을보호하였고,황성은궁성바깥을감싸면서한때도성의역할을하였다.마지막으로개경을둘러싼송악산(북),오공산(서),용수산(남),부흥산(동)의능선을따라쌓은나성은둘레23km에이르고25개의문이있는장대한규모로개경을지키는도성이자그범위를설정하는경계였다.저자에따르면개경은일관된계획과방향을가지고형성된도시는아니었다.919년에도읍이된이래110년이지난1029년에서야나성이축성되면서완성된모습을갖출정도로오랜시간에걸쳐이루어진도시였다.이렇게만들어진왕도개경은여러독특한특징을갖고있었고,이는후일한양에도큰영향을끼쳤다.

불교와상업의도시개경
개경은불교도시라고할만큼절이많은도시였다.기록에따르면개경에는이름난절만도300개가넘었고,지금도이름을확인할수있는절이100개가넘는다.개경의절들은그저종교시설에머무르지않았다.개경의풍수를보완하기위한비보사찰로서지어지기도했고,왕실의제사를지내는곳이기도했다.또한임금들은절을이궁으로삼아머무르기도했으며때로는정치적인용도로활용하기도했다.개경안팎주요도로인근의절들은만남의장소였고,어려운백성들을돕는구휼의공간으로쓰이기도했다.지금도개성에는당대에만들어진불교문화재가여럿남아있어당시의모습을떠올리게한다.
개경곳곳에는시장이있었는데,특히개경의중심도로라할수있는남대가의시전행랑은기둥이1000개가넘었다고할정도로방대한규모였다.이외에도마시(말),돈시(돼지)와같은가축시장,종이시장인저시,기름시장인유시등도있었다.또한개경시내곳곳에는곡식,채소,땔감을파는시장이열려개경사람들의삶을지탱했다.이처럼활발한상업활동은개경의풍경을구성하는중요한요소였다.

고려망국이후의개경
조선은개경에서건국하였다.이성계는1392년개경의중심부에있던고려의별궁인수창궁에서즉위하여조선의첫임금이되었다.하지만고려의수도로서개경의위상은고려말부터이미흔들리고있었다.홍건적과왜구의침입으로나라가혼란에빠지자개경의운이다하였다는지기쇠왕설이대두하며수도를옮겨야한다는논의가일어났고,공양왕때는실제로남경(한양)에임금이반년남짓머무르기도하였다.건국후2년뒤인1394년조선은수도를한양으로옮겼다.1399년에는조선의제2대임금인정종이수도를다시개성으로옮기기도하였으나그뒤를이은태종이1404년한양으로환도하였고,이후개성은다시는수도의자리를되찾지못했다.이후개성은경기도의중심이자왕도한양을보좌하는도시로서조선시기내내중요한위상을차지하였고,일제강점기와한국전쟁을거친지금은분단의현장이자남북교류의상징으로우리에게울림을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