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1882년 여름

울릉도, 1882년 여름

$20.50
Description
울릉도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이들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귀중한 기록물!
울릉도는 수백 년 동안 비워진 섬이었다.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탓에 조선 태종 때부터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 쇄환정책을 펴왔던 터였다. 1882년 고종은 울릉도를 계속 비워둬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이규원을 현지로 보내 섬의 상황을 낱낱이 보고하도록 했다. 그 시기 이규원은 지천명의 나이였고, 지금으로 치자면 군 사단장급 장성에 해당하는 정3품 무관이었다.

당시 이규원이 남긴 보고서가 ‘울릉도 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다. 이규원은 고종에게 하직인사를 한 뒤 출발해 울릉도를 조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2개월의 여정을 일기에 담았다. 특히 12일간의 울릉도 조사 기록엔 매일의 날씨와 지형, 식생, 만난 사람들, 느낀 점 등을 상세히 적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고종이 이듬해 16가구 54명을 섬으로 이주시키며 울릉도 재개척의 역사가 시작됐다.

『우리가 몰랐던 울릉도, 1882년 여름』은 현직 기자와 작가가 함께 쓴 울릉도 근대사 기행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 뒤 해설이 따르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시윤이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 소설을 통해 130여 년 전 이규원 검찰사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렸고, 김도훈은 소설 뒤 이어지는 해설을 통해 그들의 여정을 소개하고 그동안 제대로 몰랐던 울릉도·독도와 관련한 대한민국 근대사를 쉽게 풀어 설명했다. 독자들이 역사의 흔적을 직접 찾아가볼 수 있도록 장소에 대한 안내도 빼놓지 않았다. 독특한 시선으로 울릉도 곳곳을 담아낸 100여 컷 사진이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저자

김도훈

金道勳
1972년생.신문기자.하얀산과곧추선절벽에설레던젊은날을보냈다.호텔방보단텐트가,정장보다는윈드재킷이익숙했던시절이었다.마흔에접어들며쉽게읽히는대중적인역사책한권내고싶다는꿈을품고살았다.이책이그책인지는알수없으나,매일신문기자로2019년1월초까지5년을울릉도에서보낸결과물인건확실하다.떠나는일이익숙했던지난날이너무나아득해,먼지쌓인빙벽화를이젠버릴까고민하고있다.함께지은책으로《도쿄스토리》,《비욘드오사카고베그리고도쿄》가있다.《우리가몰랐던울릉도,1882년여름》을기획했고,본문속해설부분과부록을쓰고사진을찍었다.

목차

책을내며

1장_가닿으라
울진구산포~울릉학포

2장_영(嶺)을넘다
학포~태하

3장_살만한땅
태하~현포~천부~나리동

4장_가장높은봉우리
나리동~성인봉~저동

5장_섬으로온사람들
저동~사동1리

6장_통구미골
사동1리∼통구미

7장_이름을새기다
통구미~학포

8장_종이위의섬
학포~죽암뱃길

9장_왜인의표목
죽암~도동~사동~학포뱃길

10장_빗장을열다
학포~울진구산포~서울

부록_울릉도의삶과문화100년의이야기
01오징어잡이_“그많던오징어는어디로갔을까”
02목선제작_“박치는목수는목수도아니지”
03음식문화_“울릉도에살려면‘오징어똥창’정도는먹어야지”
04종교와삶_“고단한삶위로해준버팀목이지”

맺으며

출판사 서평

현직기자와작가가함께쓴울릉도근대사기행!
역사적사실을바탕으로쓴소설뒤해설이따르는독특한형식!
지난100여년간섬사람들이일궈온삶과문화이야기도부록으로엮어

‘아직잠깨지않은바다였다.거친바다위세척의배는가랑잎처럼떠돌았다.’
130여년전,왕명을받아울릉도검찰사로임명된이규원은울릉도로향하던배의상황을이렇게묘사했다.
이전울릉도는수백년동안비워진섬이었다.고려때부터왜구의침입이잦았던탓에조선태종때부터주민을육지로이주시키고섬을비우는쇄환정책(刷還政策)을펴왔던터였다.대신2,3년에한번씩수토관(搜討官)을보내섬을관리했다.수토관은지방군지휘관인삼척영장(三陟營將)과월송만호(越松萬戶)가교대로맡았다.
거친동해를건너야하는수토길은녹록지않았다.광해군5년(1613년)삼척영장김연성은군사180여명을이끌고울릉도수토에나섰다가거친풍랑을만나배가전복돼군사들과함께익사했다.숙종20년(1694년)삼척첨사로임명된이준명은울릉도수토에나서기가두려워첨사직을회피했고,영조36년(1760년)삼척영장이유천도비슷한이유로자신을파직해달라는문서를조정에올리기도했다.
1882년고종은울릉도를계속비워둬선안된다는생각에서이규원을현지로보내섬의상황을낱낱이보고하도록했다.그시기이규원은지천명(知天命)의나이였고,지금으로치자면군사단장급장성에해당하는정3품무관이었다.그는10여일동안울릉도전역과해안을검찰한뒤보고서와지도를작성해올렸다.이를바탕으로고종이이듬해16가구54명을섬으로이주시키며울릉도재개척의역사가시작됐다.
당시이규원이남긴보고서가‘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다.이규원은고종에게하직인사를한뒤출발해울릉도를조사하고다시서울로돌아오기까지2개월의여정을일기에담았다.특히12일간의울릉도조사기록엔매일의날씨와지형,식생,만난사람들,느낀점등을상세히적었다.

《우리가몰랐던울릉도,1882년여름》은검찰일기를바탕으로써내려간울릉도·독도이야기다.울릉도에언제부터사람들이살았는지,조선정부는왜울릉도를비워두고관리했는지,울릉도에사람이살지않았다면독도를어떻게인지할수있었는지,다시사람이살게된것은언제부터였는지등상당수사람들이잘모르고지나쳤을우리역사를쉽게풀어알려준다.
현직신문기자와작가가함께작업한결과물이란점도눈길을끈다.이책을기획하고해설부분과부록을쓴김도훈은매일신문기자다.그는이책을완성하는게쉽지만은않았다고고백했다.그는“특히이규원일행의울릉도검찰모습을복원하는일이그랬다.이규원일행의여정을생생하고도치밀하게묘사하고싶었지만그건능력밖의일이란걸실감했다”고했다.역사적사실을담보할수있는사료는검찰일기가거의유일했고,기록과기록사이의빈공간을역사적상상력으로채우는일이녹록지않았던탓이다.그러나‘역사적사실을바탕으로한상상력을덧댄이야기에해설이따르는식’이란당초기획을버릴수도없는노릇이었다.해당부분을박시윤작가가맡아쓰게된이유다.

《우리가몰랐던울릉도,1882년여름》은‘역사의대중화’에방점을두고만들었다.지은이박시윤은역사적사실에상상력을더한소설을통해130여년전이규원검찰사의모습을생생하게되살렸다.지은이김도훈은소설뒤이어지는해설을통해그들의여정을소개하고그동안제대로몰랐던울릉도·독도와관련한대한민국근대사를쉽게풀어설명했다.독자들이역사의흔적을직접찾아가볼수있도록장소에대한안내도빼놓지않았다.상상력을동원했지만기록에없는이야기는피했고객관적사실을따랐다.그러면서도독자가읽기편하도록애썼다는게이들의설명이다.독특한시선으로울릉도곳곳을담아낸100여컷사진은책읽는재미를더한다.

“서점에가면울릉도에관한책이차고넘칠지도모르겠다.책이넘치는시대에책한권을보태미안한마음도있지만,이책을통해많은이들이옛모습을더듬어울릉도를좀더깊이들여다보는기회가됐으면하는바람이다.나아가울릉도와독도에대한관심으로,우리땅에대한애정으로이어질수있다면더할나위없겠다.”
두지은이의말이다.

[책속으로이어서]
(해설부분_p176~177)
다시학포에도착한이규원은육로검찰을통해확인한섬의식생과특징등을꼼꼼히기록했다.이가운데가장눈에띄는토산물은산삼이다.송병기단국대명예교수의책‘울릉도와독도’에따르면울릉도산삼은18세기중엽부터잠상(潛商)이비밀리에채취한뒤육지에판매했고,관원들도울릉도에사람을보내캐오도록할정도였다.일시적이긴했지만정조때는울릉도수토관들이각군현에서선발한30여명정도의채삼군(採蔘軍)을거느리고수토길에오르기도했다.정광중제주대교수는“당시이규원이만났거나울릉도에머물고있던약초꾼50여명은대부분산삼캐기를목적으로하고있었을것”이라고했다.
울릉도산삼의명성은20세기까지이어졌다.사동에사는박창규(76)씨가말했다.
“우리형수가산삼마이캤어.알봉(마을)이고향인데처녀때7뿌리캤다쿠데.근데나중에는너도나도산삼캤다캐서가보면다가짜인기라.인삼심어놓은것을뽑아놓고산삼이라고거짓말한거지.가짜배기팔다경찰서에붙들리가서직싸게뚜디리맞기도하고.10명중에1명정도가진짜였을라.진짜배기는두지(뒤주)에숨겨놨다가팔았는데다들제값도못받았을기라.”
동물로는요즘울릉도에선거의보이지않는슴새가대표적이다.주민들은‘깍새’라고불렀다.“안개낀날마당에불을놓으면불빛보고죽자고날라드는데,너무밝아눈이멀어가카는지그냥푹널져버래.봄에명태잡이나가면고기잡은거묵을라고배주변에바글바글했어.”
깍새는먹을게귀한시절주민들에게요긴한식량이되기도했다.박씨의부인정옥선(71)씨가말했다.
“고무라고무.질겨도그런고무가없다.껍질벗겨오래삶아야돼.”
박씨가한마디툭거든다.
“물(먹을)게없어가묵었지.맛은있는데너무질겨.”
울릉읍저동·도동,북면천부등울릉도곳곳에있는‘깍끼등마을’도깍새에서유래한이름이다.깍새는산란기가되면산등성이쪽으로올라오는데바닷가높은곳을‘깍새등’‘각새등’으로부르다지금은‘깍끼등’‘까끼등’‘깍깨등’으로부른다.북면섬목앞에있는관음도도‘깍새섬’으로불렸다.
그밖에이규원이‘울릉도토산물’로기록한고양이와쥐,지네는요즘울릉도에서도흔히볼수있다.특히예전고양이와쥐는육지의것보다몸집이많이컸다.1808년왕명에의해편찬한‘만기요람’은‘울릉도산고양이는개만큼크고,쥐가고양이만하다’고기록하고있다.박씨부부도비슷한얘기를들려줬다.
“1950,60년대만하더라도들고양이중큰건‘중개’(보통몸집의개)만해서화장실가기가얼마나무서웠다고.큰닭도다물어갔다.전란때쥐는또얼마나많았노.농사도못지을판이었어.그리고그때는독수리도많았는데병아리를못키울정도였다니까.병아리지키라고아(아이)이름을‘둑술’이로지은집도있었으니까.”

(부록부분_p288~289)
서면태하리에사는박해수(88)씨는울릉읍도동에살다16살무렵이던1940년대후반이곳으로왔다.‘강냉이밥’을도저히먹기싫어서였다.당시태하리는울릉도를통틀어논이가장많았다.
“‘논이젤로많은곳이어데고?’물으니태하동이라카데요.벼농사지어쌀밥먹고싶어왔는데쌀밥은못먹고고생만디따했지요.”
벼농사상황이이렇다보니감자와옥수수를주식으로하는식단은1980년대초반까지이어졌다.‘나리동처자들은쌀한말못먹고시집간다’란말이생길정도였다.
대신다양한밥의형태가만들어졌다.해조류인대황을삶아서물에우린뒤쌀이나보리를섞어대황밥을지었고,명이줄기를썰어서명이밥을만들었다.무채를썰어서보리옥수수와함께밥을지은무밥,옥수수를갈아넣고쌀이나보리와함께밥을한옥수수밥도마찬가지다.쌀은줄이면서양을늘리기위한방편이었던만큼,배합비율은집집마다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