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

$12.00
Description
2005년 『시와 반시』에 시, 2010년 『창비어린이』에 동시를 발표하며 ‘감각적 이미지스트’라는 평을 받은 김개미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악마는 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걷는사람)가 출간되었다.

김개미의 시는 현실과 환상, 그 어딘가를 맴돌며 서늘한 분위기로 발화한다. “숲 가장자리에서”(「춤추는 자는 노래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화자는 “외롭고 답답하”며 “흉측하고 너덜너덜하다”(「좀비가」). 화자를 고립시킨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너를 너무 사랑”했다는 시인의 말처럼, 사랑은 그의 아침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한 방울씩 녹아 사라지게 하고, 어두울수록 희망적이게 만든다. 시인은 이러한 사랑의 연가를 ‘악마’ ‘인형’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키워드로 천착한다. 화자가 말하는 이 지독한 사랑을 한 단락씩 살펴보자.

김개미 시인에게 악마란 혼자 오래 있다보면 목소리가 들리는, 원하는 게 많은 존재이다. 게으름을 피우느라 남은 젊음을 가져가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영화처럼 사랑에 빠지기를 바라는, 사랑을 저버리기로 결심한 날의 아침에 찾아와 함께 노는 존재. 악마는 시인을 사랑이라는 환상에 빠트려버린 원망의 대상이기도 하고 숨 막히는 현실에서 탈출시켜주길 바라는 구원의 대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런 그를 탓하면서도 어느새 동화되어 함께 시간을 보낸다. 마치 그가 연인이라는 관계 속 상대방이자 당사자라도 되는 것처럼.

인형은 눈에 이끼가 덮이고, 납작하게 밟혀 팔다리를 잃은, 말하지 않고 걷지 않고 화내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살아나지 않는 존재로 시집 속에 등장한다. 그런 인형을 두고 김개미 시인은 기꺼이 본인이 그의 할 일을 하겠다고 말한다. “상처받은 날도 웃을 일은 있어야”(「인형을 위한 시」) 하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시인은 이미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어. 그런 말은 사용하지 않아. 말할 수 있는 건 오늘은 숨이 찰 거라는 것.”(「인형에게서 온 편지」) 같은 기분을 느껴서일까.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너를 기다렸던 것 같아/너와 헤어지고 나서도 오랫동안/너를 기다렸던 것 같아/아픈 동안에는 더 기다렸던 것 같아 (중략) 한낮이면 햇빛에 녹아 사라지다 / 저녁이면 바람의 힘으로 단단해지곤 했던 것 같아/눈을 뜨고 있으면 보이지 않고/눈을 감으면 보이는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아 (중략) 할 일을 생각해낼 수 없는 날도 있었던 것 같아/게으르지 않지만 일할 수 없는 날들이/여러 날 있었던 것 같아“(「나는 암사마귀처럼」). 화자는 숲 가장자리에서 악마를 부르짖고 인형의 일을 하며 대답 없는 ‘너’를 기다린다. “나는 너를 기다리지/그게 나의 일/여기선 그 일밖에 없어”(「네가 나를 탄생시켰으니」). ‘너’에 대한 기다림은 기약이 없기 때문에 ‘나’에 대한 기다림으로 확장된다. “일부의 내가 가서/일부의 나를 기다리는”(「시인의 창세」) 그 기다림의 세계는 한없이 넓어져서 세상을 조망한다. “내 눈엔 그런 것만 보인다. 모두 무엇인가를 기다린다.”(「사천」).

”지옥이란 죽어서 가는 특별한 곳이 아니라/길을 잃었을 때 누구나 들어서는 곳“ (「조난」)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화자 또한 죽음 또는 그에 준하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일까. ”나도 오빠처럼/죽었다가 살아난 아이잖아/죽은 채로 살아가는 아이잖아“(「안산 오빠」). 김개미 시인은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한 어투로 체념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할 일을 찾는다. 이것이 기꺼이 악마의 이름을 외칠 수 있는 이유이자 명분이다.

“사람들은 나더러 왜 울지 않느냐고 한다. 나는 묻고 싶다. 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당신들 앞에서 울지 않을 뿐이지.”(「사천」)
저자

김개미

저자:김개미
강원도인제에서태어나2005년『시와반시』에시,2010년『창비어린이』에동시를발표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앵무새재우기』『자면서도다듣는애인아』,동시집『어이없는놈』『커다란빵생각』『쉬는시간에똥싸기싫어』『레고나라의여왕』『오줌이온다』등을냈다.제1회문학동네동시문학상,제1회권태응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1부오래터지는폭탄
뱀이되려했어
좀비가
폭탄과나무
꿈을꾸는게좋아
춤추는자는노래하지않는다
단독자
K의근황
내가울면별들이아름다워져
참나무아래누워
뼈가없는유령처럼,나는
초경
엘크를데려와
혼자오래사는사람은
한성이
인형을위한시

2부따뜻했던입술과따끔했던심장
인형에게서온편지
잠이오지않는밤에는
내심장은딱딱하게굳은고체였는데,
안녕도안녕
당신,오래아파요
네가나를탄생시켰으니
어떤동거
극심한오늘
오늘의약
그언덕은지금도겨울일것이다
붕괴의기억
사천
나는암사마귀처럼
나는이상합니다
장미꽃이만발하고향기가어지러워물을한모금마시고중얼거린다

3부다른사람의폭풍
빙벽
자신이어디에있는지자신조차알지못하면서상대방이자신을찾을거라고믿는남자의전화
최노인의산책거절
죽어서는우리와오래도록놀았다
쌍둥이언니
약냄새가나
네가어둠속에서손을뻗어나를만지면
아무것도보지마아무것도기억하지마아무것도기록하지마
한번의어제
미치광이풀
조난
또여름인거죠
안산오빠
막사
노을에대한내성

4부피부로말하는법
주머니에손을넣고먼지를뭉치는동안
인형의일1
인형의일2
밤같은낮낮같은밤
혈관에별이떠있다
악몽
난쟁이창고
가시일기
눈을뜨자까마귀가보인다
노끈
나는아직도
시인의창세
서예가
신은모른다
만취

해설
조그만사랑의시-안지영(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