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미 나를 상상하고 있었다 (2021 시 앤솔러지)

누군가 이미 나를 상상하고 있었다 (2021 시 앤솔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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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시인 12인의 신작시를 묶은 앤솔러지 『누군가 이미 나를 상상하고 있었다』는 당대 시인들의 다양한 시선을 담고 있다. 옴니버스 형식이지만 단일한 주제를 향해 모여 있지 않고, 각기 전혀 다른 지점에서 어떤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 우리의 시대를 각자의 방식으로 읽어내고 있는 12인의 시편이 수록된 이 시선집은 각각의 시인이 포착한 시선들을 개략적으로나마 산개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자장이 어디까지 펼쳐지고 있는지를 조망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이로써 이 시선집은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 하나의 세계를 두고 이를 해석하는 시선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권민경 시의 내장(內臟)에는 깊은 슬픔이 내장(內藏)되어 있다. 이 슬픔의 종류는 “센티멘털”과 같은 처연함이 아닌 “태반을 찢고 나오는 홀딱 젖은 털짐승처럼” 또는 자신의 생계를 걸고 다른 사람을 즐
저자

권민경

2011년〈동아일보〉신춘문예시부문당선.시집『베개는얼마나많은꿈을견뎌냈나요』가있다.

목차

09
권민경
번개|볼록한병|번아웃|아이돌

19
김민식
내가사슬을그릴때|계열과채굴|물에젖은유리공을던지고받는일에관하여|노천카페에서천혜향을까는사람의시점에서

35
김상혁
아이의빛|심하게봄|오세요미야기|무스

43
박지웅
검은귀|다시,사흘|시월여관|팔월

51
박진이
거기서슬프고여기서울어요|미국|빗소리|여행

61
윤선
프로펠러|나는일요일마다굿모닝랜드로간다|말을가두어요,조세핀|바벨론

73
이병철
설리(雪裏)|사랑의찬가|꽃잎이라는장마|홍차가아직따뜻할때

83
이재훈
탐닉의개인사|블루|폐허연구실|전염병

91
정민식
1월1일이모든사람의생일인나라|양형참작사유서|방수잘되는집|완벽한번역

103
정현우
종|유리의집|슬픔에게말을빌려|계수

111
주민현
그린란드에내리는편지|청소의이해|사이와사이|공중부양의자세

121
황은주
해변의만화경|완벽한타인|지하생활자|분명

129
평론시선(詩選),혹은시선(視線)|김대현(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권민경시의내장(內臟)에는깊은슬픔이내장(內藏)되어있다.이슬픔의종류는“센티멘털”과같은처연함이아닌“태반을찢고나오는홀딱젖은털짐승처럼”또는자신의생계를걸고다른사람을즐겁게하기위해“얼굴로랩을뚫으려용쓰는개그맨”(「아이돌」)과유사한종류의처절함이다.

김민식의시들은「내가사슬을그릴때」의서두에나타나는시구처럼“금팔찌에회칠을하고다시금박을입히는”시들이다.그의시는시인이말하고자하는어떤전언을이런저런“회칠”을통해은폐하고,이후다시원래의전언을떠오르게하는,하지만그와는분명히다른“금박”의외피를입힘으로써원본이아닌복제를통해그의전언을인지했다고생각하는읽는이들을다른곳으로인도하는작업이다.

김상혁의시는생활(生活)의피로를사유하는시들이다.물론여기서의미하는생활은단순히살아있다는사실그자체를가리키는생(生),즉삶이아니라그삶을유지하기위해어떤방식으로든적극적으로활동하는행동양식을의미한다.

박지웅의시에나타난사랑은그자체로도아름답지만그것이전하는정동은사랑을논하는여타의서정시와달리읽는이를무겁게짓누른다.「다시,사흘」도마찬가지다.다른세편의시와조금은다르게강한정동이나타나있는이시에서당신이전해주는화자는죽음에직면한다.

박진이의시에나타난슬픔은혼자슬프다.그래서더쓸쓸하다.마주하는다른슬픔과공명하지않고그래서더깊이가라앉는슬픔이그럴것이다.슬픔의정수는바로그지점이다.

윤선의시는모두가알고있으면서도아무도말해주지않는이말속의말들을거침없이들려준다.「프로펠러」는시스템내부에안정적으로정착하기위하여자신의원칙을지키지않고적당히세상과타협하며“마음에도없는날개”를달고“진실”과“양심”은물론“간”과“쓸개”도버려야하는현대인의삶을야유한다.

이병철의「설리(雪裏)」는이처럼세계와자신을단절하는사람을노래한다.하지만모든피억압자들이이처럼무력한것만은아니다.「사랑의찬가」또한사랑이라는이름의억압으로부터탈주하는자를다룬다.

이재훈의시에나타나고있는두드러진장소적특징은폐허다.폐허는한때생의활력으로가득하였지만이제는더이상자신의효용을증명할수없는것들이회복될수없는상처를입고웅크린채버려져있는장소를의미한다.그래서모든폐허는어떤강대하고폭력적인것에저항하지못하고희생된무력한주체들의흔적이기도하다.

전면에하나의풍경이있을때우리의시선은언제나가장자리가아닌소실점을향한다.당연히이는우리의탓이아니다.우리의뇌는미래지향적이며앞으로벌어질일에대하여예측을하는방식으로설계되어있기때문이다.문제는이로인한착시다.소실점이예비하는미래의환영과달리실재하는것은오히려소실점바깥에자리한가장자리의풍경들이기때문이다.하지만대체로우리는그것을무시하거나왜곡한다.정민식의시가주목하는것은바로이지점이다.

정현우의시는은밀한기의를담은이미지들의연쇄로이루어져있다.여기저기너울거리며사람의눈을현혹하는환영처럼끊임없이흘러넘치는선연한이미지들은그장대함으로인해시의전언을압도한다.

주민현의시는유려한서정의언어로우리시대의가장첨예한쟁점들에접근한다.언뜻평이해보이는이시도는사실생각보다많은이전세대의선배들이수사(修辭)와구호사이에서균형을잃고수없이좌초한지점이기도하다.

황은주의시편들에서공통적으로제시되는기법은특정한구문들의반복이다.반복되는구문들은개개의시편에리듬감을부여하는한편,구문에속한일부의기표들을변형하여미묘하게그의미를흐트러트린다.이를통해읽는이는반복적으로나타나는구문의의미속으로더욱깊이진입하며변형된기표들의차이를통해각구문들의고유성을인식할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