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애에 걸다 (장영춘 시집)

단애에 걸다 (장영춘 시집)

$9.04
Description
놓친 자아를 구하고 흘러 삶을 회복하고 성취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은 부분적으로 변형되거나 해체되기도 한다. 공간과 시간이 바뀌거나 재구성되기도 한다. 그렇게 무화되는 과거를 일으키고 되돌리는 일은 삶의 목에 다시 올가미를 씌우는 안간힘이 되어 상처 난 기억을 자주 덧나게 한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길을 떠난다.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애월 바다”(「단애에 걸다」)와 “이승이악”(「이승이오름」)을 거쳐, “페루의 이까사막”(「묵시록 2017」)으로, “진해에서 하동으로 화개장터 섬진강”(「사람을 찾습니다」)까지 떠도는 시인에게 그림자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그리움은 지독한 열병과도 같다. 출구도 활로도 없는 그리움이 단애에 걸린 내면을 미로처럼 끌고 간다.

이 겨울 누가 내게 마른 꽃을 건넨 걸까
거꾸로 걸어놓은 한 움큼 산수국이

기어코 애월 바다로
나를 끌고 나왔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한 무리 괭이갈매기
저마다 파도 끝에 사연들을 묻어놓고

해질녘 아득한 하늘
또 하루를 삭힌다

늦은 귀갓길에 눈 몇 송이 남아서
모난 마음 한쪽 자꾸만 깎아내다

아슬히 단애斷崖에 걸린
인연마저 떠민다
-「단애에 걸다」 전문

어떤 인연이었을까. “거꾸로 걸어놓은 한 움큼 산수국”, 생명을 잃은 그 “마른 꽃”이 기어이 화자를 바다로 끌어내고야 마는 해질녘의 “아득한 하늘”을 날아가는 “애월 바다” “한 무리 괭이갈매기”를 바라보다 돌아오는 “하루”. 저항할 수 없는 무력한 하루는 화자에겐 오직 “삭”혀지는 시간일 뿐이며, “모난 마음 한쪽”을 “자꾸만 깎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냉혹한 시간일 뿐이다. “늦은 귀갓길”에 동행하는 “눈 몇 송이”조차도 시간을 재촉하며 “아슬히 단애斷崖에 걸린/ 인연마저” 떠밀어낸다. 눈 몇 송이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 “기어코” 산목숨의 등을 떠미는 삶의 진부한 역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마음의 향방을 따라 그리운 시간을 내딛는 것이겠지만, 순간순간 전해지는 삶의 기척과 기미를 어쩌지 못하는, 존재의 슬픔으로 가득한 시다. 불가역적인 시간에 비해 공간의 가역성은 또 얼마나 잔인한가.
저자

장영춘

제주시애월읍곽지리에서태어나2001년『시조세계』로등단했다.시집『쇠똥구리의무단횡단』『어떤직유』,현대시조100인선『노란,그저노란』이있다.한국작가회의,제주작가,제주시조시인협회회원으로활동하고있다.

목차

차례

1부아득히비켜선자리

게·12
과물·13
쏙닥쏙닥·14
아득히비켜선자리·15
한반도언덕·16
새털같이·17
사람을찾습니다·18
고래콧구멍동굴·19
장한철산책로·20
진눈깨비·21
단애에걸다·22
묵시록2017·23

2부별짓다해봤자

꽃불·26
새별오름의봄·27
다시,가을·28
이승이오름·29
새들과병작하다·30
우도의밤·31
김녕,성세기해변·32
별도봉·33
폭풍,갈수없는곳·34
항파두리·35
흙으로쌓다·36

3부바람결증언하듯

선흘겨울딸기·38
오월·39
돼지감자·40
수선화의봄·41
절물오름·42
단풍·43
귀향鬼鄕·44
오동나무·45
거미의집·46
이제는노래하고싶네·47

4부내사랑굽이굽이

봉하마을·50
자작나무·51
물끄러미·52
삽살개눈망울같은·53
백서향·54
소매물도·55
이모바당·56
내사랑굽이굽이·57
그여자·58
빙어·59
들국·60

5부고독한왕이되다

왕이되다·62
만평밥상·63
바다나무좀·64
중심잡기·65
시월·66
숲길에서,문득·67
까투리·68
첫발·69
유턴·70
오늘-3·71
희망봉·72

■발문|박명숙
존재의마음을만지고싶은길위의시간들·74

출판사 서평

삶과죽음은오고가는길이같다.살아남은여성들은어머니와딸이되어서,어린생명에게로대를물리며촘촘한현실을이어간다.불확실하고불완전한삶도유산의몫으로가차없이상속된다.끝없는고민과고난에휘말리는역경에서살아남아자신의자리를찾고자기자신이되어야하지만,그렇게되질않는다.어머니에게세상의모든것은운명처럼다가왔을터이고선택은꿈이었을것이다.힘든노동의고통이단단한침묵과함께굽이쳐왔을것이다.

애월과금성사이
밀물과썰물사이
백록담숨어든물해안에와터지는
그만치그거리에는곽지리과물이있다

윗물은마시는물,
아랫물은멱감는물
숭숭뚫린담벼락여탕을훔쳐보던
깔깔깔조무래기들멱살잡힌낮달아

물허벅에퐁퐁퐁
원정물질발동기소리
울산일까방어진일까어머닌떠났어도
내고향마르지않는순비기꽃숨비소리
-「과물」전문

원정물질떠난유년의어머니를기다리던시간은애틋하고길기만하다.“애월과금성사이”,“밀물과썰물사이”,“백록담에숨어든물이해안에와터지는/그만치그거리”만큼길었을것이다.“곽지리과물”에서“멱”을감으며“담벼락”구멍으로“여탕을훔쳐보던”“조무래기들”의장난을“멱살”잡던“낮달”에도잠시먼그리움이실린다.“울산”이나“방어진”으로“원정물질”을떠난어머니를기다리던어린날의기억들이,“순비기꽃숨비소리”로남은고향에대한마르지않은사랑을노래하게한다.
어머니가되지않으면어머니를알수없는삶의유전.저승에서벌어이승에서쓴다는제주해녀로서의운명과생애는저승의물밑과이승의물위를오르내리는숨비소리로후대에유전되는삶의고리를엮어나간다.

별짓을다해봤자
시한줄없는가을
우연한발길따라서영아리오름에앉아
물에뜬뭉게구름만다독이고왔었다

깊이한번빠져봐야,
그게진정사랑인거
소금쟁이딛고간길에서푼어치사랑만
한번도젖지못하고물수제비로떠돈다

단풍나무따라가다,
왔던길도놓쳤다
아예분화구에터잡은세모고랭이처럼
물건너딸아이에게안부나묻는저녁
-「다시,가을」전문

사랑의깊이를떠올리는가을날의단상이다.화자는“서영아리오름에앉아/물에뜬뭉게구름만다독이”다가,“소금쟁이딛고간길”에“서푼어치사랑만/한번도젖지못하고물수제비”로떠도는사랑의부박함에대해생각하는중이다.또한,깊고붉은“단풍나무따라가다,/왔던길도놓”치고는별수없이“분화구에터잡은세모고랭이처럼/물건너딸아이에게안부나묻는저녁”을맞는정경을그려나간다.“깊이한번빠져봐야,/그게진정사랑”인걸알지만,어떤사랑도골육의사랑보다깊어질리없다는생각에이른다.뭉게구름이나소금쟁이의사랑이서푼어치사랑이라면,분화구에터잡은세모고랭이의사랑은정확히그대척점에서는사랑일것이다.“물건너딸아이”를내세우며혈육에대한화자의사랑도“다시,가을”을채비하는것이다.

다랑쉬오름보다낮고
아끈다랑쉬보다는높은
대서양과인도양사이뱃길도쉬어가는
펼쳐든세계지도에바람의길있었네

고난끝에다다른바다의오아시스
6박8일일정으로내발길도예까지와
한동안바람꽃같이흔들리고흔들리네

한겹의파도자락숙명처럼온것일까
그봄날황사평으로손놓고가버린아이
내안의희망봉찾아
다시여기떠나야겠네
-「희망봉」전문

시인은비로소‘희망’이란단어를쓴다.그희망은낯선곳으로나아가는희망이아니라떠난곳으로돌아오는희망이다.낯선곳에서의오랜방황은돌아오기위한자신과의긴싸움과도같았을것이다.절망의끝까지따라간곳에서희망을얻어돌아온다는것만큼간절한수확이있을까.“바람의길”은빛의길이되고,“바람꽃같이”흔들리던화자는깨닫게된다.파도를따라“숙명처럼온”길이아이가떠나간“황사평”으로돌아가는숙명적인발길을재촉한다.“내안의희망봉”은“손놓고가버린아이”가기다리는황사평이다.“바다의오아시스”가내안의“오아시스”인그곳황사평의아이에게로,‘희망’에게로날데려가는것이다.오랜세월시인의시는슬픔을일용할양식으로삼았으나이제더이상슬픔은끼니가아닐것이다.

첫발자국떼는것은
한우주를여는것

넘어지지않으면
일어서지못하지

아가야
세상의중심은
흔들리며가는거야
-「첫발」전문

“세상의중심”으로가는길은흔들리는길이다.그것이삶의길이다.“넘어지지않으면/일어서지못하”고일어서지못하면걸을수없다.“첫발자국”을떼는일은세상의벼랑으로한걸음내딛는일이며,“한우주를여는”일이다.세상의모든“아가”는어른을가르친다.아가가첫걸음으로여는세상을어른은열수없다.젖먹은힘을다해첫생명이온몸으로세상의중심을향해걷고자할때세상은넘어질수도기울어질수도없다.언제나시작일뿐마지막을모르는그작은발자국을세상의모든희망들이뒤따른다.

그리움과외로움에기대어쓴시들,그시편들이세상의흐르는시간들에대한허무와적막을품고달랜다.소멸과부재를표상하는상징과이미지들은시인의사유와감성을오래도록단련시켜왔다.살아있는날까지삶은끝나지않고,무한한날들이온다해도지난날을다시쓸수는없다.그림자와실체,부재와실재는이항대립하는관계가아니며,행복과불행도길이따로나뉘지않는다.바람의길을따라,오름을지나고사막과바다를건너황사평으로돌아온내면의노정은,빛과그림자에대한고뇌와성찰을자문하는구원의노정이었으리라.「단애에걸다」에서「첫발」까지,단애에걸려길을잃게된시는길없는지난한시간을고통스럽게통과한끝에마침내단애를건너는첫발을내디디면서,놓치려던자아를구하고방기된삶을회복하는주제를도출하고성취한다.‘너’를놓치면서‘나’를버리고‘너’를붙잡으면서‘나’를되찾는길찾기는상한영혼의치유를위한마음찾기가아닐것인가.
어떤시들은문을닫고읽어야한다.읽고나면온적이없는걸음으로문을나서야한다.『단애에걸다』,시인장영춘의시집읽기가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