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오늘 (이효범 시집)

오래된 오늘 (이효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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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대학에서 윤리강의를 하고 있는 이효범시인의 시는 자신이 쓴 철학서적 『끝없는 물음, 인간』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자신을 표본으로 인간에 대한 물음을 끝없이 자신에게 던지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산울림 같은 영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마치 신의 소리를 그대로 적어 옮긴 축자영감설처럼 그는 영감을 시적 모티브로 삼는다. 따라서 이효범의 시는 일부러 수사로 치장하지 않으면서 내부의 울림을 그대로 살린 반복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산문작가는 접촉성을 토대로 문장을 연결하지만 시인은 유사성을 토대로 시행을 연결한다”고 한 야콥슨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 김상현(시인)

권력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 시를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이 들린 무당처럼 어쩔 수 없이 시가 찾아와 운명처럼 시를 써야 하는 시인이나, 자신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시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시인이나 모두 환자들입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시를 씁니다. 시를 쓰지 않으면 치유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진심으로 쓴 시는 모두 치유의 약효를 가지고 있습니다.
- 이효범
저자

이효범

시인은 1953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1982년부터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5년 『심상』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는 『아내가 있는 풍경』 『때가 되어 별이 내게 오고』 『나무를 껴안다』가 있다.

목차

1부 꽃

꽃·14
봄의 사랑·15
봄·16
왓찰롱 사원·18
희망·19
계룡산 1·20
계룡산 2·21
계룡산 3·22
콩나물의 신비·25
삶·26
이별·27
나그네·28
권주가·29
손녀·30
아래와 위·31
벽·32
조용·33
화두·34

2부 구름

감자·36
비와 소나무·37
어느 여름날의 풍경·38
숲 속에서·39
칡·40
어금니·42
섬 1·44
섬 2·45
모자·46
본색·47
비 오는 저녁·48
왜 사느냐고·50
게구멍·53
홍수·54
안구·56
넝쿨장미·57
개와 친구·58

3부 단풍

가을·62
나이·63
청문회·64
오늘·66
환갑·67
중년 부부의 대화·68
탑·70
당근·71
사과·72
근황·74
좋은 시·76
은행나무·78
선물·79
산책·80
어떤 추억·82
감사한 하루·84
한용운님께·85

4부 눈

자전거·90
바닥·91
눈 내리는 저녁·92
시간·94
어머니와 아내·95
이뭐꼬·96
12월·97
지금 이 자리·98
기쁜 안녕·100
메리 크리스마스·101
산·102
근대 서양 과학·104
황홀·106
거대한 무덤·108
호박 이야기·110
24절기·112
오래된 오늘·114

■ 자작시 해설 | 이효범
시란 무엇인가·116

출판사 서평

시란 무엇인가

1.
나는 아침마다 여섯 곳에 카톡으로 한 편의 시를 보냅니다. 우리 가족, 초등학교 동창 모임, 고등학교 동기 모임, 시모임, 테니스 모임, 대학 동료 모임이 그곳입니다. 이 작업을 오랫동안 하고 있습니다. 주말을 뺀 일주일 내내 시를 보내려면 최소한 5편의 시를 준비해야 합니다. 어떤 날은 준비한 시가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밤새 쓴 연애편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 도저히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통 10편 정도를 일요일 오후에 선정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선정한 시는 제 키를 넘었습니다.
우리나라 시, 일본 시, 중국 시, 한문 시, 서양 대륙이나 영미의 시, 그 이외의 세계의 시를 접하면서 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글쎄 시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한마디로 단정할 수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을 정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축구, 야구, 바둑, 당구, 윷놀이, 술래잡기, 온라인상의 수많은 게임들에 어떤 공통적인 성질이 있을까요. 그래서 그는 ‘가족 유사성’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모든 가족의 얼굴을 보면 하나로 묶을 공통점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 형제 자매들은 서로서로 조금씩 닮기 때문에 누구네 가족으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시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수많은 글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조금씩 닮은 점이 있기 때문에 소설과 다르고 또 개떡일 수 없는 겁니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거창한 시의 정의를 찾는 작업이 아닙니다. 내가 만난 시의 모습을 그리려는 것입니다. 일찍이 공자는 황하를 중심으로 불려졌던 시 3000여 편을 305편으로 간추려 시경(詩經)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시경의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사무사(思毋邪)’라고 평했습니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시에 대해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할 능력과 용기는 없습니다. 다만 시를 쓰면서, 그리고 시를 읽고, 정리하면서 시들이 햇살 아래 내게 보여준 따뜻한 얼굴의 여러 모습들을 단편적으로 짤막하게 묘사하려고 합니다.

2.
시는 한자로 ‘詩’라고 씁니다. 이 글자는 말씀 ‘언(言)’에 절 ‘사(寺)’가 합쳐진 글자이니 시는 ‘절에서 하는 말씀’이라는 뜻이 됩니다. 절에서 하는 말씀은 도대체 어떤 말씀일까요? 글쎄요. 그것은 우선 진리의 언어라고 생각됩니다.
불교에선 말하는 진리는 깨달음이겠지요. 깨달음의 내용을 부처는 말합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며,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고, 그 마음을 스스로 맑게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그 마음을 맑게 하여 자신의 성품을 사실 그대로 보는 것, 그리하여 자신은 없다는 것(無我)을 깨닫는 것이 불교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불교가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에 의하면 예수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사람들을 죄에서, 또 그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 구원하려고 하십니다. 공자는 또 어떻습니까? 그는 “아침에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 夕死可矣)”고 논어 이인편에서 말합니다. 종교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이 문제로 몇 천 년을 싸움하고 있습니다.
시는 예술의 한 분야입니다. 그런 예술에 속하는 시가 과연 종교적 거대 진리, 평생을 구도하면서 어쩌면 목숨보다도 더 귀한 이런 진리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철학자들이 입에 거품을 품고 다투고 있는 냉혹하기 그지없는 그런 차디찬 진리를 따라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시는 종교도, 철학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가는 길도 다릅니다. 예술은 크게는 진, 선, 미의 가치 중에서 미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시도 예술에 속하니까 본질적으로 심미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시는 진리를 떠나 인간의 감정이나 표현하고 사람들에게 생경함과 충격을 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를 통한 정화만으로 시를 온전히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시는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진리와 관계합니다. 그런데 진리는 자연에도, 무의식에도, 문화나 사회에도, 심지어 존재 그 자체나, 우리가 밥짓고 설거지하는 일상적인 곳에도 존재합니다. 산을 산이라고 말하고 물을 물이라고 말하면 이것이야말로 진리입니다. 정의를 불의라고 말하거나 불의를 정의라고 하면 거짓이 됩니다.
과학은 진리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진리만이 진리의 무한한 세계를 우리에게 다 드러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고 있는 구두를 생각해 봅시다. 과학은 이 구두를 어떻게 말할까요.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과적으로 보이는 물질적 현상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두의 전부는 아닙니다. 자식들의 교육 때문에 번번한 구두 한 번 사지 못하고 뒤축을 몇 번이나 갈아 끼면서 물이 새어 양말이나 발가락이 젖지만 그냥 신고 일하는 늙은 노동자의 낡은 구두를 과학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구두에는 과학자가 설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구두의 진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객관적이지도 않고 검증 가능하지도 않는 진리를 시나 그림이나 음악은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전혀 관계없이 보이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놓여 있기도 합니다. 또한 진리는 퍼즐처럼 여러 조각을 맞추어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막장의 광부처럼 평생 동안 어둠에서 진리라는 보석을 캐는 사람입니다. 또한 시인은 예리한 탐정처럼 희미한 단서에서 진리라는 진범을 밝혀내는 사람입니다. 아니 시인은 아마 요리사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음식 재료들을 적절한 비율로 섞은 후에 지지고 볶아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감미로운 밥상을 차리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창작한 시는 많은 사람들이 놓친, 그리고 잘못 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적 언어를 통해서 말이죠. 언어를 통한 진리 세계의 확대, 그것이 시의 존재 이유입니다.

3.
절의 언어인 시는 침묵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침묵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모순입니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 즉 비언어를 뜻합니다. 그러면 침묵의 언어는 ‘비언어의 언어’가 됩니다. 이것은 그토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싫어하고 그리스 사람들이 법정에서 피를 흘리며 논쟁했던, 동시에 존립할 수 없는 것을 존립시키는 오류가 됩니다. 이것은 둥근 삼각형처럼 전지전능한 신도 만들 수 없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런 오류를 인정하게 되면 존재도, 사유도, 추리도, 언어도 불가능해 집니다.
그런데 시가 무엇이관대 감히 침묵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침묵과 대비되는 곳에 소란이나 시끄러움이 있습니다. 시장에 나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소리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가게의 물건이 가장 싸고 품질도 좋다고 상인은 입에 거품을 물고 손님을 끌어당깁니다. 한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아주머니는 소리 내어 흥정합니다. 생활의 최일선, 살아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끄러움 속에는 살려는 의지만 강렬하게 부딪칠 뿐 한 발짝 물러서서 인생을 반추하고 그것에서 샘물처럼 고요히 고이는 정갈한 의미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끄러운 소리는 거래가 끝난 후에는 곧바로 사라집니다. 그것은 기록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반추한 의미는 오래 여운으로 지속되어 어떤 경우에 다시 커다란 울림으로 재생됩니다. 시는 시장의 시끄러운 언어가 아닙니다. 찰나적이고, 현실적이고, 목전의 이익만 추구하는 일차적 욕망의 소리가 아닙니다. 말하고 싶은 욕망을 참고 또 참으며,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고 기다리며, 그것이 가능했던 토대와 그것이 가려고 하는 지점까지를 모두 아우르면서 조심스럽게, 조그맣게, 은밀하게 그러나 거부할 수 없고, 섬뜩하게, 심장에 대고 외치는 속삭임인 것입니다. 이런 시는 오랜 기다림의 침묵 속에서만 발효됩니다. 그것은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이 아닙니다. 아침 일찍 샘에서 길어 온 동이의 물을, 집 뒤 장독대 위에 놓고, 눈물로 기도한 후에, 주변에 뿌려 사방을 정갈하게 하는 정한수인 것입니다.

4.
절의 언어인 시는 또한 자비의 언어입니다. 자비는 사랑이나 인과 같은 의미입니다. 서양에서는 보통 에로스적인 사랑, 필리아적인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에로스는 극빈의 신 페니아(Penia)와 편법의 신 포로스(Poros)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이 두 반대의 속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풍요와 빈궁 사이, 지식과 무지 사이, 행복과 불행 사이를 끝없이 방황하는 것이 에로스적 사랑의 모습입니다. 필리아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통 우정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더 넓은 의미로,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 결핍이나 열정으로 전락하지 않는 상호적인 온정을 필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아가페는 기독교 성서 속에 나오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려오는 은총적인 사랑입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공자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인은 인간이 사회적 인간으로 형성될 수 있는 가능 조건입니다. 공자는 인간은 누구나 강직하고, 과감하고, 소박하고, 어눌하고, 순박하고, 용기 있고, 근심이 없으며, 예에 따라 행동할 줄 알고,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을 먹으며 누추한 집에 살면서도 생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인이라는 선한 본성을 하늘로부터 부여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기적으로만 살지 말고 그런 본성을 실현하며 살아야 진정으로 사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불교의 자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남방 불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