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맑음 (문순자 시집)

어쩌다 맑음 (문순자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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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문순자 시인의 이번 시집은 ‘언제나 맑음’이 아닌 ‘어쩌다 맑음’의 생을 노래하고 있다.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피 흘리는 것”이라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몹쓸 바람 때리는 내리막의 하산길이 도처에 있는, ‘어쩌다 맑을 뿐인’ 생임을 그는 잘 안다. 바닷속을 훤히 꿰고 있는 상군 해녀가 편하고 좋은 곳을 선점하지 않고 오히려 더 깊고 먼바다로 나가 존경을 받는 것처럼, 그는 그런 어둠 가득한 날에도 여장부처럼 생의 먼바다로 앞장서서 시의 물질을 나간다. 그리고는 가쁜 생의 바다에서 생명 있는 것들의 소리를 길어 올린다. 존재가 피우는 작은 소리에도 영혼의 촉수가 돋아 잠 못 드는 그는 지극하게 생을 노래하는 상군 가인歌人이다.
풍경보다 아름다운 지도는 없다. 수많은 풍경의 소리가 올올이 새겨진 이번 시집의 지도를 그리면서, 그가 빚어낼 깊고 아득한 다음 풍경들이 벌써, 몹시도 궁금해진다.
저자

문순자

제주애월에서태어나1999년농민신문신춘문예로등단하여작품활동을시작하였다.시조집『파랑주의보』『아슬아슬』시선집『왼손도손이다』90년대5인시조집『가랑비동동』등이있으며,시조시학젊은시인상,한국시조작품상,노산시조문학상등을받았다.

목차

1부봄날의교집합

향일암동백·13
소리쟁이·14
씨름판·15
상강무렵·16
우도땅콩·17
봄날의교집합·18
백록담1초·19
어쩌다맑음·20
붉은찔레꽃·21
방애불·22

2부내뺨을쳐라

감귤꽃,따다·27
넥타이·28
어느비닐하우스·29
섭섭한타협·30
세배가는달·31
내뺨을쳐라·32
갯무꽃·33
피봤다·34
박달나무꽃피다·35
금니빨·36

3부사초에단풍들다

꽃기린·41
혜화문아래·42
사초에단풍들다·43
괭이밥·44
각시투구꽃·45
왕관무릇·46
개구리발톱꽃·47
길마가지나무·48
산굴뚝나비·49
추풍령삘기꽃·50

4부웃음바다울음바다

잘코사니!·53
아버지·54
꽃과바다·55
호구虎口·56
다시,쓰다·57
몸으로,갑년·58
도둑비·59
첫차·60
늦눈마저보내고·61
흰접시꽃·62

5부홀리듯벌건대낮

꿀풀·65
시치미·66
봉갓다·67
유목·68
갯메꽃·69
호떡·70
무등이왓·71
정자리·72
송악산으아리꽃·73
쇠죽은못·74

해설|류미야
상군가인歌人이부르는지극한생의노래·79

출판사 서평

[특징]
시인의웅숭깊고자연스러운시간의식,생에대한의식은생로병사의도저한고통앞에서도비극에함몰되지않는의연한태도를끌어낸다.

바다에반쯤잠겼다썰물녘드러나는
애월돌염전에기대사는갯질경같이
한사코바다에기대
서성이는생이있다

그렇게아흔아홉세밑겨우넘겼는데
간밤엔육십년전돌아가신할머니가
아기젖물리란다며앞가슴풀어낸다

사나흘은뜬눈으로,사나흘은잠에취해
꿈속에서도꿈을꾸는어머니저섬망증
오늘은어쩌다맑음
요양원일기예보
-「어쩌다맑음」전문

전체시집속에는가족관련의시편들이다수등장하는데,가령「추풍령삘기꽃」「산굴뚝나비」「아버지」「꽃과바다」등의‘아버지시편’과남편의「넥타이」외,시어머니가등장하는「흰접시꽃」,손자,딸(들)과사위의「봄날의교집합」「혜화문아래」「시치미」,아들의「봉갓다」「정자리」등이그것이다.이외에도「상강무렵」「붉은찔레꽃」「갯무꽃」「금니빨」「박달나무꽃피다」같은‘어머니시편’들에서는시인이가슴으로부르는먹먹한사모곡(思母曲)을들을수있다.이처럼끈끈하고입체적인혈연의식은시인이단독자로서의개인이기보다는핏줄공동체속에서의삶의의미를중시하는,강한유대감과가족애를지녔음을보여주는것이기도하다.
그가운데서도위작품에는섬망에빠진백수(白壽)노모가,그리운어머니를꿈속에서만나젊은여식(女息)으로돌아가는모습,또그것을초로에접어든딸이지켜보는장면이중첩되어그려져있다.풍경이풍경을바라보는생의아이러니가우리로하여금이야기너머의이야기를감득하게한다.아마도젊은날“바다에기대”어린생들을키워냈을그어머니,파란곡절생의바다에서물질을끝낸지금어린아이의시간으로다시돌아간것이다.이제는다자라그자신이너른‘모성의바다’를이룬딸에게온전히기대고있는것이다.호젓한슬픔가운데서도“어쩌다맑음”의하루치낭보(朗報)를덤덤히받아들이는화자의모습에서생의한가운데를지키는어떤의연한아름다움과감동을느끼게된다.

삶을순연히바라보고받아들이는이러한태도는자신의삶근방에서동행하는소중한것들과의‘교집합’을찾게하고,그시간을‘봄날’로여기게한다.

어린봄햇살몇줌

어찌그냥흘리랴
겨우내눅눅해진이불홑청가는사이
일곱살벌테손자가반짇고릴엎질렀다

저건전리품이다
시집올때딸려온
쪽가위골무단추남편의첫월급봉투
덩달아마른탯줄도불쑥튀어나온다

벼락맞은대추나무도장이나만들까
세상에남길거라곤하나뿐인탯줄도장
아들놈첫울음같은
연두로꾹찍고싶다
-「봄날의교집합」전문

이번시집전체를놓고볼때계절감이직간접으로드러나는작품이많은데,그중에도특히많은시편의배경이되는시간적배경이바로‘봄’이다.과연이봄날의시간대가시인의의식저변에서어떤강렬한근원으로자리잡고있길래이렇듯깊숙히시의형성에관여하는것일까.위시「봄날의교집합」에서그하나의단초(端初)를찾아볼수있다.기실생이란“쪽가위”와“골무”,“단추”,“첫월급봉투”,뜬금없는“마른탯줄”등이두서없이담겨있는“반짇고리”같은것인지도모른다.저마다의시간속에서소중한의미였을그것들은지금나의‘인생’이라는한바구니안에오롯이쌓여온과거의“전리품”일뿐이다.그것을“일곱살벌테손자”가“엎지”르는순간을담은이야기가바로이「봄날의교집합」이다.“눅눅해진이불홑청”처럼망각으로지지부진해진일상의시간을전복하며다시“첫울음”으로새롭게발견해낼때,그것은강력한“탯줄도장”의주술이되어푸르게푸르게핏줄의시간을“어린봄”의시간으로이어갈것이다.시인은돌발적이고사소한봄날의한순간을의미롭게포착함으로써생의전시간을켜켜이돌아보며그가운데서경이로움을발견해내고있다.유난하지않은일상
의장면속에서그것을관통하고조명하는어떤‘찬란’을읽어내는힘이시집전체에환한봄날의빛을얹어주고있다.

핏줄에대한깊은마음은,그리하여자기삶의일부가된외부생명들에대한따뜻한표용과공존의식으로도자연스럽게이양된다.포용과상생을꿈꾸는시인에게함께풍우맞으며살아가는땅의존재들은단순한사물이아닌동일시의대상이되기도한다.

첫수확감귤밭을어떻게알았을까
‘링링’‘타파’‘미탁’그리고‘하기비스’
이름도낯선태풍들
번갈아다녀간다

크든작든농사야하늘이짓는다지만
생색내듯서너됫박햇살은못보탤망정
어린것,
그만흔들고

차라리내뺨을쳐라
-「내뺨을쳐라」전문

여자에게과거는묻는게아니랬다
사나흘뭍나들이헛바람든감귤밭
여름순가을순가리랴
부나비같은사랑

그사이?은밀하게알슬은귤굴나방
하우스몇평없으면그게어디농사꾼인가
이파리,
저은빛공사
영락없는비닐하우스

이래봬도내꿈은바람타는비닐하우스
쇠붙이하나없이맨몸으로굴을파는
애벌레,저성스런농법
내무릎을꿇는다
-「어느비닐하우스」전문

“차라리내뺨을쳐라”고소리치는화자의모습에서「쇠죽은못」의그‘여장부’의모습이보인다.사람살이나관계의문제라면고요하게“빌어보”든(「향일암동백」)“세월에나맡”겨보든(「몸으로,갑년」)“개점휴업”이라도하겠지만(「씨름판」).그것이아닌근원적인삶을위협하고“어린것”의생명을앗으려는거대한폭력앞에서는ㅡ그것이대자연일지라도ㅡ온몸으로,온힘으로맞서고분투해야하는것이다.이런화자의의식의저변에는생명을잉태하고지키는위대한여성성,‘모성’이자리잡고있다.이때의모성은‘생명성’의다른이름이다.생명을
지킬수있는생명은강인하면서도너그럽다.그런너그러움만이어리고약한것에연민과사랑을느끼며,그앞에“무릎을꿇”을수있는것이다.
「어느비닐하우스」에는이른바‘해충’으로치부되는“귤굴나방”의침노(侵擄)앞에서도기꺼이마음한자리를내주는화자가등장한다.“맨몸으로굴을파는”애벌레의고군분투를“성스런농법”의“은빛공사”라칭하며대역사(大役事)로기록하고있다.무엇을막론하고생명을거는일은비장하고경외롭다.미물로불리는것앞에기꺼이무릎꿇은화자는이렇게외치고싶었는지도모른다.“나방의삶도모르면서위대한인간을말하다니!”
이런관대함과넉넉함을가지고있기에다음과같은시편도가능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