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나무 아래에서 (박일우 시집)

싸리나무 아래에서 (박일우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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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낡은 사진 속 쑥스러운 피사체가 되기로 했다.
오래 묵은 서랍의 잡동사니를 꺼내어
몇 개의 주제에 담아 보았다.
더러는 카오스에서 양자적 글쓰기를 시연해 보고 싶었다.
텍스트의 문자가 입자라면 관측되는 순간 파장으로 번지는
기이한 현상을 포착하고 싶었다.

1부 안으로(introspectio)는
델포이 내부 기둥에 새긴 내면의 성찰 “자신을 알라”처럼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으로 내면의 본질에 대한 실체를 들여다보았다.
2부 응시(Gaze)에서는 객체화된 주체를 조명하였다.
응시는 주체의 응시일 수도 있지만 객체의 주체에 대한 응시이기도 하다.
그것이 때론 불안으로, 내면화된 상징의 침투로 자리 잡은 무의식이기도 하다.
3부 카오스(chaos)에서는 흔들리는 거울을 드러낸다.
시뮬라크르(simulacre)가 보여주는 실체의 진실에 대한 각성이다.
그것은 기나긴 카오스이면서 해체이며 자아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한 경계에 자신을 위치 지우는 일이다.
거울은 흔들릴 때 비로소 진실을 드러낸다.
고정된 이미지는 하나의 그림자일 뿐이다,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겹쳐진 얼굴과 세계를 본다.
그런 의미에서 카오스는 열려 있는 공간이다.
여기 담긴 시들은 확정된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마치 양자의 세계에서 입자가 동시에 여러 상태로 실재하듯,
한 편의 시는 수많은 가능성 위에 중첩되어 있다.
독자가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그 흔들림 속에서 의미는 달리 나타난다.
어제의 독자가 발견한 풍경과 오늘의 독자가 마주하는 울림은 일치하지 않는다.
불확정성의 언어가 독자의 양자적 해석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것은 언어들의 얽힘의 장이다. ‘바람’은 ‘구름’과 연결되고,
‘햇빛’은 ‘나무’와 다시 울린다.
멀리 떨어진 언어들이 서로를 비추며 독자의 삶과 기억과도 얽혀 들어간다.
시와 독자, 텍스트와 세계가 비국소성의 원리로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며 공명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의 도약을 낳는다.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침묵과 여백에서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깨달음.
그것은 창발의 양자적 도약으로 피어나는 언어의 얽힘들이다.
따라서 시어들의 행간을 들여다보는 것은
완성된 의미를 획득하는 일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자신의 거울을 만나는 일이다.
그 거울은 언제나 다른 빛으로 흔들리고,
독자는 그 흔들림 속에서
자신만의 우주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4부. 바깥에서(De hors)
내부가 창조한 바깥은 타자의 얼굴을 버리고 새롭게 세상을 들여다본다. 그 위로 형상도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지향하게 한다.
바깥은 안으로 나와 응시 속에서 카오스를 유발하고 무한히 사라진다.
날숨보다 들숨이 깊은 날에는
더 완전한 밤을 위하여, 그런 건 존재하지 않지만,
종종걸음으로 외출을 서둘러야겠다.


----- ‘시인의 말’
저자

박일우

저자:박일우
2019년『시와정신』으로등단.

목차

005시인의말

____제1부introspectio

015풀꽃시계
017사월과오월에붙이는-brioso
019기계의눈물
021그림자의봄날
023정오의여행
025춤추는마네킹
027자각몽
029예선생
031이삿날
034흰두루마기
036삼층천
038봄날의수채화
039회전목마
040즐거운우리집
041민들레









____제2부Gaze

045솟대의꿈
047산다는건
049찻잔속
051완전한방목
053기도
054뒷산
056나그네
057카리브해의풍차
059빈방
061모네의교회
063사월걸이
064풍금
065기러기의신국
066제1법칙에게
067석대도









____제3부Chaos

071붉은달이뜨는밤
072천개의거울
074오래된신세계
076친구에게
078육체의마을
080지나간올봄에는
082낡은신학도
083성베드로수도원의밤
085산새
086향연의주문
088키오스크환승
090오월의새벽에게
091씻김굿
093수취인없는하루
094원더풀월드









____제4부Dehors

097다마스쿠스의돈오
098별의아들
100금강겨울
101내일의원시인
102잠들기전
104꽃병과시계와책
106시편제1편의계단
108가루서말
110날은저물고
112텃밭
113마리아
115싸리나무아래
117땅에쓴글씨
119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
121무서운사랑

123해설|존재의심연을응시하는반자도지동의시학|김홍진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솟대의꿈>

티끌날리는마당으로사그라드는햇살
새의덫처럼솟대에걸리기도했다
박물관전시장의여인은이제아프지않다
해진편지와함께누워있고나는유리벽에서있다

천산아래티베트여느여인처럼
지어준배냇저고리로연명한계절들이소멸할아우성으로
솟대위를날아갔다
비바람에흙을묻히곤했다
팔다리도없이
장승의이름은계절과함께퇴색해갔다
숨은미소는초승달처럼야위어빗물과모래알로채워갈것이다

벗은몸으로들판을부둥켜안고돌아와떨고있는상처난바람
꼭감은눈으로도듣지못하는그믐에는
나의두눈과귀도달려오는말발굽에멀어져갈것이다
신은이제남루한목청으로말하지않는다

불어오는
절벽의넝쿨을갉아먹는찰나가회오리치는난간
살가운것들의낯섦과영원한것들의흔적을동여맨
풍마風馬의줄을붙드는간절한손바닥도팔을떠날것이다

달빛쓰러지는허허로운날에는
무거운낙엽송퍼덕여별빛자욱하게날개를휘젖는다
가끔은삼월삼짇날장대에묶인숨을끊어
마을을실어오르기도하였다
돋음발로붙들기도했다
솟대가날아오른다
장승은남겨지고
죽은솟대가솟대를장사지내는밤
-----45~46쪽

<싸리나무아래broomtree*>

살아천년쓰러져천년
붉게칠한호양나무숲에서
양털모자에손가방옆에낀
속눈썹사이로별빛을담은
코카서스인의파란꿈이든
히브리인의노란꿈이든

일어나먹으라하네
천산을물어서역가는길
출렁이는사막은큰싸리나무아래
엘리야의날카로운살과
모세의불타는장작이되리

이제는주머니씨앗도빛을보고
농부는도리깨를다듬었으니
목자는벌써떠났고
별빛이나쫓아가는사막은
순례에찌든싸리꽃아래누워
바람으로정박하는배는

모래줄기로이어짠바구니
그리움은새의날갯죽지뼈로만든
하얀이가드러나는가면을쓰고
딱딱한태양에사막을노젓는팔은흐느적거린다
*broomtree:싸리나무,금작화,로뎀나무.
-----115~1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