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속을 걷다

얼음 속을 걷다

$15.00
Description
“신비로운 건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_ 김연수(소설가)
몽상과 현실이 뒤섞인 어느 기이하고 아름다운 여행기
독특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영화의 거장
베르너 헤어초크의 심연 속으로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베르너 헤어초크(1942~)는 1974년 11월, 파리에 있는 친구에게 온 전화 한 통을 받는다. 대학생 때 만난 평생의 은사이자 전후 독일 영화의 정신적 지주인 영화평론가 로테 아이스너(1896~1983)가 위독하니 어서 그가 입원한 파리의 병원으로 오라는 이야기였다. 헤어초크는 최소한의 짐과 돈만 챙긴 채 11월 23일에 뮌헨을 떠나 춥고 습한 중부 유럽의 겨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어가서 12월 14일에 파리에서 아이스너를 만난다. 이 책은 이 기이한 22일간의 여정 중에 헤어초크가 육필로 남긴 기록을 거의 그대로 담은 것이다. 말 그대로 얼음 속을 걸어 파리로 향했던 이야기를.
『얼음 속을 걷다』는 어디에도 없는 꿈 같은 여행기다. 누군가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 아니라고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헤어초크는 다듬어지지 않은 내면을 거침없이 솔직하게 드러낸다. 때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몽상과 현실이 뒤섞여 있는 이 여행기는 기이하고도 아름답다. 독특한 시선을 지닌 예술영화의 거장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는 한 편의 영화를 닮은 책이다.

“오래전, 꿈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파리에서 죽어가는 한 여자를 살리기 위해 한 남자가
무작정 뮌헨에서 파리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그게 내가 들은 이야기의 전부였다.
그리고 여기 그 남자가 걸어가는 동안 쓴 책이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녀는 죽으면 안 된다”라고,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죽어서는 안 된다”라고.
그렇게 동어반복의 걸음걸이로 그는 8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었다.
내게도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날이 있었다.
그 이야기 속의 남자처럼 나도 정신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개업을 알리는 고깃집에서 흐르는 음악 소리를 들었고,
화물트럭 기사의 지친 얼굴을 봤다.
그렇게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전과 다를 바 없는 이 세계가 어찌나 기이하던지.
그러면서도 또 얼마나 다행이던지.
신비로운 건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 남자는 죽음에 맞서 걸었고, 수많은 삶을 목격했고, 그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결말은 꿈과 같다. 죽음에서 시작해 꿈으로 끝나는 책이다.“

_ 김연수(소설가)
저자

베르너헤어초크

독일영화감독,제작자.작가와배우로도활동하고있다.1942년9월5일뮌헨에서태어나,뮌헨대학과피츠버그대학에서역사,문학,연극학을전공했다.1961년첫영화를만든이후현재까지60편이상의장·단편영화와다큐멘터리영화를만들었다.독일의작가주의영화를대표하는헤어초크는1970~1980년대‘뉴저먼시네마’의주축으로독일영화의수준을높이는데일조했다.「아귀레,신의분노」(1972),「노스페라투」(1979),「보이체크」(1979),「피츠카랄도」(1982),「거친창공너머」(2005),「퀸오브데저트」(2015)등작품에서헤어초크는주로거대한자연에맞서는광기어린인물혹은사회에서소외된인물을표현했다.작가로서12권이상의저서를출간했고,1980년대이후에는오페라연출가로도활동하며독특한연출로주목받았다.

목차

서문

얼음속을걷다

후기를대신하여
로테아이스너에대한찬사
헬무트-코이트너상수상축하연설

옮긴이의말

출판사 서평

내가걸어서파리에간다면그녀는죽지않을것이다
독특한세계관을지닌예술가들사이에서는이상한일이많이벌어진다.그러나1974년11월에독일뮌헨에서시작해서한달뒤파리에서끝난이작은사건만큼기이한일은드물것이다.사건의전모는이렇다.당시독일영화의미래로꼽히던젊은감독베르너헤어초크는1974년11월23일에긴급한전화를받는다.대학생때만난평생의은사이자전후독일영화의정신적지주인로테아이스너가위독한상태이니어서그가입원한파리의병원으로오라는이야기였다.서둘러짐을싸던헤어초크는갑자기움직임을멈추고생각에잠긴다.그순간,그는깨달았거나계시를받았던것이다.그는자신이이곳뮌헨에서파리까지걸어간다면아이스너가죽지않으리라는사실을‘알게되었다.’그래서그는최소한의짐과돈만챙긴채춥고습한중부유럽의겨울한가운데를뚫고파리까지걸어갔다.이책은그가이기이한여정중에육필로남긴기록을거의그대로담은것이다.말그대로얼음속을걸어파리로향했던이야기를.

몽상과현실이뒤섞인
어느기이하고아름다운여행기

극적인스토리다.그러나그저이스토리를길게늘여담았다면,예컨대아이스너가자신과영화계에얼마나소중한사람인지,영화와삶이어떤식으로관계를맺는지에관해썼다면이책은오래살아남지못했을것이다.영화역사상가장광인에가까운인물을꼽으라면한손에꼽을수있는헤어초크의일대기만보더라도이보다더극적이고괴상한사건은여럿만날수있다.따라서이도보여행의가장기이한점은다음과같다.가장이상한일도,가장극적인일도아닌데수십년이지나도록사람들에게서잊히지않는다는것이다.사실『얼음속을걷다』에서이극적인도입부는방아쇠에불과하다.중요한역할이긴하지만불꽃을뿜지는않는다.사람들이아직도이일화를잊지않는이유는이방아쇠를통해급격히타오르기시작한‘광인’헤어초크의내면을만났기때문이다.

베르너헤어조크,수수께끼의전도사
2차세계대전이후무너져버린독일영화는1970년대에새로운세대가등장하면서재건의시기로들어섰다.바로프랑스의누벨바그와그들자신의‘할아버지’인독일표현주의의세례를동시에받은젊은이들이내보인‘뉴저먼시네마’였다.이새로운물결속에서가장앞서나간인물은빛과시를함께다룰줄아는음유시인빔벤더스였다.그러나뉴저먼시네마를이끌어가던또한명의천재베르너헤어초크는언어와서사를다루는측면에서빔벤더스와상반된길을갔다.헤어초크는언어적측면,즉대사와서사를아름답게장식하는데에는큰관심이없었다.그는오히려가장인간적인특징이라할인과와언어와서사가작동하지않는지점을사랑했다.그가창조한인물들은설명할수없는사건과제어할수없는열망(여기에는심지어권태도포함돼있다)으로가득하고,그렇게원인모를신열에들뜬인물들은애초에아무런의미없이‘그저거기에있었던’주위세계(자연,빛,그림자)에둘러싸여포위당한다.격렬한포효와침묵으로얼룩진그의초기극영화들과다큐멘터리들은이처럼인간적인상식을무너뜨리고그폐허위에서새로운힘을,이름조차지을수없는열망을찾고자한다.이열망은마치도스토옙스키의작품에나옴직한광적인구도자를연상케한다.대체헤어초크의내면은어떻게구성되어있길래이런영화를만들었는가?『얼음속을걷다』는그내면을드러내보이고독자를그폭풍속으로초대한다.

몽상과기억과풍경을하나로녹인뜨거운폭풍
『얼음속을걷다』는평범한도보여행일지일수가없다.어릴때부터고독속에서명명할수없는내면의열망을관찰했던헤어초크는스스로부여한계시에따라떠난이여정역시내면의열망을통해재구성한다.한겨울유럽내륙의숲과산등성이를돌파하는그와늘함께하는것들은세상의종말을묘사한소설을연상케한다.눈보라와추위,어디에나존재하는까마귀,죽었거나늙은동식물들,발과사타구니의통증……언어는이우울하고어두운존재들을틈틈이반복해서묘사하다가지쳐쓰러진다.그렇게언어와인과와의미가쓰러진자리에계시를얻은자들특유의비전(vision)이출현한다.이렇게갑자기나타났다가사라지는몽상들이현실을점점잠식하면서독자는헤어초크가실제로경험한것과그가‘본’것들을구별하기어려워진다.비(非)의미의뜨거운폭풍속으로말려드는것이다.그폭풍속에담긴세계는기이하게아름답다.커다란개가목줄에매달린주인의시체를끌고산책을나선다.어떤새들은땅의내부에서,중력의중심에서솟아나온다.바짝붙어달리는두화물차의운전기사는때로서로의차로건너간다.간호사는바싹마른시체에게수액을공급한다.고독하고가난한여자는그에게죽은세아들에대해끊임없이이야기하지만자기자신에대해서는거의아무말도하지못한다.수조에온갖희귀한생선을담고있지만,그것들을절대로팔지않는생선요리가게가있다.
『얼음속을걷다』는그렇게특별한여행기다.영화역사상가장독특한시선을가진감독이실제로세상을어떻게바라보고있는가를엿볼수있는책이기도하다.비슷한시기미국의‘비트제너레이션’작가들이작열하는태양아래에서모든감각을극대화시켜세상을녹여냈을때,독일의한영혼은모든즐거움을유폐하고스스로택한고난속에서목격한환상과계시로세상을재구축했다.
그간폐허위에서다시피어난독일영화속에어떤특별한피가흐르는지확인할수있는방법은거의없었다.이짧은여행일지는단번에그피를뿜어내는심장으로독자를데려간다.그심장으로향하는여정은다른어디에서도보기어려울만큼괴이하고피로하며아름답다.만약육체의고난속에서마음을텅비워버리고그안에예기치못했던생각과이미지를담는게도보여행(혹은순례)의목적이라면,이책을집어든독자는세상에서가장뛰어난도보여행기와마주하게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