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속에 호랑이

햇빛 속에 호랑이

$12.00
Description
삶의 처소를 뚫고 나오는 최정례의 시,
21년만에 새 장정 입다
시란 존재와 부재의 전후가 구별 없이 혼효되는 자리로 들어서는 것임을 이보다 더 넓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수명 시인

최정례 시집 『햇빛 속에 호랑이』(세계사, 1998)가 아침달 출판사에서 복간됐다. 시인의 개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주저이나 한동안 만날 수 없었던 최정례의 두 번째 시집을 초판 발행 21년 만에 새 장정으로 만들어 새 독자들 앞에 선보인다. 시간, 죽음, 노동, 사랑이라는 네 가지 보편적 주제 아래 50여 편의 시를 묶은 본 시집은 시간과 기억 속에서 흐트러지고 휘발되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존재와 부재에 관한 물음들을 던진다. 표제작을 비롯한 많은 시편들을 여성 화자라는 관점을 통해 읽어 내려갈 때, 시집 도처에서 발견되는 부재에 대한 감각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가 더욱 명확해진다. 이러한 다시 읽기를 통해 최정례의 시가 선취했던 감각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최정례

경기도화성에서태어났다.고려대국문과와동대학원을졸업하고,1990년『현대시학』을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으로『내귓속의장대나무숲』『햇빛속에호랑이』『붉은밭』『레바논감정』『캥거루는캥거루이고나는나인데』『개천은용의홈타운』이,번역서로제임스테이트산문시집『흰당나귀들의도시로돌아가다』가있다.백석문학상,현대문학상,미당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1부-시간
드디어

어처구니없는구름
나뭇잎에서나뭇잎으로
저녁에잡혀온도둑
지락와도
거울속에거울거울거울
낮달
능소화가있는마을
끝장면
어떻게왔을까
북소리
옛집앞을

2부-혹은죽음
마당을덮어가는그림자
약국을지나다
산벚꽃나무하고여자그림자하고

저햇빛삼천갑자를흘러
길이움푹패이다
그나무뒤
티티카카,티티카카,서울
봄소나기
사막편지
공룡발자국을보러갔다
고기사러갔던길
냄새
안돌아온여행

3부-또는노동
밥먹었느냐고
햇빛속에호랑이
비맞는전문가
자고새
3분자동세차장에서
누운시인

자개장롱속으로
자전거가있었다
무쏘앞에흩어진사과장수

쥐똥나무는쥐똥나무열매를매단다

4부-사랑
돌멩이가나를쥐고

유리닦는남자
꽃핀복숭나무에게
그모자
수박에게
없는나무
풍선장수가있던사거리
금새를잡은벼룩의행복한손
돌멩이어떻게새가됐을까
천사

해설|어른거리는이미지,주체의자맥질―이수명

출판사 서평

나와는무관하게유령처럼흘러가는이미지들

『햇빛속에호랑이』에등장하는이미지와장면들은꿈처럼흐릿하다.실재하는지실재하지않는지,현실의것인지꿈속의것인지분간키어려운그이미지들은주체의시선을“조용히스쳐지나”가고“급히도사라져버린”다.

갑자기바람이한줄불더니나뭇잎들쏟아지고벌판이삽시간에잿빛으로변했습니다오래걸었습니다아이가달려오며부르는소리들은것도같습니다꽃을내미는것도같았습니다받지않았습니다왜그랬는지모릅니다뒤돌아안보려고안간힘을썼습니다돌아본듯도합니다그집은온데간데없었습니다아니착각인지도모릅니다
―「끝장면」부분

“일분동안에십수년이흘러”가는기억의시간속에서이미지는흐릿한상태로삽화처럼등장한다.최정례의시속에서이기억의이미지는나를중심으로펼쳐지는게아니다.오히려나와는무관하게흘러가는시간이있으며,나는그시간의한틈에놓여흘러가는풍경사이를스치는존재로서등장한다.이시집에서현실과몽환의경계가뚜렷하지않고,설화,민담과상상이뒤섞인채로장면들이나타나게되는것은이때문이다.이처럼주체의의지와는무관하게“유령처럼흘러”가는이러한이미지들속에서독자들은당혹감을느낄수있다.이러한당혹감에관해해설을쓴이수명시인은이렇게말한다.실은우리또한우리가보고있는것들이어디서어떻게왔는지모르며,따라서우리또한왜여기에있는지알수없는것이라고.지금우리의눈앞에놓여있는그것들처럼우리또한처소없이순간적으로편재할뿐이라고말이다.


흐릿한생에구멍내기

“우리가보고있는것이어디서어떻게왔는지모른다.따라서우리도어디에있는지비로소모르게된다.”라는이수명의말처럼,시집곳곳에는영문도모르고삶의처소에던져진화자들이등장한다.「약국을지나다」의화자는자신이“왜여기를지나는지/왜저붉은알약들을바라보았는지/모른다”.「고기사러갔던길」의화자는고기를사러나갔다가엉뚱한장면들과조우하며길을잃는다.이러한‘삶속에서길잃기’는꿈이나죽음과같은부재의편린으로자주등장하며변주된다.
때때로그꿈,혹은죽음같은부재는자기존재에대한외부의부정으로도나타난다.직접적으로여성의노동과관계하는두편의시는특히그렇다.「밥먹었느냐고」는가족중아무도자신에게밥먹었느냐고묻지않아꽝꽝나무를향해“나를엄마라고불러줄수있겠니?/날여보라고불러줄수있겠니?”라며“밥먹었어?”하고물어봐주겠냐고요청하는시다.가족의삶속에서그존재가축소되고소외되는여성의날것인목소리라더진실하게다가온다.표제작「햇빛속에호랑이」는이러한여성의희생을전래동화‘해와달이된오누이’를패러디해그려내고있다.

부동자세로두눈부릅뜨고노려보고있는거라빠빳한수염털사이로노랑이그르한빨강아니불타는초록의호랑이눈깔을

햇빛은광광내리퍼붓고
아스팔트너무나고요한비명속에서

노려보고있었던거라,증조할머니비탈밭에서호랑이를만나,결국집안을일으킨건여자들인거라(…)
―「햇빛속에호랑이」부분

호랑이를만나떡으로는모자라팔다리를다내어줄정도로자기를희생해가며집안을일으킨여자들의이야기를강렬한채도의이미지로그려낸이시는어떤부정으로도지워지지않고계속되는여성성의생명력을간직하고있는듯이보인다.이러한시의힘은자기도모르게내던져진흐릿한생의한가운데를찢고구멍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