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 - 아침달 시집 28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 - 아침달 시집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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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삶의 심부에서 꿈꾸고 있는
어두운 가능성의 단어들

성윤석 시인의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가 28번째 아침달 시집으로 출간됐다. 2019년 펴낸 『2170년 12월 23일』로부터 3년만에 나온 여섯 번째 시집이다. 성윤석의 시는 일상 속 흘러가는 시간 바깥에서 일어나는 뜻밖의 사건처럼 발생한다. 시인은 아무런 목적성 없이도 계속해서 시를 써나가며, 반항적인 물질로 숨어 있는 문장을 들어 올려 시를 확대시키고자 한다. 견고한 일상 한편에서 불가능성을 꿈꾸는 시도가 이루어질 때, 그것은 삶의 바깥에서 흘러가는 또 하나의 삶이 된다.

뜻밖이라는 밖에서 마주하는
인생의 몇 가지 사실들

가장 견고한 건 견고한 일상이다
시간에 맞춰 일하고 밥 먹고 싸는 것
아무도 깨뜨릴 수 없다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게
내 실수다
화단에서 말을 엎질렀더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
-「엎질러버린 문장」 부분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엎질러버린 문장」이라는 시에서 그는 말한다. “가장 견고한 것은 견고한 일상”이라고. 일상의 견고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것. 시간에 맞춰 일하고 밥 먹고 싸는 것. 인간이 일상을 영위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동시에 충분한 행위. 그러한 가장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 일상의 견고함을 만든다.
그러나 시인은 이 단순한 견고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깨트리는 “실수"를 범하고야 만다. “화단에서 말을 엎질렀더니, 이렇게/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 이렇게 되어버렸다니, 어떻게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쓰는 자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깨진 몇 개의 접시를 깨지기 전으로 되돌리지 못하는 것처럼, 쓰는 자가 되어버리는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시인에게 있어 “내가 잘 살지 못하는 이유”다.
쓰는 일은 필요를 위한 행위일까? 시인은 “나는 직장을 버리고/글을 쓰며 살고 있다/이 일은 유효한가”(「겨울 경제」)라며 유효성을 묻는다. 그러나 시인은 답을 내리거나 듣기 위해 자문한 것 같지는 않다. 일의 유효성과 관계없이 시인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간수가 오기 전에 계속해서 캄캄한 독방 바닥을 파듯이 글을 쓴다. “뜻밖”이라는 바깥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나 뜻밖이라는 바깥을 만나기 위함이 과연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얼굴의 재료는 얼굴”이고 “시의 재료가 시”(「얼굴」)이듯이 나아간 바깥에는 또한 바깥의 바깥이 있기에, 그러한 행위는 목적 달성을 위함이기보다는 목적 없음, 혹은 목적 상실의 지속에 더 가깝다. 성윤석의 새 시집은 그처럼 견고한 일상 바깥으로 나가 끝없이 바깥을 사유하는 방랑자들의 이야기이다.
시인은 목적 없는 상태로서의 쓰기를 지속하며 문밖에 도착해 있는 장면들(「한 시절」)을 만나고 통과한다. 일상에 실패하면서까지. 이러한 쓰기를 통한 일상 바깥으로의 전전을 통해 ‘나’에게는 삶의 바깥에서 흘러가는 또 하나의 삶이 만들어진다. 동시에 “나를, 뒤적여봅니다 쓰는 자가 되어 한 바퀴 돌아봅니다”(「합정동」)라고 그가 말하듯이, 그러한 쓰기를 통해 우리의 인생 역시 뒤적거릴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된다.

쓰는 자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쓰는 자들은 나서고 도착하는 자입니다 도착하자마자 나서는 자들입니다
-「합정동」 부분

성윤석은 “나는 늘 밖에서 밖으로 나갔다”(「자기의 얼굴을 팬티로 생각하는 사내의 이야기」)라고 쓴다. 그런데 바깥의 바깥은 간혹 어딘가의 중심이기도 해서 ‘아무 관계도 없는 방관자’(「역사란 무엇인가」)는 꿈꾸듯이 누군가가 건네준 무엇을 들고 달려가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의 필연적 소명에 속한 일이라기보다는 우연적 운명에 의해 맞닥뜨리는 사건에 가깝다. 그러한 사건을 겪어나가며, 시는 사물의 심부를 밝히는 특별한 거울처럼 우리의 일상을 비춘다. 끊임없이 재난문자가 도착하는 우리의 자본주의 도시와 그곳의 사물들을. 성윤석 시인의 개인적 내력과도 같이 여러 직업을 떠돌고 있는 서민적 화자들의 삶을. 그 목소리는 현장에서 울리듯 생생하기에 그러한 삶들을 기록하는 데 사진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망설임 없이, 혹여 망설임이 있더라도 일단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려는 듯한 성윤석 시인의 시구와 행간에서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만질 수 있는 육체처럼 다가오는 언어를 통해 쓰기의 지속이 맞닥뜨리는 뜻밖의 기쁨과 슬픔 들을 나누게 되기를 바란다.
저자

성윤석

서울과수도권에서석유를원료로하여만들어진것들을식물기름으로바꾸는열경화성식물수지벤처기업을하다가망했다.그후지방어시장에서오토바이를3년반탔다.지금은창원에서작은자영업을하고있다.기자,공무원,벤처기업대표,묘지관리인,부두노동자등을전전했다.1990년〈한국문학〉신인상을받고작품활동을시작,시집『극장이너무많은우리동네』(문학과지성사)『공중묘지』(민음사)『멍게』(문학과지성사)『밤의화학식』(문예중앙)『2170년12월23일』(문학과지성사)등다섯권을펴냈으며,장편동화『연탄도둑』(생각하는창)을쓰기도했다.박영근작품상,사이펀문학상,김만중문학상대상을받았다.

목차

1부:토끼는빠르니까두귀를세운채
경주하는슬픔
엎질러버린문장
겨울경제
역사란무엇인가
오늘을극복하셨군요
손으로누르고있던것들
마르는시간

여기서뭐하세요…라는물음에부딪쳤다
산양/사냥
자기의얼굴을자기의팬티로생각하는사내의이야기
편집실
은목서
나는나비를만들순없다
팔월의배롱나무

2부:흰것은추위속에있고
합정동
힘든밤인가
사실
9쪽
13쪽
14쪽
야구공

기후행동
해변이어디있는지아세요
겨울공장
비와요리
동창회
힘든밤인가

3부:문장들은접혀있었다
4월식문장
목련그늘
무화과
비명을지르지않는양들처럼
소고
희망을가져본다
방랑자들
날아가는모든것
안개의각도
실시간
낚시
다마스쿠스그여자
이명

4부:어떻게든…이란말에
인간과숲
카페
한시절
벗어놓은바지
어떤장소들
이석

부엌
우연
32평
재난
중정이있는낡은상가
두부

5부:진짜오리를타겠다고
얼굴

상자
외출
사랑
서울
조용한흔적들
시를쓰는인간
비슷한것이되어견디는


아티스트

출판사 서평

뜻밖이라는밖에서마주하는
인생의몇가지사실들

가장견고한건견고한일상이다
시간에맞춰일하고밥먹고싸는것
아무도깨뜨릴수없다
그렇게살지못했다는게
내실수다
화단에서말을엎질렀더니,이렇게
되어버렸다이렇게되어버리는것
―「엎질러버린문장」부분

시인이란어떤사람인가.「엎질러버린문장」이라는시에서그는말한다.“가장견고한것은견고한일상”이라고.일상의견고함은어떻게이루어지는가?시간에따라움직이는것.시간에맞춰일하고밥먹고싸는것.인간이일상을영위함에있어필수불가결한동시에충분한행위.그러한가장단순한행위의반복이일상의견고함을만든다.

그러나시인은이단순한견고함을유지하지못하고깨트리는“실수"를범하고야만다.“화단에서말을엎질렀더니,이렇게/되어버렸다이렇게되어버리는것”.이렇게되어버렸다니,어떻게되어버렸다는말인가?쓰는자가되어버렸다는말이다.깨진몇개의접시를깨지기전으로되돌리지못하는것처럼,쓰는자가되어버리는일은돌이킬수없는일이다.시인에게있어“내가잘살지못하는이유”다.

쓰는일은필요를위한행위일까?시인은“나는직장을버리고/글을쓰며살고있다/이일은유효한가”(「겨울경제」)라며유효성을묻는다.그러나시인은답을내리거나듣기위해자문한것같지는않다.일의유효성과관계없이시인은시간이라는이름의간수가오기전에계속해서캄캄한독방바닥을파듯이글을쓴다.“뜻밖”이라는바깥을만나기위해서다.

그러나뜻밖이라는바깥을만나기위함이과연목적이될수있을까.“얼굴의재료는얼굴”이고“시의재료가시”(「얼굴」)이듯이나아간바깥에는또한바깥의바깥이있기에,그러한행위는목적달성을위함이기보다는목적없음,혹은목적상실의지속에더가깝다.성윤석의새시집은그처럼견고한일상바깥으로나가끝없이바깥을사유하는방랑자들의이야기이다.

시인은목적없는상태로서의쓰기를지속하며문밖에도착해있는장면들(「한시절」)을만나고통과한다.일상에실패하면서까지.이러한쓰기를통한일상바깥으로의전전을통해‘나’에게는삶의바깥에서흘러가는또하나의삶이만들어진다.동시에“나를,뒤적여봅니다쓰는자가되어한바퀴돌아봅니다”(「합정동」)라고그가말하듯이,그러한쓰기를통해우리의인생역시뒤적거릴수있는한권의책이된다.

쓰는자들은어디서오는걸까요쓰는자들은나서고도착하는자입니다도착하자마자나서는자들입니다
―「합정동」부분

성윤석은“나는늘밖에서밖으로나갔다”(「자기의얼굴을팬티로생각하는사내의이야기」)라고쓴다.그런데바깥의바깥은간혹어딘가의중심이기도해서‘아무관계도없는방관자’(「역사란무엇인가」)는꿈꾸듯이누군가가건네준무엇을들고달려가기도한다.따라서그것은시인의필연적소명에속한일이라기보다는우연적운명에의해맞닥뜨리는사건에가깝다.그러한사건을겪어나가며,시는사물의심부를밝히는특별한거울처럼우리의일상을비춘다.끊임없이재난문자가도착하는우리의자본주의도시와그곳의사물들을.성윤석시인의개인적내력과도같이여러직업을떠돌고있는서민적화자들의삶을.그목소리는현장에서울리듯생생하기에그러한삶들을기록하는데사진은필요하지않을듯하다.

망설임없이,혹여망설임이있더라도일단은멈추지않고움직이려는듯한성윤석시인의시구와행간에서는성큼성큼걸어나가는사람의뒷모습이보인다.만질수있는육체처럼다가오는언어를통해쓰기의지속이맞닥뜨리는뜻밖의기쁨과슬픔들을나누게되기를바란다.

책속에서

겨울이오면
그곳허름한아파트아이들은
봄과여름에그러했던것처럼
고층아파트를질러가지못하고
돌아학교에간다
눈이내리고바닥은얼것이다
나는직장을버리고
글을쓰며살고있다
이일은유효한가
―「겨울경제」부분

꿈을꾸었는데
사람하나가모자란다고
방관자인나보고끼어들라는거야
글쎄,아무관계도없는나보고
나는나도모르게줄을섰는데
헉헉거리며달려온
누군가가무언가를자꾸건네주었고
나는달렸지
이어달렸지
이어
너를당신을허수아비만선들판을
―「역사란무엇인가」부분

사진을잘찍지않는다
나는늘밖에서밖으로나갔다
얼굴이사진에박히는걸
좋아하지않는다
어릴때군대시절의사진도
없다
한때군인이었다는거
회사원이었다는거
사장이었다는거
사진이몇장없다동료
작가들과도찍은사진이
거의없다
나는늘밖에서밖으로나갔다
―「자기얼굴을자기의팬티로생각하는사내의이야기」부분

쓰는자들은어디서오는걸까요쓰는자들은나서고도착하는자입니다도착하자마자나서는자들입니다내가말하기도전에나의말을낚아채가는자들입니다나또한그런부류입니다
―「합정동」부분

이웃들이,오래전이웃들이묻혀있을길을
건너간다고생각한다
어떤고고학자도도굴꾼도
발굴하지않을길들의지하에서

아무래도나는언젠가그언젠가
가슴에폭탄을두르고
어두웠으나,환해지는곳으로
천천히걸어가스위치를누른적이있는것만
같다
―「기후행동」부분

그는병이들었다고했다아무곳에도가지못한다고했다
갈필요가없는사막머물필요가없는초원새벽의눈길
만이남았다고했다그곳들에서산다했다열심히기도했으나
막상죽고나면갈곳이
없을거라고도했다그는병이들었다고했다자신의병엔
자신의뜻도있다고도했다
―「방랑자들」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