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복숭아 - 아침달 시집 30

무해한 복숭아 - 아침달 시집 30

$10.33
저자

이은규

2008년동아일보신춘문예시부문등단.시집『다정한호칭』,『오래속삭여도좋을이야기』를펴냈다.시창작동인‘행성’활동중이다.

목차

1부
터키아이스크림
밤의물체주머니
수박향,은어
살구
수국과바람구두
카스텔라의건축
나와너와귤과탱자
밤의하얀
당인리발전소
명랑한달리기
차찬텡

2부

천칭자리스티커북
납작복숭아
목화씨앗속삭임
자몽망고튤립
밤의포춘쿠키
돌멩이추
후추나무아래서재채기참기
흰숲
남산타워
수플레팬케이크

3부
자작나무모빌
청귤
누가고양이목에방울을달까
통영미니어처
춘분
펠롱에일
밤의크루아상과토끼
대신쓰는일기
워터프루프,여름밤
붉은점박이호박
장난감신부

4부
키위,새
봄편지
어린양의분홍발굽
말에게속삭이는사람
무럭무럭인디언소녀
네가그린동그라미는잘도도네돌아가네
찰리의초콜릿공장
알로하알로하
복숭아라이브드로잉

발문
당신의안부를묻다-남승원

출판사 서평

당신에게전해지기위해
오래이어지는편지속문장들

오늘은낮과밤의길이가같은춘분
과연나누는일사이좋게애틋하다
애틋하게함부로
밤에피어나기를즐겨했던꽃,몸들

문득종이한장을절반으로나눠
편지를주고받던그풍경을기억이라부르자
지나간문장을읽을때차오르는무엇을
구슬같은눈물이라고부르지말자
텅빈동공에풍경이차오르고있으므로
―「춘분」부분

봄은겨울을인내한뒤맞이하는따뜻함이기에애틋하다.그애틋하고다정한온기가싹을틔우고꽃을피어나게한다.그온기는인간인우리에게도약동할힘을건네고,우리는그힘으로누군가를만나고자그리워한다.그마음의수신인을찾아편지를쓴다.

춘분은낮과밤의길이가거의같아지는날이다.이은규시인은춘분의이러한사전적의미를살피는데그치지않고,‘춘분(春分)’이라는단어를구성하는한자를살펴‘봄을나누다’라는뜻을밝힌다.그리하여춘분은밤과낮이공존하고,다가올날의따스함과지나온날의스산함이공존하고,한사람과다른한사람이우리가되고,또우리는한사람과다른한사람이되는,만남과이별이공존하는날이된다.
봄을나누는일은종이한장을나눠편지를주고받던기억의풍경을불러온다.편지는마음을전하는하나의형식이다.이는대체로격식과예의를담고있기에무거운마음을담아날려보내기에적합하다.이때편지의내용은일상을묻는다정한안부이기도,깊은그리움이기도,때로는원망이기도하겠지만,어느쪽이든서로의마음을나누는일이라는점에서편지는가장내밀한방식으로언어를교류하며기억을보존하는경험이다.

만남이전과이후를나누며이어지는편지는내용적경험에만머무르지않는다.남승원문학평론가는발문을통해“‘편지’는“한사람”과다른“한사람”을인식하는계기로나아”간다며,그것이이은규시인의윤리적감각이라고언급한다.시속에드러나는편지쓰기라는행위를통해독자는시를쓰는주체보다도그편지를받게될여러수신자들을상상하게만들어준다는것이다.이는타인을대면하고말을전하는일이며,이러한윤리적감각이나와다른존재들과의만남을가능하게만드는유일한방식이라고그는말한다.

우리는편지쓰기의윤리를통해만난다.그렇다면어떠한것들이우리의만남을기억하도록만들어줄까?어쩌면음식들,특히달콤한과일과디저트일지도모른다.누구와무엇을했는지를떠올리는일이잘되지않다가도무엇을먹었는지를떠올리고나면그날의기억이선명하게떠오르는경험들처럼,음식에는기억의풍경을강하게환기하는힘이있다.이은규의시에서숱한기억들을환기하기위해여러먹거리가등장하는것은그런점에서자연스럽다.아이스크림,살구,카스텔라,원앙차,납작복숭아,포춘쿠키,크루아상,수플레팬케이크,펠롱에일…그중많은것들이과일과디저트라는것은함께나눠먹기에좋은것들이며또한슬픈기분을다독이기에알맞도록달콤하기때문일까.이은규의시는여러음식사물들의특징에기억의풍경을덧입히는데서그치지않고,이를통해만남과대화의자리를만들어낸다.그런데그자리에한사람이도착하지않는다.

아직해질녘창가와
탁자와우유와나무포크와
노을과카스텔라와설탕알갱이가있습니다만
이름이지워진안부를수소문중입니다
한사람만결석한한사람의생일
―「카스텔라의건축」부분

어쩌면우리의슬픔은사랑이끝나서가아니라
한사람의마음만계속되기때문일지도몰라요
―「명랑한달리기」부분

시인이“언제쯤편지를보낼수있을지모르겠습니다”라고썼듯이,편지중에는보낼수없는편지또한있다.특히언젠가부터의봄이후에는더욱그렇다.편지를전해야할이를더는만날수없을때편지는마침표를찍지못한채계속해서이어지는하염없는글쓰기가된다.한사람에게들려주기위해수집하고기억해온온갖이야기들,영화와애니메이션과꽃과신비한동식물의세계들은내밀한이미지가되어시속에박힌다.

이마음의공동체는부재한자리를통해이별과상실을기억한다.이기억을이어가는것이선이라는것을우리는알지만,“하나의선을지키기위해/너무많은악이필요”했다는아픈역설의기억또한우리는가지고있다.이자리에서다시어떻게무해성을논할수있을까?

나는자리를지켰다열두번째나무아래오래서서복숭아열매를바라보았다천천히차오르는생각혹은열매,펜을들고있지않았지만복숭아라이브드로잉은계속되었다드로잉이끝날때까지그자리에머물러야만할것같았다
―「복숭아라이브드로잉」부분

한사람이떠난자리를시의화자가지키고있다.그는같은생각을떠올리는대신에복숭아나무아래에서서복숭아열매를바라보고있다.열매를따라움직이는그의생각의시선인지,아니면보이지않는누군가의손길인지모를라이브드로잉이계속된다.그라이브드로잉과함께생각은천천히차오른다.이드로잉이언제끝날지는아무도알수없다.그에게는드로잉이끝날때까지그자리를지켜야할것같다는강한예감만이있을뿐이다.그것은선과악이쉽게판단되고호도되는지금여기에필요한오랜성찰의시간인동시에긴애도의시간과도같다.무엇이무해한것인지그는아직모른다.다만나와는다른한사람과대면하고,그를다치게하거나잃지않기위해무해함의윤리가필요하다는것은안다.그가얻으려하는무해함을위한오랜기다림의자리가오늘날우리에게도필요한것은아닐까.이끝없이피고지는이야기를많은이들이함께나누기를바란다.